제577화
‘그러니까, 이 일은 양왕의 거사가 성공을 거두고 나면 그때 이야기해야 해. 게다가…….’
머릿속을 정리한 엽연채가 입을 뗐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음식을 먹을 때도 종종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주운환은 그녀의 머리를 슬슬 어루만지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 몇 달은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이때, 밖에서 작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운환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그는 일찍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만, 집에서는 지금처럼 늦게까지 꾸물거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무슨 일이냐?”
주운환이 냉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 전하를 곁에 모시는 이 공공이 오셨습니다.”
소월의 대답에 주운환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선 알겠다고 말해 두고 몸치장 용품을 가지고 들어오너라.”
“예.”
주운환은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걸친 후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혜연이 이미 청유와 매화 등을 데리고 서 있었고 각각 놋쇠 대야와 수건 등의 세면용품을 들고 있었다.
혜연은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있는 여종을 쳐다보며 추길을 찾았다.
“추길이는?”
“오늘 제가 나왔을 때 추길 언니 방문이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감기에 걸린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언니는 방에서 쉬고 있어요.”
매화의 대답에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럼 며칠 푹 쉬라고 해라.”
매화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부는 단장을 마친 후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소월이 밖에서 이계를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 공공, 들어오시게.”
“예.”
이계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와 보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앞장선 소월이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계가 그녀를 따라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응접실로 들어가자 탑상에 앉아 있는 엽연채와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진서후와 진서후 부인을 뵈옵니다.”
이계는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이 공공,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주운환은 얼른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려는 시늉을 했다.
“후야와 부인께서는 아직 아침 식사 전이십니까? 소인이 느닷없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 후야와 부인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했습니다.”
이계는 몸을 굽혀 사과했다.
하지만 사실 벌써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이니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그저 엽연채와 주운환이 늦게 일어난 것뿐이었다.
서로 간에 몇 차례 상투적인 인사말들이 오가고 나서야 이계는 용건을 전달했다.
“전하께서 진서후부에서 보낸 연말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초록색 바탕에 자주색 꽃문양이 들어간 유리병을 특히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후야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더군요! 전하께서 소인에게 답례 선물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선물은 엽연채가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서후부의 바깥주인이 주운환이니 이 공공은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 뒤에서 어린 환관 둘이 걸어 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각 네다섯 개의 상자가 들려 있었다.
보통 이렇게 선물을 주고받을 때는 사람들이 먼저 태자부에 선물을 보내고 태자가 이후에 사동이나 어린 환관들을 통해 답례품을 보냈다.
이계는 태자를 곁에서 모시는 최측근이라 이런 일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계가 직접 와서 답례품을 건네는 걸 보니 태자가 주운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주운환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려 있었고 붉은 입술도 위로 올라가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였다.
‘태자 전하께서 이렇게 체면을 살려 주셨으니 진서후가 득의양양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태자 전하께 감사드리네. 이 공공도 수고가 많군.”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사례를 표했다.
“참, 전하께서 진서후 대인과 만나신 지 꽤 오래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대인의 환영회를 열기 위해 천수하天水河의 명정화방茗頂畵舫을 통째로 빌리셨으니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꼭 오셔야 합니다.”
이계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전했다. 아무래도 지금 정선제의 병이 위중하니 그 어떤 귀족도 감히 대놓고 먹고 마시며 즐길 수가 없었다.
주운환은 허허 웃더니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공, 걱정 말게. 반드시 제때에 참석하겠네.”
“예.”
이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공공, 같이 나가세.”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직접 이계를 문밖으로 배웅해 줬다.
잠시 후, 주운환이 돌아와 보니 엽연채는 이미 소청의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주운환이 자리에 앉자 혜연이 제비집을 넣은 죽 한 그릇을 그의 앞에 놓았다.
“부인, 전 정오에 외출할 겁니다. 저녁 먹을 때는 돌아오겠습니다.”
주운환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대답했다.
“네. 바깥일이 중요하죠.”
주운환이 교자 한 개를 집어 엽연채에게 건네며 보니 그녀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스러워 반사적으로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돌아올 겁니다.”
“네.”
엽연채는 그저 교자를 베어 물었고, 주운환은 자신이 있거나 없거나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조금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이때, 밖에서 여양이 뛰어 들어왔다.
“나리, 대복이가 왔습니다. 나리께서 도성으로 돌아오셨는데도 집에 들르지 않아 백야와 마님께서 나리를 무척 보고 싶어 하신다고 합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마님이야 나리께서 죽기를 바라셨겠지만!’
주운환이 말했다.
“우리 식사를 마치면 정국백부에 갑시다.”
부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함께 정국백부로 향했다.
매화는 엽연채가 떠나는 모습을 보더니 후조방으로 돌아와 추길을 들여다봤다. 추길은 아직도 침상에 누워 늘어져 있었다.
“추길 언니, 제가 언니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씀드렸더니 마님께서 며칠 쉬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추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며칠 쉬라고 하셨다고?”
추길의 낯빛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 * *
엽연채 부부는 주씨 가문에 들렀다가 오시가 되기 전에 그곳을 떠났고 주운환은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고 나서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엽연채와 혜연은 탑상에 앉아 함께 수를 놓았다.
최근 들어 그녀는 작은 옷 한 벌을 만들었고 지금 두 번째 옷을 만들려고 했다. 아이에게 만들어 준다는 생각만 하면 힘들다는 느낌이 전연 들지 않았다.
이때, 누군가가 차를 들고 걸어왔다. 혜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뜻밖에도 그 사람은 추길이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하지 않았어? 돌아가서 쉬어.”
“콜록콜록, 괜찮아.”
추길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젯밤, 엽연채는 회임을 한 몸인데도 여전히 주운환을 독차지한 채 추길에게 그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다. 추길은 엽연채에게 크게 실망했고 화가 났다. 그러니 엽연채의 얼굴을 보고 싶을 리 없었고 그녀의 차 시중을 드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꾀병을 부리며 매화에게 자신이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더러 며칠 동안 쉬라고 한 것이다.
며칠이나 쉬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엽연채는 다른 여인이 주운환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걸 원치 않았다. 주운환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자신에게조차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지금 병이 났다고 하니 엽연채는 아예 얼씨구나 하고 사람을 따돌렸다. 그러니 어떻게 계속 병이 난 척을 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추길은 감히 화를 낼 수도 없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다.
“괜찮다고? 기침도 하잖아.”
혜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어서 돌아가! 마님의 배 속에는 지금 어린 세자가 계셔.”
그러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난 감기에 걸린 게 아냐. 방금 전에는 목이 좀 건조했던 것뿐이야.”
“그럼 아침에는 왜 나오지 않았는데? 매화가 너 감기 걸렸다고 하던걸.”
혜연은 그녀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어. 베개를 잘못 베고 자서 담이 오는 바람에 겨우 잠깐 눈 붙인 건데… 매화 그 계집애가 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한 거야……. 걔 귀가 어떻게 됐나 봐.”
제 딴에는 농담조로 대꾸하려고 했으나 추길의 말투에는 숨길 수 없는 무뚝뚝함이 묻어났다. 추길은 슬며시 엽연채를 훔쳐봤는데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수만 놓을 뿐,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추길의 마음은 한층 더 언짢아졌고 방 안에는 어색한 공기만 감돌았다.
* * *
이튿날, 명절 하루 전날이라지만 올해는 정선제의 병이 위중해 궁에서 연회를 열지 않았다.
주운환과 엽연채는 자주 입는 옷 두 벌을 챙겨 정국백부에 갔다. 젊은 부부가 독립해서 따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식구도 적고 또 집이 정국백부에서 멀지도 않으니 명절에 본가로 돌아가지 않으면 불효를 저지른다는 둥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주운환 부부와 주씨 가문 사람들은 다들 겉으로만 웃을 뿐 속은 편치 않은 사이였다. 그래도 진씨는 예전과 달리 몸을 잔뜩 사리고 있었다. 그녀조차 엽연채 부부를 건드렸다가 되레 자신들이 큰 손해를 볼까 봐 겁을 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잠자코 있었다.
덕분에 주씨 가문도 그런대로 단란한 분위기 속에서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자 주 백야가 입을 열었다.
“올해는 우리도 불꽃놀이를 하자꾸나!”
과거에는 집안이 가난해 불꽃놀이를 하는 것도 아까워했는데 이젠 집안에서 후야가 나왔고 태자 측비도 나왔으니 주씨 가문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셈이었다. 재산은 아직 주씨 가문이 전성기를 누릴 때의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그래도 주 백야는 기꺼이 이런 오락 거리를 즐기려고 했다.
사람들이 일상원의 정원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이미 의자와 기다란 탑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데리고 기다란 탑상 위에 앉았다. 집 안에 폭죽을 준비해 뒀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주묘화는 엽연채 곁으로 다가와 같이 놀자고 권했다.
“새언니, 우리 같이 폭죽 터뜨려요.”
그러자 주운환이 그녀를 쏘아보며 쫓아냈다.
“폭죽은 무슨, 저쪽에 가서 혼자 놀거라.”
주묘화는 표정이 굳어졌고 백 이낭은 얼른 이쪽으로 다가와 남몰래 그녀를 꼬집더니 작게 나무랐다.
“회임을 하셨잖아요!”
그제야 그 사실이 떠오른 주묘화는 조금 풀 죽은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