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6화
“마마, 어서 자리에 앉아요.”
혜연이 길한 문양이 들어간 수돈을 가져와 탑상 앞에 놓았다. 교 마마는 사양하지 않고 수돈에 앉더니 옅은 한숨부터 쉬고 운을 뗐다.
“마님, 추길이를 첩실로 들일 생각이시죠?”
엽연채가 멍한 표정을 짓자 혜연이 대신 대답했다.
“맞아요. 마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에 첩실로 들이기로 정해졌어요.”
“그 애는……. 제 생각에는 첩실로 들이기로 한 아이가 추길이라면, 다른 아이로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교 마마가 진지하게 자기 속내를 꺼냈다.
“전 나리의 유모이기는 하지만 마님 편입니다. 그러니 마님께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추길이는 너무 약삭빠른 면이 있습니다. 소월이와 백수가 추길이보다는 좀 더 믿을 만할 겁니다. 추길이만큼 용모가 곱지는 않지만 그래도 꽤 괜찮습니다. 사내들이 꼭 예쁜 여인만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시중만 들 수 있으면 되지요.”
혜연은 뜻밖의 말에 덩둘해졌다가 엽연채를 쳐다봤는데 그녀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교 마마는 조금 초조해했다. 그녀는 추길을 첩실로 삼게 되면 되레 골치 아파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혜연은 엽연채가 풀 죽은 채로 조용히 있자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교 마마의 호의는 마님께서 받으셨을 거예요. 늦었으니 돌아가서 쉬세요.”
“아… 그래.”
교 마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혜연은 그녀를 중정中庭의 문밖까지 배웅해 주고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엽연채는 진홍색 운금雲錦 이불을 끌어안고선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마님……. 교 마마의 말을 고려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혜연은 한숨과 함께 이리 말했으나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부군 마음대로 하시라고 해라!”
그녀는 자신을 위해 주운환의 총애를 붙들어 놔줄 사람이 필요 없었다. 누가 와서 그녀와 총애를 나눠 갖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와 나눠 가질 생각이 없으니까. 못 참겠으면 떠나면 그만이었다.
혜연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주운환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이 있으면 누구든 상관없이 그 여인으로 고르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맥이 빠져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마 여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혜연은 명절을 쇠고 나면 다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엽연채는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첩실을 들이고 소연을 연다는 등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마음이 아팠다.
교 마마는 좋은 마음으로, 정말 자신을 생각해서 이런 말을 하러 왔으리라. 하지만 누구든 간에 모두 주운환이 첩실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쪽의 입장에 서서 돕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사내가 첩을 들이는 일은 마치 밥을 먹고 자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자신만은 옹졸하고 인색하고 포용력이 없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행복에 헤살을 놓고 처첩들을 거느리고 살 수 있는 그의 복을 막고 천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더는 이런 것들에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면 그 사람과 함께하면 된다.
‘어차피 나는 아이와 함께 떠날 테니까.’
날짜를 따져 보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마님.”
이때, 추길이 안으로 들어왔다.
“늦었는데 이제 주무실 거죠?”
“그래.”
엽연채는 짧게 대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연은 추길을 힐끔하더니 일어서는 엽연채를 부축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참, 오늘 저녁에 데워 놓으라고 하셨던 제비집 죽은요?”
“지금은 갑자기 또 먹고 싶지가 않구나.”
엽연채는 응접실 밖으로 나갔고,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얼른 혜연과 함께 그녀를 따라갔다.
침실에 도착하자 혜연은 엽연채의 겉옷을 벗겨 줬고 추길은 이불을 깔았다. 엽연채가 그대로 자리에 눕자 추길의 얼굴에는 조금 초조한 기색이 감돌았다. 하지만 엽연채는 두 눈을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연은 추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님께서 쉬셔야 하니 우린 어서 나가자.”
추길은 마음이 무거워졌고 실망감에 몸을 조금 떨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등불로 걸어가 입으로 불을 끈 다음 축 처진 모습으로 방을 나갔다.
문밖으로 나오자 마침 주운환이 씻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하얀색 비단 내의를 입고 있었고 겉에는 담비 털로 만든 두꺼운 소매 없는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는 전부 풀어 헤치고 있었고 몸에는 자욱한 수증기와 목욕 후에 나는 상쾌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추길은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리.”
“음.”
주운환은 그저 냉담하게 대답하더니 홍조를 띤 추길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추길은 몸이 경직된 바람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아직 꺼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원래 엽연채는 이미 잠이 들었으니 그는 다른 곳에 가서 편히 자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운환이 이미 방으로 들어가 살며시 문을 닫은 뒤였다.
추길이 어안이 벙벙해 멀거니 서 있는 동안, 혜연은 유태類台를 손에 들고 계단으로 내려가더니 후조방으로 향했다.
추길도 계단을 내려가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보니 방 안에는 다시 등불이 켜졌고 주운환의 그림자가 창사窗紗 위에 비쳤다.
주운환은 이미 등불이 꺼져 있어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등불을 켰고 잠이 든 엽연채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짓더니 다가가 침상에 앉았다.
“우리 부인 얼굴 좀 쓰다듬어야지.”
그의 다정한 말에 엽연채는 몸이 살짝 경직됐되어 콧방귀를 뀌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이가 눌리잖아요.”
주운환은 더욱 어리둥절했다. 아직 자리에 눕지도 않았는데 자기 때문에 아이가 눌렸다니? 그래도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양보했다.
“살짝만 쓰다듬는 건 괜찮지 않겠습니까?”
“안 돼요.”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나 혼자 잘 거예요. 부군은… 바깥에서 자요.”
주운환은 얼떨떨해졌다. 그는 엽연채가 자신에게 점점 더 차갑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몸을 숙여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난 부인과 자고 싶습니다.”
“안 돼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군이 누를 거예요. 제…….”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엽연채가 자신을 불편해한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자신이 집으로 돌아온 후로 그녀는 늘 쌀쌀맞게 행동하고 자신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여인이 회임을 하면 감정이 오락가락한다던데, 그 말이 진짜인 모양이지?’
주운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럼 탑상에서 잘 테니 보고 싶으면 부르세요. 그럼 바로 오겠습니다.”
“알겠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주억였다.
주운환은 그녀를 살포시 안은 채 몇 번 더 달곰한 입맞춤을 하더니 그제야 침실을 나갔다. 그러곤 응접실로 가서 등불을 끈 다음 탑상에 누워 잠을 청했다. 엽연채는 그의 기척을 들으며 공허해했다.
한편, 추길은 여전히 처소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운환이 들어간 후로 그녀는 초조해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금 엽연채는 주운환의 시중을 들 수 없는 상황이고 주운환은 오랫동안 굶었으니 분명 곁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어줄 여인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결국 방 안의 등불이 꺼지나 싶더니 주운환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엽연채가 기어코 그를 자신의 곁에 남겨 둔 게 분명했다.
추길은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서 후조방으로 걸어갔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고 자신에게 일말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며 엽연채를 원망했다.
* * *
엽연채는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일이 있어 편히 잠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몸이 무겁고 피로해 침상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하지만 꿈속에서 또 정신없이 달리고 산을 오르느라 녹초가 되어 버렸다.
꿈자리가 이리 사나운 탓에 그녀는 자정 무렵 잠에서 얼핏 깼다. 그런데 아주 익숙한 숨결이 자신의 코 주위를 맴도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 보니 누군가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는 그만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그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튿날, 깨어나 보니 엽연채는 주운환의 품속에 있었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정수리 부근에서 느껴지는 고른 숨소리가 그가 단잠에 빠져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그를 깨우기는 뭣해 두 눈을 다시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각이 지나서야 주운환은 움직임을 보였다. 엽연채는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밖에서 자는 거 아니었어요?”
주운환은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어제저녁에 자리에 눕자마자 부인이 애타게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돌아와 부인을 안고 잠을 재웠지요. 그리하니 곤히 잠들더군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있었습니다.”
주운환은 그녀를 감싸 안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어루만지며 깊은 애정을 전했다.
“부인, 부인…….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사실 어젯밤 자정까지 홀로 자던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침상으로 올라가 엽연채를 안고 잠이 들었다.
주운환이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려고 하자 엽연채가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일어날 거예요.”
주운환은 또다시 어리둥절했다. 전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엽연채는 성을 내거나 부끄러워하면서도 늘 가까이 다가오곤 했는데, 지금은 점점 더 냉락하게만 굴었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살며시 감싸 쥐며 말했다.
“부인, 무슨 고민이 있으면 내게 말해 주십시오.”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를 힐끗 쳐다봤다. 사실 그녀도 지금 갈등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에게 첩실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되냐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보면 적어도 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이렇게 갈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양왕의 거사가 결정되지 않았다. 아니, 아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니 주운환은 더욱 조심스럽게 태자 등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판국에서 자신이 이 문제를 따지고 들면 그는 화를 낼 거고 이를 받아들이라고 자신을 타이를 것이었다. 그렇게 한눈을 팔다가 적에게 약점을 잡히기라도 하면 상황은 삽시간에 나빠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