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교 마마의 대답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다. 요 며칠 동안 잘만 먹었던 음식인데 왜 오늘은 저렇게 밥투정을 부린단 말인가. 그녀는 새파란 얼굴로 변명했다.
“요리들이 너무 싱거워서 그랬습니다……. 제가 간을 바꾼 몇 가지 요리는 나리께서 특별히 좋아하신 것들이었어요.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도 있었고요. 두 분의 입맛을 모두 고려했습니다.
여기 있는 음식들은 마님께서 요 며칠 동안 드셨던 것들이에요!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입맛이 변하셨나 봅니다, 마님…….”
추길은 억울한 얼굴로 엽연채를 불렀고, 엽연채는 주운환 앞에 놓은 갑어탕을 힐끗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요. 평소에 잘 먹던 것들인데 오늘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회임을 하면 입맛이 자주 바뀌나 봐요.”
주운환이 밖에서 고생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모처럼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렇기에 엽연채는 그의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말은 하기가 뭣했다. 그리 말하면 한창 잘 먹고 있는 그의 흥을 깨게 되며 그가 편히 식사할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집에 제비집을 넣어 끓인 죽도 있습니다.”
혜연이 말했다.
“일단 데워 놓으렴. 이따가 먹을게.”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하루에 몇 끼를 먹습니까?”
주운환은 그래도 식욕이 왕성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많이 먹어요…….”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이른 아침에 먹고 오시가 되기 전에도 먹어요. 또 점심에도 먹고… 오후에도 먹고… 저녁 식사도 하고… 좀 있다가 또 먹고…….”
그녀는 조금 부끄러워했고, 주운환은 그 모습에 풉 하고 웃더니 손을 내밀어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을 감싸 쥐었다.
“좀 있으면 아기 돼지가 되겠군요.”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벌써 살이 찐 걸까? 하지만 아기를 위해서는 얼마간 쪄야 하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데.’
“나리! 마님.”
이때, 밖에 있던 소월이 배시시 웃으며 뛰어 들어왔다.
“여양과 여한이 왔습니다. 두 사람이 마님께서 회임을 하셨는데 나리께서 상도 안 주신다며 너무 인색하다고 했어요.”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돌아오자마자 잠이 들어 그 일을 깜빡했구나.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그리고 사람들도 전부 불러오거라. 모두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예!”
소월이 대답한 뒤 다시 밖으로 나가자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이미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쇄은碎銀(부스러기 은전) 한 무더기와, 이를 담을 주머니도 준비했습니다. 나리, 상으로 얼마나 주실 생각이세요?”
주운환은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라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여덟 냥으로 하자꾸나!”
뒤에 서 있던 청유와 매화 등은 깜짝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고 청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모두에게 여덟 냥을 주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주운환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엽연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는 귀하고 소중하니까.”
엽연채는 이 말을 듣더니 멍한 표정을 지었고 마음이 시큰거리면서도 달콤한 기분이 들었다.
청유와 매화 등은 기뻐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여덟 냥이라니! 나리는 정말 통이 크시구나!’
다른 집에선 집안에 아이가 생긴대도 많아 봤자 한 달 치 품삯을 주는 게 다였다.
직급이 낮은 어린 여종들이나 어멈들은 한 달 품삯이 몇 백 전錢밖에 안 되기 때문에 상도 몇 백 전에 불과했다. 집안을 관리하는 직급 높은 마마들은 한 달 품삯으로 은화 두 냥을 받기 때문에 상으로 두 냥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주운환은 직급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여덟 냥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한 달 품삯이 적은 이들은 한 번에 일 년 치 품삯을 받는 셈이었다.
그때, 한 어린 여종이 물과 수건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부부는 손을 씻고 입을 헹궜다.
정리가 끝나자 밖에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안 하인들이 전부 자리에 모인 것이다.
주운환은 밖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를 듣더니 아주 기뻐했고 고개를 돌려 엽연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시다.”
그러고는 엽연채의 작은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혜연은 얼른 응접실로 들어가 엽연채의 소매 없는 외투를 꺼내 왔고 주운환은 외투를 건네받아 직접 그녀에게 입혀 줬다. 그런 후에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가 방 앞 계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교 마마는 집사 두 명과 여양, 여한과 함께 가장 앞에 서 있었고 그 뒤에는 소전 등의 호위병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집안의 모든 하인들이 서 있었다.
교 마마와 여한 등이 미소를 지으며 먼저 무릎을 꿇었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마님, 앞으로도 복을 누리시고 3년 안에 자식 둘을 품에 안으시길 기원합니다.”
이 말은 일상적인 덕담에 불과했다. 주운환도 전에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늘은 마치 이 말에 어떤 신기한 힘이라도 담긴 것처럼, 정말로 그리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운환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3년 안에 자식 둘을 품에 안으라……. 좋다! 또 노력하면 그리될 것이다!’
하지만 연년생은 엽연채가 너무 힘들 테니 일단 하나만 낳고 2년 후에 한 명을 더 낳는 게 좋을 성싶었다.
혜연과 추길은 붉은 비단이 깔린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위에는 덩굴무늬를 수놓은 붉은 주머니가 가득했다. 두 사람은 아래로 내려오더니 이 주머니를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교 마마와 여양 등은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손대중을 해 보더니 꽤 무거운 중량이 느껴져 액수를 보기도 전에 아주 기뻐했다.
여양은 기대감에 부푼 채 주머니를 열었는데 안에서 조그만 은병銀餠(둥글납작한 모양의 은괴) 두 개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와, 나리께서는 정말 손이 크시네. 족히 일고여덟 냥은 되겠어! 헤헤헤!”
방금 막 마지막 주머니를 나눠 준 혜연이 돌아서서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리께서 기분이 좋으셔서 모두에게 여덟 냥을 나눠 주셨어요.”
돈을 건네받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어안이 다 벙벙했다.
‘모두에게 여덟 냥을 줬다고?’
그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지 잇달아 주머니를 열었는데, 혜연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많은 하인들이 다른 곳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평생 이렇게 많은 돈을 만져 본 적도 없었다.
하인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주운환과 엽연채를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올리며 덕담을 건넸다.
소전이 헤헤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리, 설마 춘절 때 받을 홍포紅包까지 함께 주신 건 아니겠죠?”
주운환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더니 콧방귀를 뀌며 되물었다.
“그리 생각하느냐?”
여양이 얼른 소전을 노려보며 한 소리 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우리 나리가 그런 분이시겠느냐? 춘절 때 받을 홍포는 당연히 별개이지! 나리, 제 말이 맞죠?”
그는 그리 쏘아붙이고는 기대감에 찬 얼굴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짐짓 그를 노려보는 체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연초에 너만 홍포를 못 받을 게다.”
“아, 안 됩니다! 나리!”
여양은 깜짝 놀라 소리를 치더니 다급히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다.
“다들 제 편 좀 들어주세요. 제가 나선 덕분에 다 같이 상을 받게 됐잖아요. 그런데 저만 아무것도 못 받으면 되나요?”
평해와 소전 그리고 뒤에 있던 사동들이 잇달아 그를 놀렸다.
“나중에 우리가 네게 일 문文씩 주면 되지. 그걸 다 모으면 엇비슷할 거다.”
그러자 정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웃어댔고 분위기는 시끌벅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전이 또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양 형님, 걱정 말고 좀 기다려 보세요. 나리께서 소연小宴을 여실 거 아녜요. 그날 상금을 많이 받으실 거예요.”
“그래, 그 말이 맞다. 하하!”
평해 등은 계속해서 소란을 떨어 댔다. 반면 교 마마는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흥’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만 떠들고 어서 돌아가서 자거라!”
주운환은 하인들이 즐겁게 떠드는 모습과 주위에 흐릿한 등불이 켜져 있는 야경 그리고 새해가 다가오자 저 멀리서 사람들이 잇달아 불꽃을 쏘아 올리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온 세상이 다 따뜻하고 즐겁게만 보였다. 그도 기분이 덩달아 즐거워져서는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소연小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주운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청아한 얼굴이 경직됐고 마음 역시 조금씩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긴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드리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읽은 혜연이 엽연채 곁으로 돌아와 그녀를 살며시 부축했다. 반면, 추길은 속으로 기뻐했다. 소연이란 일반적으로 첩실을 들일 때 여는 작은 연회를 의미했다.
첩실을 들일 땐 중매인을 통해 정식으로 연을 맺지 않았다. 당연히 팔인대교와 혼례식도 없었다. 하지만 사내가 그 첩실을 중요하게 생각할 경우에는 집 안에 상 몇 개를 차려놓고 축하하는 시간을 보내는데, 이를 ‘소연’이라고 불렀다.
주운환은 기쁜 기색이 없는 엽연채를 살피더니 아래에 있는 하인들에게 무덤덤하게 일렀다.
“늦었으니 어서 해산하거라.”
하인들은 썰물처럼 이곳에서 물러났고 그러자 정원은 다시 고요해졌다.
“부인, 피곤합니까? 어서 돌아가서 쉽시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등허리를 거볍게 감싸 부축해 줬다. 엽연채는 몸이 살짝 경직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엽연채가 탑상에 앉자 혜연이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말했다.
“따뜻한 물이 준비됐습니다. 나리, 어서 가서 씻으세요.”
주운환은 여전히 엽연채를 안고 있었고 그녀를 놓고 싶지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같이 가는 게 어떻습니까?”
가벼운 웃음소리에 엽연채는 그를 쏘아봤다. 그러자 주운환은 문득 그녀는 회임을 했으니 물 온도 같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가겠습니다.”
주운환은 몸을 일으켜 그곳을 떠났고 엽연채는 탑상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교 마마가 왔습니다.”
밖에 있던 소월이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엽연채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보니 안팎을 구분해 주는 주렴이 살짝 흔들리더니 교 마마가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엽연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옵니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식사 준비로 바빴을 텐데, 어서 가서 쉬지 않고?”
“그게… 마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교 마마는 그리 말하며 옆에 있는 청유와 매화 등을 쳐다봤다.
“너희는 이만 나가보거라.”
그 눈짓을 본 엽연채가 사람을 물리자 청유와 매화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 안에는 엽연채와 혜연, 교 마마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