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1화
이 정씨 가문 넷째 공자는 원래부터 좀 오만방자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무턱대고 사람들에게 밉보이는 짓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태자는 곧 보위에 오르려 했다. 추대하는 조정 신하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군주를 곁에서 보좌할 주운환 같은 권신도 생겼으니, 그는 인제 장찬 같은 사람은 전혀 눈에 차지 않았다. 이에 정씨 가문 사공자도 장씨 가문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모욕하고 싶으면 모욕하면 그만이었다.
장찬은 정씨 가문이 이렇게 사람을 깔봤다는 이야기에 화가 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고 조정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에 나가지 않으면 그가 태자의 외족外族에게 화가 났음을 보이는 것으로, 이는 곧 태자에게 불만을 비치는 행동이었다. 즉,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장찬은 들끓는 분노에 가슴팍을 움켜잡고 소리를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어째서 양왕은 이 파렴치한 태자 놈을 해치워 버리지 못하는 거야!’
여하간 이 일로 인해 장만만의 평판은 더 나빠졌다.
맹씨는 극도로 분노해 방 안에서 죽어라 울어 대는 데 반해 장만만은 언제든 출가해 비구니가 될 수 있다는 초탈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결국 장만만의 혼사는 정해졌다. 그녀가 정혼한 사람은 장국후부의 세자였고 그녀는 그의 후처로 들어갔다.
장국후부로 말할 것 같으면 영안후부만도 못한 집안으로 현재 가주인 장국후庄國侯는 어중간한 4품 원외랑員外郞에 불과했다. 연말연시에 선물을 주고받을 때 보면 겉만 번드레하고 실속은 없는 가문이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맹씨는 몹시 불만족스러웠지만 장만만의 혼사를 더는 늦출 수 없었다. 명절을 쇠고 나면 장만만은 스무 살이 되는데 얼굴도 별로이고 평판도 안 좋으니 이 혼사를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안 차도 절름발이인 엽균보다는 훨씬 낫지.’
* * *
명절을 쇠기 사흘 전인 섣달 스무여드레, 주운환은 마침내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날 도성의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적염전갑을 입은 소년 장군이 준마를 타고 군대를 이끌며 대제에 수년 동안 해를 입힌 비적 떼를 포송해 도성으로 들어왔다.
백성들은 잇달아 양쪽으로 에워싸며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 주 장군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야. 밖으로는 서노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비적 떼를 토벌하셨어. 누구도 못 해낸 일을 장군님은 전부 해내셨다고.”
“정말 우리 대제의 영웅이자 수호신으로 손색이 없다니까!”
백성들은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고 가게 위층의 낭자들은 아래로 비단 손수건을 던지며 소년 후야에게 얼굴을 붉혔다.
주운환은 고개를 들어 주루와 요릿집의 2층을 살펴봤지만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속으로 조금 실망했다. 그리고 걱정이 돼 말채찍을 내리쳐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주운환은 빠르게 궁으로 들어갔고, 그 비적 떼와 마 지부 등을 형부로 보내 가둬 놓았다.
전에 여 비장은 마 지부가 주운환을 살해하려고 했음을 자백했고 또 마 지부가 도성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어 이 일은 애들 장난과는 다르다고도 이야기했다.
비적 떼와 마 지부 등을 형부로 보낸 후 조정은 정식으로 봉인封印(연말에 관인官印을 봉함)했다. 여느 때처럼 보름간 쉬고 개인開印(봉했던 관인을 풀고 다시 업무를 시작함)하니 신하들은 그때 조정에 나가 다시 정사를 논할 것이었다.
대전을 떠난 주운환은 정선제를 뵈러 황제의 궁침으로 갔다.
정 황후는 여전히 한쪽에서 정선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적염전갑을 입은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서면서 차르랑차르랑하는 쇳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린 정 황후는 주운환이 입은 화려한 갑옷을 보더니 몸이 살짝 경직됐다.
이 갑옷은 바로 소 황후의 것이었다. 정 황후는 이 적염전갑을 입고 질주하던, 눈부시게 아름답던 한 여인을 평생토록 잊을 수가 없었다.
하나 그녀는 얼른 정신을 차리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서후가 돌아왔군.”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주운환은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는…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정 황후는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대답했다.
“좋아지셨네. 진서후가 비적 떼를 소탕한 걸 보신다면 폐하께서도 안심하실 수 있을 텐데.”
주운환은 옅은 한숨을 쉬었고 몇 가지 질문을 더 하고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궁을 나온 그는 곧장 진서후부로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대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주운환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하인들은 얼른 그를 맞이하러 나갔다.
“나리,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말에서 내렸고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을 그들에게 던졌다. 그러자 하인들은 서로 받으려고 했고 또 약속이나 한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주운환은 이들이 자신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한 것을 축하한다고 생각해 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곤 꼿꼿한 자세로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는 문을 지나 또 다른 문으로 들어섰는데, 지나가던 여종들은 모두 잇달아 그에게 예를 올렸다. 하지만 하나같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짓는 모습을 보니, 주운환은 그 모습이 영 신경에 거슬렸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말했다.
“그래.”
주운환이 반월공문을 넘어서자 또 한 무리의 여종들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주운환은 이번엔 아무 말 없이 걸음만 재촉했다.
잠시 후, 운연거에 도착하니 추길과 매화를 비롯한 여종들이 이미 해당화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추길은 문안으로 들어서는 주운환을 보더니 흥분하여 얼른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나리께서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인은 안에 있느냐?”
“예.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마님께서…….”
그녀가 미소 띤 채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청유가 한발 앞서 제지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당연히 엽연채가 직접 알려 부부가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했다.
추길은 입을 살짝 오므리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청유와 소월, 백수 등은 서로 눈을 맞추더니 이어 단정한 자세로 예를 올렸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그러고는 하하호호 웃음을 터뜨렸다.
주운환은 어리둥절했다. 비적 떼를 토벌한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단 말인가? 지난번에 자신이 후야에 봉해졌을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하지는 않았고 또 이렇게 신경에 거슬리게 웃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데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마음이 급한 주운환은 서둘러 정원을 통과했다.
그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왔다. 응접실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는 침실로 걸어갔고, 발보상 위에 진홍색 비단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인형이 보였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니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또 그녀가 낮잠을 자고 있는 게 조금은 아쉬워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상 옆에 앉아 살펴보니 엽연채는 이불을 코 아랫부분까지 덮고 있어 하얗게 빛나는 얼굴이 절반만 드러나 있었다. 두 눈은 꼭 감고 있었고 깃털 같은 기다란 속눈썹은 아래 눈꺼풀 위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도 귀여워 보였다.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구부려 코로 그녀의 작은 얼굴을 비비적댔다. 그러고는 꼭 감고 있는 그녀의 두 눈에 입을 맞췄다.
주운환의 숨결이 느껴지자 엽연채는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는 그가 들어온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상으로 숨어서 자는 척을 한 것이다. 지금도 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알지 못했고, 또 그가 앞으로 다른 여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살갑게 굴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쓰렸다.
그래서 엽연채는 눈을 감고 계속 자는 척을 했다.
주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적염전갑을 벗었다. 그러고는 다시 침상 위에 앉더니 몸을 살짝 굽혀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손으론 그녀의 배를 만졌다. 그러자 엽연채는 깜짝 놀라 얼른 두 눈을 뜨더니 그를 밀쳐 냈다.
주운환은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밀쳐 내자 어리둥절, 자신 때문에 그녀가 잠에서 깼다고만 생각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그녀는 조그만 얼굴을 전부 드러내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부인?”
주운환은 침상에 앉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돌아왔습니다.”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굴렸다. 그와 마주 보지만 마주 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네.”
주운환은 당황스러웠다. 예전의 엽연채는 자신에게 찰싹 들러붙곤 했으니 말이다.
퇴청할 때마다 엽연채는 창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가 뛸 듯이 기뻐하며 달려와 자신의 팔을 끌어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할 일 없이 한가할 때도 ‘부군’ 하고 부르며 내내 붙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싸늘한 태도를 보였다. 주운환은 너무 걱정이 되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물었다.
“악몽이라도 꾼 겁니까?”
그의 손길이 닿자 엽연채는 몸을 한 차례 떨었다. 콧날이 시큰거렸고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비비적거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알을 굴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한테… 생겼어요…….”
그녀는 운을 떼면서도 입을 삐죽거렸다. 마음이 혼란스러웠고 그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나중에 아이를 데리고 떠날 건데, 그가 아이를 빼앗아 가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됐으니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뭐가 생겼다는 겁니까?”
한편, 주운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시선을 아래로 하더니 또 저도 모르게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손을 배 위에 살며시 올려놓고 말했다.
“그, 아기요…….”
주운환은 머리가 얼떨떨했다. 문득 걸어오는 길에 사람들이 전부 자신에게 ‘감축드리옵니다!’ 하고 인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기가 생겼다는 말인가? 부인이 우리 아이를 가졌다는 말인가?’
주운환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우리 아이 말입니까?”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와! 하하!”
주운환은 흥분해서 엽연채를 확 끌어안았다. 그녀의 작고 가녀린 몸을 자신의 품으로 꽉 끌어안았다.
“부인! 부인! 세상에. 하하하. 우리에게 아이가 생기다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엽연채는 그의 넘치는 희열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그의 감정에 전염된 것처럼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이내 또다시 마음이 쓰라려 왔다. 지금 그녀의 가슴속엔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부군… 아이가 눌리잖아요.”
엽연채는 그를 쏘아봤고 몸을 옆으로 기울이더니 다시 침상에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