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4화
세 사람은 함께 정자 밖으로 나왔다. 눈치 빠르고 엽연채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여종들이 이미 등롱을 들고 그 앞으로 나와 있었다. 둘 중 한 사람은 앞에서 걷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길을 밝혔다.
이때, 하늘에서 가랑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혜연은 깜짝 놀라 여종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이런. 어서 가서 우산을 가져오거라.”
“괜찮다.”
그러나 엽연채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얼어 죽을 정도도 아니고 몇 걸음만 가면 도착하는데 뭘 그리 호들갑을 떠니.”
“그래도…….”
엽연채는 성큼성큼 처소로 향했다. 이곳은 확실히 운연거에서 가까운 곳이라 잠깐 걷고 나니 일행은 운연거에 도착했다.
엽연채와 여종들이 운연거로 들어가자 안은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고개를 들어 보니 주운환이 입구에 서 있었다.
목깃에 검은색 털이 달린, 파란색 소매 없는 외투를 입은 그는 엽연채를 보더니 그 산뜻하고 미려한 얼굴로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오자 엽연채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 앞에 선 주운환은 질책하는 투로 말했다.
“눈이 내리지 않습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산도 안 쓴 겁니까?”
주운환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에 묻은 눈송이 두 개를 보고 너무도 안쓰러운 마음에 바로 손을 뻗어 눈송이를 털어 냈다.
“이게 있잖아요!”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손가락으로 자기 등 뒤를 가리켰다. 그녀는 여우 털로 만든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는데 과연 뒤쪽에 모자가 달려 있었다.
그러자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더욱 화가 났다. 그는 얼른 그 모자를 들어 올려 그녀의 머리 위에 덮고는 이렇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안 썼습니까?”
엽연채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입만 삐죽거렸다.
“너희는 뭐 하는 것들이냐?”
주운환은 서슬 푸른 모습으로 혜연과 추길을 쏘아봤다. 그의 싸늘한 눈빛에 추길은 가슴이 찌릿했고 혜연은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까 엽연채에게 우산을 쓰라고 했지만, 엽연채가 거추장스럽다고 거부한 것을 어쩌겠는가.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갑시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끌어당기려고 했는데 문득 그녀를 보니 기분이 조금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예 그녀를 안아 들고는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남편이 안아 줘야 하는 겁니까? 맞지요?”
엽연채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쳤으나 몸의 균형을 잃는 바람에 급히 그의 목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주운환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그가 도무지 도와주지를 않았다.
‘이렇게 또 덥석 안아 버리다니!’
“갑시다.”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하얗게 빛나는 엽연채의 자그마한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하게 변했고 조그만 입을 살짝 뽀로통히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녀는 깃털 같은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고 있는데, 이런 모습도 아주 사랑스러웠다.
주운환은 이 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부인을 안고 방으로 걸어갔다.
방금 전 밖에 눈이 내린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옷을 걸치고 그녀를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우산도 쓰지 않고 등 뒤에 달린 모자도 쓰지 않은 상태로 입구로 걸어 들어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운환은 가냘픈 아내가 눈을 맞으며 돌아온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안고 방으로 걸어갔고, 걸어가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속삭였다.
부부의 뒤를 쫓아가는 추길은 표정이 있는 대로 딱딱해져 있었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고 메스꺼운 느낌마저 들었다.
눈이 내리자마자 혜연이 엽연채에게 우산을 쓰라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는 기어코 쓰지 않겠다고 했고 모자를 쓰라는 것도 거절했다. 분명 주운환의 앞에서 가련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함이리라.
사실 가련할 것도 없었다.
‘그저 가랑눈이 내린 것뿐이고 잠깐 걷는 사이 머리에 눈송이 몇 개 묻은 건데, 안기까지하다니. 엽연채는 뭐 다리가 없단 말인가?’
추길은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란했다. 이미 계단에 올라선 부부의 다정한 모습은 추길에게는 그저 눈꼴사나울 뿐이었다. 추길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나리의 품에 안겨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한편, 화장火墻(난방을 위해 벽 속에 화도火道를 설치한 벽)을 설치해 뒀기에 방 안으로 들어서니 훈훈한 공기가 가득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탑상 위에 내려놓은 후 그녀의 외투를 벗겨 한쪽에 놓인 병풍 위에 걸쳐 놓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배자도 벗기려고 했다. 엽연채는 얼른 자신의 옷깃을 붙잡은 손을 막으며 맑고 아름다운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안은 하나도 안 젖었으니 갈아입을 필요 없어요. 이건 원래 집에서 입는 옷이잖아요.”
주운환은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확 안아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 상태로 그녀를 끌어안은 채 손을 풀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부인을 안고 싶은 것뿐입니다.”
주운환은 오랫동안 굶었고 부부가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으니 신혼 때보다 감정이 더욱 세차게 끓어올랐다. 그는 한시라도 그녀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어째서인지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 같아 주운환은 쓸쓸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이때, 교 마마가 아홉 가지 반찬을 넣을 수 있는 커다란 찬합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혜연은 얼른 밖으로 나갔고, 추길도 엽연채와 주운환이 찰싹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얼른 그녀를 따라 소청으로 걸어갔다.
혜연은 찬합 뚜껑을 열고 추길과 함께 안에 든 요리를 하나하나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 식사해요.”
엽연채는 음식 냄새를 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럽시다.”
주운환도 허기가 져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부는 작은 반청飯廳으로 걸어가 녹나무 원탁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는데, 총 열 가지 요리와 탕 한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주운환은 요리를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이렇게 많이 준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엽연채를 쳐다보자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나리께서 타지에서 동분서주하시다가 겨우 집으로 돌아오셨으니 당연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몸보신을 해 드려야죠.”
추길은 그가 엽연채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모든 걸 엽연채가 준비했다고 오해하는 거 같은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자신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주운환이 돌아온다고 했는데도 엽연채는 그저 여느 때처럼 교 마마를 시켜 음식을 준비할 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음을 말이다.
게다가 이 탁자에 차려진 음식은 전부 자신이 주방에 가서 하나하나 살펴본 다음 주운환의 입맛에 맞게 바꾼 것들이었다.
추길은 복령갑어탕을 주운환 앞으로 밀더니 웃는 얼굴로 권했다.
“이 갑어탕이 몸보신에 가장 좋습니다. 제가 특별히 가시연밥도 많이 넣으라고 했습니다.”
엽연채는 냄새를 맡으니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지만, 꾹 참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운환에게 맛보기를 권했다.
“부군, 많이 드세요.”
이 탕은 확실히 사내들에게 좋아 주운환도 평소에 좋아했다.
주운환이 출세하기 전에는 엽연채가 날마다 경인에게 진귀루에 가서 밥을 사 오라고 했으니 주운환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그 후 진서후부로 나와 살게 되면서 엽연채는 주운환이 좋아하는 음식을 교 마마에게 알려 줬고, 교 마마도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 부부의 입맛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러나 회임을 하면서 엽연채는 입맛에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오늘 저녁 식사에 나올 요리를 직접 고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교 마마에게 맡기면 가장 적당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염장판압도 나리께서 좋아하시는 거예요.”
추길이 말했다. 그녀도 주운환이 좋아하는 음식을 조용히 기억해 두고 있었다.
“제가 사차장沙茶醬(말린 새우, 생강, 땅콩에 고추를 넣어 풀처럼 이긴 조미료)을 많이 넣으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오늘 신경을 많이 썼음을 넌지시 알리는 것이었다. 여기까지 말한 추길은 엽연채를 힐끗 쳐다봤다. 엽연채가 자신더러 주운환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쓴다고 말할까 봐 걱정이 되어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물론 나리의 입맛만 신경 쓴 게 아니에요. 여기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관인야계罐儿野鷄, 청증강요주노어清蒸江瑤柱鱸魚, 산채회아酸菜燴鵝, 청수육사백채淸水肉絲白菜도 있습니다.”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더니 채를 썬 배추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밥그릇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주운환에게 말했다.
“부군, 어서 식사하죠.”
“그럽시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옆에 있는 교 마마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늘 저녁 식사는 그녀에게 맡겨졌는데 그녀는 당연히 주운환의 입맛을 알고 있었고 요즘 엽연채의 입맛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본래 준비했던 식단은 두 사람의 입맛에 맞춘 것들이었는데, 다만 일부러 조금 싱겁게 만들었다. 간을 약하게 하기는 했어도 고기 요리와 야채 요리가 적당히 섞여 있으니 너무 담백하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추길이 들어오더니 싱겁게 만들었던 고기 요리 몇 가지를 간이 세게 바꾸었고 전부 주운환의 입맛에 맞게 만들었다. 꿩고기와 배추는 엽연채도 먹기는 했지만, 이 갑어탕의 간이 너무 센 탓에 엽연채는 식욕이 사라진 눈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주운환은 모든 요리를 먹었지만 엽연채는 청수백채淸水白菜 한 접시만 싹 비웠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부인, 왜 이리 적게 먹는 겁니까?”
엽연채는 배를 만지며 이렇게만 말했다.
“배불러요.”
“이것 하나만 먹어서 되겠습니까?”
주운환은 생선살을 집어 그녀에게 건넸다.
“좀 먹어 보지요.”
그러자 엽연채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헛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부인, 왜 그럽니까?”
주운환은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돌려 추길과 혜연을 쳐다봤다.
“음식을 어떻게 준비한 것이냐?”
“원래 제가 요리를 정해 놓았는데 추길이가 오더니 식단을 바꿨습니다.”
교 마마가 재빨리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