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화
“아버님, 아버님!”
맹씨가 장찬의 뒤를 쫓았다.
장찬은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정정했기에 발걸음이 빠른 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모퉁이로 모습을 감췄다.
장만만은 얼른 맹씨를 쫓아가더니 그녀를 잡아당기며 말렸다.
“어머니, 됐어요.”
“됐긴 뭐가 됐단 말이냐?”
맹씨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장만만을 쏘아봤다.
“이건 네 혼사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초조하지 않겠느냐?”
“전…….”
장만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태자에게 파혼을 당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고 또 장박원과 엽이채의 엉망진창인 부부생활을 지켜보았기에 이젠 혼인에 대한 희망을 일체 잃어버렸다.
그녀는 더 이상 혼인에 대해 일말의 기대도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 시집갈지는 전부 장찬에게 맡기면 됐다. 만약 시집을 갈 수 없으면 산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면 그만이었다.
장만만은 그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할아버지는 제게 해가 되는 일을 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할아버지의 결정은 여태껏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맹씨는 말문이 막혔으나 의기소침한 장만만의 모습을 보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만아, 이 어미는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다.”
“알고 있어요.”
장만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녀는 함께 맹씨의 처소로 향했고,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장만만은 돌아갔다. 대화를 일단락한 후지만 맹씨는 여전히 장만만의 혼사 때문에 근심하고 있었다.
“내가 좋게 본 명문가가 몇 곳 있네. 그쪽에서도 다들 만만이를 괜찮게 생각하더군. 하지만 하필 아버님께서 혼사 문제를 좌지우지하시니. 아버님이 어떤 집안을 생각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어.”
이 말에 곡 마마가 맹씨를 좋게 달랬다. 그녀는 맹씨가 시집올 때 데려온 몸종이었다.
“어르신은 합리적인 분이시니 분명 아가씨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맹씨는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좋은 가문이면 굳이 내게 비밀로 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만이는 내 친딸이네.”
“마님, 지금 여러 생각을 하신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아가씨는 마님의 친딸이지만 어르신의 친손녀이기도 합니다. 설마 아가씨를 곤경에 빠뜨리시겠습니까?”
곡 마마가 미소를 지어 보이자 맹씨는 옅은 한숨을 쉬며 동의했다.
“자네 말이 맞네.”
지금으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그저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맹씨와 곡 마마는 명절 선물을 보내는 일로 분주했다. 그들은 방에서 세도가들의 명단을 작성하며 어느 가문에 어떤 선물을 보낼지 고민 중이었다. 이때, 어린 여종 한 명이 걸어왔다.
“마님, 매파 오씨가 왔습니다.”
“매파 오씨?”
맹씨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았다.
“그저께 우리가 회답을 주지 않았느냐? 오씨는 만만이를 위해 혼처를 찾아볼 필요가 없게 됐어. 혼사는 전부 아버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맹씨는 장만만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었고 이를 위해 매파 오씨를 불렀었다. 오씨는 능력이 좋아 괜찮은 명문가 공자들을 꽤 많이 찾아줬고 맹씨도 신랑 후보들을 보더니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국에는 모두 헛수고가 되었다.
“곡 마마, 은화 다섯 냥을 가져와 건네주게. 그리고 그동안 수고했고 더는 혼처를 알아볼 필요가 없다고 전하게.”
맹씨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지난번에 매파 오씨가 구해 온 혼처를 정중히 거절한 후 그녀에게 은화 다섯 냥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 또 찾아온 걸 보니 그녀가 분명 좋은 혼처를 새로 구해 왔을 거라는 예상이 들어 입 안이 썼다.
곡 마마는 방 안으로 들어가 은화를 꺼내 왔고 그 여종은 은화를 건네받은 후 바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여종이 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매파가… 혼인에 관한 일로 마님과 꼭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했습니다.”
맹씨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자신이 직접 돌려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알겠다. 안으로 들이거라.”
“예.”
여종은 대답을 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맹씨는 살펴보던 장부를 내려놓은 후 응접실로 걸어갔다.
잠시 후, 여종이 매파 오씨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고 오씨는 맹씨를 향해 읍했다.
“부인을 뵈옵니다.”
“오씨,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허허허. 자네가 정말 수고가 많네.”
맹씨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자리에 앉게나.”
그러나 매파 오씨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부인, 소인이 부인께 말씀드릴 중요한 일이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그게… 내가 지난번에 말하지 않았는가. 만만이의 혼사는 내가 결정할 수가 없네. 자네가 좋은 혼처를 구해 왔다고 해도 소용이 없어.”
“그게 아니라… 만만 소저의 혼사에 관한 것입니다……. 에휴. 좋은 귀공자가 있다고 말씀드리려는 게 아니라… 제가 소저의 혼처가 어느 집안인지 알고 있습니다!”
매파 오씨는 비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자 맹씨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고 오씨가 은밀하게 눈짓을 하자 그녀는 방에 있는 여종들에게 이리 일렀다.
“너희들은 밖으로 나가 보거라.”
여종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맹씨는 급히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른 게 아니라 전 다만… 장 소저는 참한 규수이시고 부인도 아주 인자한 분이시라 도저히 소저께서 곤경에 처하시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곤경에 처하다니?”
뜻밖의 말에 맹씨는 미간을 잔뜩 째푸렸다.
“지금 만만이의 혼사는 우리 아버님께 결정권이 있는데 누가 만만이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누가 결정한 건지는 소인은 모르겠습니다만 부인은 알고 계셔야 할 듯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부인께서는 한참 뒤에나 알게 되실 텐데, 그럼 큰 손해를 입게 되실 겁니다.”
“그럼 어서 말해 보게.”
곡 마마가 독촉하자 매파 오씨는 첫마디에 고씨를 거론하며 사정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소인과 매파 고씨는 가까운 곳에 삽니다. 매파 고씨는 정원에 대추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놨는데 최근에 과실이 잘 여물었죠. 그리고 소인의 손녀 소홍이가 그 집 어린 여종과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손녀가 대추를 몇 개만 따겠다고 하자 그 여종 아이는 그리하라고 말하고는 매파 고씨에게 물건을 사다 주러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웬 사동 하나가 그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저희 소홍이가 지켜봤는데 그 사동이 말상이고 코가 유달리 큰 걸 똑똑히 봤다고 했습니다. 인상착의가 딱 이 댁 어르신을 곁에서 모시는 사동 아닙니까?”
매파 오씨는 얼마 전부터 손녀인 소홍을 데리고 자주 장씨 가문에 와서 장만만의 혼담을 꺼냈기 때문에 장찬 곁에 있던 사동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래. 아버님을 곁에서 모시는 육전 같네. 그런데?”
맹씨는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조급한 기색을 보였다.
“그 사동이 매파 고씨에게 사내 쪽 집에 가서 혼담을 꺼내 달라고 했답니다. 혼사가 성사되면 중매를 선 대가로 후한 사례비를 주겠다면서요.”
매파 오씨는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 어르신께서 장 대소저의 짝으로 누굴 생각하신 줄 아십니까?”
“아이 참. 질질 끌지 말고 어서 말해 주게!”
“어르신께서 소저를 엽균과 맺어 주려고 하십니다!”
매파 오씨는 눈을 찡긋거리며 본론을 꺼냈고 흥분했던 맹씨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엽균? 어느 엽균을 말하는 겐가?”
“아이고, 부인!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부인의 사돈댁 자제가 아닙니까?”
매파 오씨는 기가 차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엽균이요! 엽균! 진서후 부인의 친오라비이자 온씨 부인의 아드님 말입니다!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된 그분 말이에요.”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맹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엽균? 아? 엽균이라고?”
그리 되묻는 맹씨는 ‘윙’ 하는 소리가 귓전에서 울렸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쯧쯧쯧. 엽씨 가문이 어떤 꼴이 됐습니까? 지금 그 집안의 대소저가 진서후 부인이 되기는 하셨지만, 그렇다고 몰락한 엽씨 가문을 어찌하지는 못하십니다. 엽씨 가문은 관직과 작위를 박탈당해 몰락한 가문이 되었습니다! 추접한 일도 끊이지 않고요!
누이가 진서후 부인이라지만 그 아버지는 파렴치한이고 어머니는 이혼을 했죠. 엽균 공자 본인도 전에는 정신을 못 차렸었고 지금은 절름발이가 됐습니다. 쯧쯧쯧, 이 댁 어르신께서 약을 잘못 잡수셨나 봅니다!”
매파 오씨는 연민이 섞인, 그러나 그보다는 꺼려하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맹씨는 더는 침착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게 사실인가?”
“당연히 사실이죠. 소인이 뭣 하러 부인을 속이겠습니까?”
매파 오씨는 ‘흠’ 하고는 이렇게 장담했다.
“부인, 못 믿으시겠으면 직접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조사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이 댁 소저께서 정말로 그 절름발이와 정혼하게 되면, 부인께서도 자연히 사실 여부를 알게 되시겠죠.”
맹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정말 고맙네, 오씨.”
“아유. 고마울 게 뭐가 있습니까.”
매파 오씨는 쥐고 있던 손수건을 흔들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좋은 규수가 불구덩이로 떠밀리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그럽니다. 다만 이 일을… 소인이 말한 거라고 말씀하지는 말아 주세요. 다른 분들한테는 오늘 소인이 이곳에 방문해 장 소저의 혼처 이야기를 하고 갔다고만 이야기해 주셔요.”
“그건 당연하지.”
맹씨의 마음속은 장만만에 대한 걱정뿐이라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곡 마마, 오씨에게 차비라도 좀 가져다주게.”
곡 마마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침실 쪽으로 걸어가 돈 상자를 뒤적거렸다. 매파 오씨가 중대한 소식을 가져왔으니 큰 공을 세웠다는 생각에 곡 마마는 작은 은덩이 대여섯 개를 꺼냈다. 합쳐 보니 족히 은화 50냥 정도는 되었다.
오씨는 그걸 보더니 기뻐서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말로는 사양했다.
“아이고, 뭐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세요.”
물론 말만 그리했지, 손은 이미 은덩이들을 덥석 받아 든 후였다.
“부인, 그럼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가 보게.”
매파 오씨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그곳을 떠났다. 수중에 은화 50냥이나 들어왔으니 당연히 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사실 그녀는 이곳에 오기 전만 해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찾아온 까닭이었다. 평판으로 따지면 오씨는 원래 고씨만 못했고, 또 두 사람은 항상 서로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경쟁을 해 온 사이였다.
이번에 오씨는 장만만의 혼처를 구하느라 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지만 결국 허탕만 치게 되었다. 뭐 헛수고한 거야 그렇다 치면 그만이었다. 어쨌든 맹씨도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었고 그녀도 감히 관리 집안에 밉보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손해를 보고도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었는데, 뜻밖에도 장만만의 혼사가 장찬의 손에 넘어가더니 그가 하필이면 매파 고씨에게 일을 맡긴 것이었다.
오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부아가 치밀어 올라 이 혼사를 망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부리나케 달려왔는데 원하던 대로 이 혼사를 망쳤을 뿐만 아니라 은덩이도 얻게 됐으니 그야말로 일거양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