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9화
“알겠다. 없던 일로 하겠다. 됐느냐!”
장찬은 옷소매를 홱 뿌리치며 호통을 쳤다.
“어차피 이젠 네가 시집보내고 싶어 해도 그쪽에서 원치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난 만만이의 혼사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모인 저희들이 직접 혼사를 주관하겠습니다. 원래 저희가 도맡었어야 했던 거니까요.”
맹씨는 낯빛은 새파랬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찬은 화가 나서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고, 장만만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맹씨를 노려봤다.
“할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께서 역정이 나서 가 버리셨잖아요.”
“이 계집애가!”
맹씨는 화가 나 명치가 아팠다.
“내가 오늘 여기서 체면 불고하고 큰 소리로 소란을 피운 게 다 누구 때문이냐? 다 너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내게 성질을 부리는 게냐! 너는 그럼 네 할아버지 뜻에 따라 엽균 그 무능한 놈에게 시집가기를 원한다는 말이냐?”
장만만은 울면서 목청을 높였다.
“누구에게 시집을 가든 상관없어요! 엽균에게 시집가서 안 좋을 게 뭐가 있어요? 비록 엽균이 지금 작위도 없다지만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대꾸에 맹씨는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이, 이, 이놈의 계집애가……! 그런 무능한 놈에게 시집가기를 바랐던 것이냐! 이렇게 변변치 않다니.”
“화는 왜 내세요? 어차피 어머니 때문에 다 어그러졌잖아요.”
장만만은 이렇게 톡 쏘고는 울면서 나가 버렸다.
* * *
장만만의 일 때문에 정말이지 화가 나 쓰러질 것만 같았던 온씨는 이튿날 이른 아침, 진서후부에 갔다.
추길이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단풍잎 문양이 들어간 손난로를 들고 낭하를 지나다가 온씨가 들어오는 모습을 가장 먼저 보았다. 그녀는 기뻐하며 얼른 온씨를 맞이하러 갔다.
“마님, 오셨군요.”
“그래. 너희 마님은 뭘 하고 계시냐?”
“방에서 화본을 보고 계십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지나갔다.
“그 애는 어떻게 아직도 화본을 보고 있니. 이제 세밑이 가까워져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말이다. 너희 가문은 지금 한창 바쁠 때고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등 할 일이 태산일 텐데, 아무리 임신을 했대도 전부 손을 떼고 있어서는 안 되지. 참, 연채의 시어머니는 오셨었니?”
지금 엽연채가 회임을 했으니 진씨는 아무리 며느리가 밉다고 해도 시어머니인 시늉은 해야 했다. 다른 건 고사하고 진서후부에서 처리해야 하는 사소한 일 정도는 도와줘야만 했다.
그러나 추길은 냉소를 지어 보일 따름이었다.
“기대도 하지 마셔요. 마님의 시어머님은 지금 자기 친딸 일로 정신이 없는데 어디 저희 마님을 신경 쓸 틈이 있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온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너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태자부 전체를 주 측비가 관리하고 있다지.”
주묘서는 지금 태자부 살림을 관장하고 있는데, 그녀는 이제 막 태자부에 들어왔고 나이도 어리며 경험도 적어서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씨는 아예 태자부에서 지내며 수시로 그녀를 돕고 있었다.
“임신한 며느리는 내팽개치고 시집간 딸의 집에 가서 지내고 계시죠. 편애가 한도 끝도 없다니까요. 그런데 솔직히 저희는 오히려 자유로워서 좋습니다. 안 그러면 여기서 이래라저래라 하셨을 텐데 그럼 얼마나 성가셨겠어요.
맞다, 지금 마님의 시어머님도 딸네 집에서 지내시니 마님도 여기서 지내세요! 어디 이걸로 감히 트집을 잡을 수 있나 한번 보시죠!”
추길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온씨의 팔짱을 꼈다.
“요 녀석!”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톡 쳤고 추길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온씨가 이곳에 오자 그녀는 내심 옅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엽연채가 명절을 쇤 후 노주를 데려오겠다고 했지만 그녀를 첩실로 들이겠다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추길은 엽연채가 속으로 아직도 이 일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해 안절부절못했다.
만약 주운환이 돌아왔는데 엽연채가 여전히 그를 독차지하고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신은 어찌한단 말인가?
온씨가 이곳에서 지낸다면 분명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며 자신을 첩실로 들이라고 엽연채를 타이를 것이다. 그럼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테고 다들 편안한 마음으로 명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계단을 올랐고, 그 말소리를 들은 혜연이 걸어 나왔다.
“어머, 마님께서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래.”
온씨는 두 여종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세련되게 꾸며진 내실은 따뜻한 온기가 가득했다. 엽연채는 작약 문양이 들어간 우직羽織(새의 깃으로 짠 직물)으로 만든 진홍색 이불을 덮은 채 탑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화본을 손에 쥐고선 하품을 했다.
온씨는 딸의 그 나른한 모습을 보니 기가 막히면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얼른 엽연채에게 걸어가 하얀 볼을 살짝 꼬집었다.
“요, 요 게으름 피우는 거 봐라. 회임을 했다고 꼼짝도 안 하려는 게냐? 너무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 아니니!”
“어머니.”
엽연채는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온씨를 잡아당겨 자리에 앉히고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명절 준비로 바쁘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또 오셨네요.”
“네게 할 말이 있단다.”
온씨는 장만만의 일을 이야기해 줬다.
“어유, 아직도 속에서 열불이 치미는구나! 난 원래부터 응할 생각이 없었는데, 마치 우리가 자기 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듯이 그 여인이 들이닥치더구나. 네 오라버니가 변변치 않기는 하나 장만만은 평판이 좋더냐? 둘 다 도토리 키 재기지! 흥!”
“그런 일이 있었어요?”
엽연채는 깜짝 놀라더니 자기 가슴을 툭툭 치고는 웃으며 말했다.
“다행히도 장 부인이 와서 소란을 피워서 저희가 거절할 필요는 없게 됐네요. 안 그랬다면 만만 언니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야 했을 텐데 말이죠.”
“맞아요. 장씨 가문 대소저는 좋은 분이니까요. 덕분에 저희는 수고를 덜게 됐어요.”
혜연이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리 말을 보태며 청화 찻잔 두 개를 항탁 위에 올려놓았다.
“저희야말로 장씨 가문과 겹사돈을 맺고 싶지 않죠. 엽이채야 저희 마님의 사촌 여동생이니 상대하지 않으면 되고, 또 솔직히 친척 관계를 끊어 버린다고 해도 뭐 어떻겠습니까. 하나 장만만 소저가 큰도련님께 시집을 오면 또 골치 아픈 친척이 하나 더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쪽은 떼어 내려고 해도 떼어 낼 수 없을 거고요.”
온씨는 혜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다. 그 댁 어르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건지 모르겠구나.”
엽연채는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살짝 깜빡였다. 그녀는 온씨와는 생각이 달랐다. 장찬은 책략이 뛰어나고 손녀를 아끼는 할아버지였다.
지금 엽씨 가문이 비록 관직과 작위를 박탈당해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안은 깨끗하고 묘씨와 나씨 모두 함께 살기에 좋은 사람들이었다.
유일하게 말썽을 피우는 게 엽승신과 손씨 부부인데, 그들의 여식은 장씨 가문 며느리 아닌가.
장만만이 정말로 엽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면 그녀는 장손며느리가 되고, 엽이채는 장씨 가문이 주무르고 있으니 엽승신 부부는 감히 소란을 부리기는커녕 장만만에게 잘 보이려 애쓸 것이었다.
장찬은 이해득실을 따져 가며 손녀를 위해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던 건데, 안타깝게도 맹씨가 이 좋은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 이 이야기를 하러 오신 거세요?”
엽연채가 말했다.
“아니다. 그런데 네 오라버니 혼사 문제 이야기를 하고 싶기는 하구나. 균이의 혼사도 이제는 정해야지.”
온씨는 그리 말하며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추켜올렸다.
“얘. 영안후부의 대소저는 어떠니?”
“원남옥이요?”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그 애를 생각하신 거예요?”
“그저께 보지 않았니.”
온씨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 장 부인과 매파 고씨가 가고 나서 화씨라는 매파가 또 왔었는데 영안후부 대소저를 이야기하더구나.”
“네?”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원남옥이 자발적으로 혼담을 꺼냈다는 말인가?
‘어쩐지 그날 자기 어머니까지 데리고 이곳에 왔다 했는데, 실은 엽균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나 보네.’
“괜찮은 아이더냐?”
온씨의 말에서 다소 초조한 기색이 느껴졌다.
“나쁠 건 없죠.”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원남옥은 설옥인이었을 때는 신분 때문에 늘 주눅이 들어 있었고 자주 눈물을 보였지만, 원남옥이 되자 성격이 시원시원하게 변했다. 몇 번 함께 있어 보니 나쁜 점은 없어 보였다.
“단점만 많지 않으면 그걸로 됐다.”
온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간에 후부의 적녀 아니냐. 나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건 예전 신분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이니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용모도 나쁘지 않고 너와도 아는 사이이니 난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오라버니에게는 물어보셨어요?”
“아직 안 물어봤단다. 하나 지금 물어보면 되지. 채 마마! 채 마마!”
“예!”
밖에서 채 마마가 대답하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집으로 돌아가서 큰애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채 마마는 바로 밖으로 나갔다.
추길은 간식거리를 두 접시 내왔고 모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다 되어 갈 무렵, 마침내 엽균과 채 마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연채야.”
엽균은 미소를 지으며 읍했고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그를 쓱 훑어봤다.
엽균은 이미 스무 살이었다. 평상시 집에서 입는 파란색 비단옷을 입은 그는 키도 훤칠하고 확실히 외양은 근사했다. 걸을 때 다리를 조금 절기는 하지만 이젠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렇게 티가 나지도 않았다.
“균아, 이 어미가 너를 위해 혼처를 구했는데 괜찮은지 한번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영안후부의 대소저인 원남옥이라고, 그저께 이곳에 왔었는데 기억하니?”
온씨의 물음에 엽균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네 생각엔 어떤 것 같으냐?”
온씨가 재차 의중을 묻자 엽균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러자 엽연채가 검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거예요?”
“물론이지.”
엽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월 말 할머니 생신 때 영안후부 사람들도 왔었거든. 멀리서 계향桂香 정자에서 그 소저가 계화꽃을 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고모가 출가할 때도 왔었고.”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이제 보니 원남옥은 아예 자신의 올케언니가 될 작정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