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3화
길을 걷던 여종들이 추길을 보고 잇달아 인사를 건넸다.
“추길 언니!”
“언니! 기분이 되게 좋아 보이네요. 어디 가는 거예요?”
추길은 마음이 급해 등롱을 들고 있는 두 여종에게 대충 대꾸했다.
“글쎄?”
그러자 그중 작고 마른 한 여종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물었다.
“아, 알겠어요! 나리께서 돌아오셨고 마님도 기쁘실 테니 분명 언니들에게 적잖은 은자를 주셨겠죠!”
그녀는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희들도 빼놓지 않고 주실 거야.”
말을 마친 추길은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 주방에 도착했다.
엄동설한이라 방을 빼고는 곳곳이 싸늘했는데 주방만은 항상 후끈후끈한 열기가 가득했다. 불을 피우면서 생기는 열기, 야채를 볶으면서 생기는 연기 그리고 음식을 삶으면서 생기는 증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계절 상관없이 옷을 아주 얇게 입고 있었다.
추길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방 어멈 몇 명이 보였는데, 한 사람은 물을 끓이고 또 한 사람은 만두를 빚고 또 한 사람은 다른 요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추길을 보더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머, 추길이가 왔구나.”
추길도 그녀들에게 미소로 화답하고는 이리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예요?”
주방을 관리하는 교 마마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고, 그녀 밑에서 일하는 방씨 성의 주방 어멈은 생선을 잡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이미 준비되어 있단다. 관인야계罐儿野鷄, 청반압사清拌鴨絲, 청증강요주노어清蒸江瑤柱鱸魚, 연채사희환자탕燕菜四喜丸子湯…….”
사실 추길은 별 뜻 없이 물어본 것이었다. 그저 주방에 가서 자신이 일을 했다는 티를 내고 싶었을 뿐이니까. 그런데 요리의 이름을 듣더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리는 압사鴨絲는 안 좋아하세요. 염장판압鹽醬板鴨으로 바꾸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연채사희환자탕은 없어도 되니 복령갑어탕茯笭甲魚湯으로 바꾸시죠.”
방씨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다! 나리께서 오랫동안 고생하셨으니 오늘 제대로 몸보신을 하셔야겠지.”
추길은 요리들을 훑어보며 방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말이 잘 통했다.
그런데 이때, 옆에 있던 교 마마가 쾅 소리를 내며 커다란 반죽 덩어리를 탁자 위에 던지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추길아, 마님께서 네게 이곳에 와서 식단을 보라고 하셨니?”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방에 계시기 답답하셨는지 혜연이와 함께 밖에서 산보를 하고 계세요.”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혜연은 엽연채와 함께 산책을 나갔는데 같이 엽연채를 곁에서 모시는 자신은 따라가지 않았다고 했다. 마치 자신이 엽연채에게 이곳에 와서 식단을 살피라는 분부를 받은 것처럼 의미가 전달되라고 일부러 그리 답한 것이었다.
“참, 물은 준비됐나요?”
추길은 물만 끓이는 데 사용되는 칸막이 공간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편에서 바로 한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됐다, 다 됐어. 추길아, 어서 와서 들고 가렴.”
추길은 미소를 짓더니 물을 가지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교 마마가 밀가루가 묻은 손을 한쪽에 놓인 대야에 넣고 씻더니 이리 말했다.
“내가 도와주마.”
“교 마마…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추길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제가 들어도 돼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호통을 치며 물렸을 것이다. 하지만 교 마마는 주운환의 유모였고, 주운환에게 후야의 작위와 진서후부가 하사된 후 특별히 이곳으로 불려온 사람이었다.
엽연채 또한 주방 전체를 그녀에게 관리하라고 맡길 정도로 그녀를 아주 신임했다. 그러니 추길도 교 마마의 체면을 어느 정도는 살려 줘야 했다.
“넌 마님을 곁에서 모시는 아이인데, 어찌 물 주전자를 들라고 할 수 있겠니!”
교 마마는 허허허 웃고는 은근히 뼈 있는 말을 던졌다.
“전에는 막일을 하는 여종들이 와서 물을 길어 갔는데, 오늘은 어째 네가 직접 왔구나.”
추길의 조그만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화가 나서 부뚜막 위에 놓인 그릇 닦는 천을 교 마마의 얼굴로 집어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확실히 물을 긷는 등의 고된 일은 전부 추길 밑에 있는 막일을 하는 여종들이 해 왔다. 이들이 물을 길어 돌아오면 추길 등의 신변 여종들이 수방水房에 가서 대야 등을 챙긴 후 방 안으로 들고 갔다.
추길처럼 상전을 바로 곁에서 모시는 여종들은 주방에 들어가는 것도 지저분하다고 싫어했다. 그런데 오늘만은 다른 속셈이 있기에 추길이 남의 손을 빌리지 싶지 않아 이렇게 직접 온 것이었다.
제 발 저린 추길이 짜증을 억누르는 동안, 교 마마는 이미 물을 끓이는 그 칸막이 공간으로 들어갔고 이내 커다란 검은 철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주전자의 주둥이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가자. 물을 가져다주마.”
추길은 속으로 조금 찔렸지만 또 생각해 보니 별것 아니다 싶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함께 주방을 나선 두 사람은 반짝이는 호숫가를 지나 잠시 후 운연거 문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막일을 하는 여종 하나가 문으로 나오다가 두 사람이 물 주전자를 들고 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리께서 깨어나셨어요. 마침 제가 가서 물을 달라고 재촉하려는 참이었어요.”
추길이 기뻐하며 물 주전자를 건네받으려고 했는데 교 마마는 이미 문을 넘어선 후였다.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으나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쫓아 안으로 들어갔다. 교 마마는 물 주전자를 들고 수방으로 들어가더니 직접 물을 갈기까지 했다.
추길은 괜히 하하 소리 내 웃으며 얼른 온수를 담은 놋쇠 대야를 들었고, 교 마마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이렇게 운을 뗐다.
“나리를 뵌 지 오래됐구먼.”
교 마마 같은 어멈들은 일반적으로 상전의 방 안으로 들어가 시중들지 않았다. 특히 교 마마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이라 온몸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데 어떻게 방 안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교 마마는 보통의 하인들과는 처지가 좀 달랐다. 추길은 표정이 경직됐지만 차마 그녀를 내쫓지는 못하고 그저 같이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운환은 침상 위에 앉아 있었는데, 잠에서 막 깬 얼굴이었다. 원래도 화려하고 준수한 얼굴인데 졸음기가 남아 있으니 나른함 속에서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추길은 그 모습을 훔쳐보며 마음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검가자 위에 대야를 올려놓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나리, 일어나셨어요?”
“부인은?”
주운환은 품 안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자 완전히 잠에서 깨어났다.
“마님은 산보를 하신다며 나가셨고, 저보고 나리께서 씻을 수 있도록 시중을 들라고 하셨습니다.”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보니 교 마마가 침실과 소청 사이에 서 있었다. 저리 체격 좋은 사람이 서 있으니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나리.”
교 마마가 안으로 들어오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을 붙였다.
“왜 이리 마르셨어요?”
“교 마마.”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되물었다.
“교 마마는 왜 이렇게 살이 쪘어요?”
“잘 먹어서 그렇죠.”
교 마마는 그리 대꾸하며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운환은 손수건을 건네받아 물에 담갔다가 얼굴을 닦고는 대야에 손수건을 던졌다. 어찌나 휙 던졌는지 추길의 몸 절반에 물이 튀겼다.
추길은 이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빴는데, 여기에 교 마마가 눈치코치 없이 방 안에 계속 머무르고 있으니 화가 나 얼굴이 새파래질 지경이었다.
추길이 성질을 참느라 갖은 애를 쓰는 동안, 교 마마는 여전히 떡하니 자리 잡고 서서 주운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밖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평소에는 뭘 먹었는지, 어디서 지냈는지 등의 질문에 주운환은 진득하게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한쪽에 서 있던 추길은 혼자 소외된 느낌이 뻘쭘해 미소를 지으며 교 마마에게 물었다.
“교 마마, 날이 어두워지려고 해요. 마마는 이만 주방으로 돌아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나리께서 마마가 직접 만든 요리를 먹으려고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어서 가 봐요.”
“예, 예.”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가 보라고 하자 교 마마는 주방 일을 마무리하려고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추길은 교 마마가 밖으로 나가고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지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각을 하더니 돌아서서 옷장을 열었다.
“나리…….”
“넌 아직도 여기서 뭐 하는 게냐?”
주운환의 말에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나리께서 입으실 옷을 찾고 있습니다.”
“됐으니 나가 보거라!”
주운환은 위엄이 느껴지는 냉랭한 목소리로 그녀를 내쫓았다.
“밖에 나가 부인이 언제 돌아오는지나 보거라.”
주운환이 입을 열자마자 엽연채 이야기를 하자 추길은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따르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 대문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그녀는 가슴속에 원망이 가득했다.
‘이게 다 그 늙다리 교 마마가 방해했기 때문이야.’
이어 주운환이 엽연채를 찾으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질투심이 치솟았고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런 마음으로 추길은 문밖으로 나가 정처 없이 후부 안을 돌아다녔다. 이각쯤 돌아다니자, 저 멀리 호수 위에 지어진 정자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는 엽연채와 혜연의 모습이 보였다.
추길은 마음이 쓰려서 뒤에 있는 버드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지금 도저히 엽연채를 부를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를 불러 처소로 돌아가게 하면, 또 주운환과 그렇고 그런 짓을 할 텐데 그럼 자신은 속에서 구역질이 날 것 아닌가.
하지만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잠시 후, 추길은 어쩔 수 없이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마님, 여기에 계셨군요!”
엽연채는 긴 나무 걸상에 앉아서 손에 든 물고기 먹이를 무심하게 호수 위로 뿌리고 있었고 물고기들은 서로 먹겠다고 달려들었다.
“여긴 왜 왔어?”
“그게…….”
혜연의 말에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주운환이 엽연채를 찾으라고 해서 왔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주운환이 엽연채를 몹시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추길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둘러댔다.
“마님, 여기는 추우니 바람은 그만 쐬시고 얼른 돌아가시죠. 저녁 식사도 다 준비되었을 겁니다.”
엽연채는 멍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살짝 들었다.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어슴푸레한 빛만 남아 있었다. 집 안 곳곳에 등롱이 걸렸고 원등院燈에도 불이 켜진 후였다.
“마님, 겨울에는 날이 금방 어두워지니 어서 돌아가시죠.”
혜연이 말했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혜연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