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66화 (566/858)

제566화

온씨는 미간을 씰룩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기가 확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의 딸이 아이를 못 낳는다고 깔보고 있었다는 걸 몰랐을 리가 있는가.

‘연채가 마침내 바라던 바를 이루게 됐으니 당연히 이 사람들한테 제대로 보여 줘야지.’

온씨가 그리 생각하는데, 주렴은 이미 걷혔고 맹씨가 엽이채와 장만만을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맹씨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먼저 입을 뗐다.

“사람이 정말 많군요! 허허, 전 오늘 저희만 오는 줄 알았습니다.”

“연채야, 축하해.”

어색하게 웃고 있는 맹씨 곁에서 장만만은 옅은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참,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오셨어. 두 분은 지금 밖에서 너희 할아버님과 시아버님과 약주를 하고 계셔.”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을 힐끗 쳐다보니 맹씨 뒤에 서 있는 엽이채의 모습이 보였다.

엽이채는 얼굴이 조금 뾰족했고 눈 주위도 살짝 안으로 패었으며 몹시 수척해 보였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정도인데 열 살은 더 늙어 보이는, 가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작게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그녀는 엽이채에게 동정심이라곤 손톱만큼도 느끼지 않았다. 이건 엽이채가 스스로 선택한 인생이니 무릎걸음으로 기더라도 끝까지 완주해야 했다!

엽이채는 엽연채가 자신을 한 번 쳐다보자 바로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저게 무슨 눈빛이란 말인가? 멸시하며 비웃는 건가?

엽이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빌어먹을 년!’

원래 장박원에게 시집갔어야 하는 사람은 엽연채였다. 지금 이곳에 앉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할 사람은 분명 자신인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런 생각을 하자 엽이채는 한없이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한편, 온씨와 엽영교는 질투심과 억하심정으로 일그러진 엽이채의 얼굴을 힐끗하더니 아주 통쾌해했다. 엽이채가 엽연채의 혼사를 가로챘을 때 보였던 그 기고만장함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벌을 받게 된 것이다.

‘나쁜 계집, 그래도 싸지!’

“축하해요, 언니.”

엽이채가 냉소와 함께 빈말을 건네자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꾸했다.

“응.”

냉대에 더욱 울적해진 엽이채는 하하 소리 내 웃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참, 이제 아이도 생겼는데 첩실들은 몇 명이나 준비했는지 모르겠네요.”

그녀는 여인에게 가장 마음 아픈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엽이채의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표정이 굳어졌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묘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채야!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니.”

회임을 하면 남편에게 첩실을 붙여 준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적인 일이다 보니 당사자와 그 친정어머니 등 몇몇 사람들이 암암리에 상의를 했다. 누가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밥 먹었니?’ 같은 일상적인 인사도 아닌데 말이다.

온씨 역시 써늘한 눈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이렇게 나무랐다.

“이채는 전에는 다소곳하게 굴고 말도 조심해서 했는데,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더니 친정에서 배웠던 교양은 전부 잊었나 보구나.”

이 말에 맹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엽이채를 쏘아봤다.

“말을 가려 할 줄 모르면 밖으로 나가 있거라.”

같은 엽씨 가문 출신인 엽연채와 엽미채는 모두 반듯한데 엽이채만 교양 없이 구니, 마치 그녀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오고 나서 이렇게 변한 것처럼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미 무안함을 느끼고 있던 엽이채는 콧방귀를 뀌더니 정말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맹씨 등은 더욱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 * *

사람들이 한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더니 어느새 시간은 이미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었다.

혜연은 일찌감치 하인들을 시켜 밖에서 밥상을 차리는 중이었다. 점심밥이 준비되자 사람들은 무리 지어 식사를 마친 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온씨는 진씨를 보더니 그녀가 또 엽연채가 친정 식구들과는 친한데 시집 식구들과는 친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낼까 봐 걱정이 되어 묘씨 등과 함께 작별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진서후부를 떠나기 전에 제민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방금 전에 너도 들었겠지만 연채의 시어머니가 했던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매번 이렇게 트집을 잡히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니 앞으로 내가 이곳에 덜 와야겠다. 그런데 사위가 집에 돌아와 명절을 보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으니, 민이 네가 이곳에서 지내며 연채 곁에 많이 있어 주면 좋겠구나.”

“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제민은 헤실대며 온씨를 안심시켰다.

엽연채는 온씨를 대문까지 배웅해 준 뒤 방으로 돌아와 따뜻하고 포근한 탑상에 앉아 수를 놓기 시작했다. 제민은 계원차桂圓茶를 들고 오다가 그녀의 자수틀을 보며 물었다.

“뭘 수놓고 있는 거야?”

“아… 아기 옷에 수를 놓으려고. 먼저 배경으로 꽃을 수놓았는데 이 위에 어떤 동물을 수놓을지 고민 중이야. 토끼가 좋을까? 아니면 작은 호랑이가 좋을까?”

제민은 그녀 옆에 앉으며 말을 받았다.

“여자아이이면 토끼를 수놓고 사내아이이면 호랑이를 수놓으면 되지. 그런데 현재로선 성별은 알 수가 없잖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전부 사내아이 것만 준비하지는 마. 뭐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나도 네가 사내아이부터 낳았으면 좋겠어. 그래야 네 자리가 더욱 굳건해질 테니까.”

그러자 엽연채는 또 기분이 가라앉았고 자수에 대한 흥미도 조금 줄어들었다. 자리를 굳건하게 만든다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과 총애 다툼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제민은 기분이 침체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고 도성으로 돌아오던 길에 겪었던 일이 또 떠올랐다. 그 호위병들이 노씨 낭자를 집안으로 들이네 어쩌네 허튼소리를 해댔는데, 그때 엽연채의 낯빛이 순간 확 어두워졌었다.

그녀의 고민거리를 알고 있는 제민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거지?”

엽연채는 그녀를 힐끔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지 않은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쥐고 있는 자수 바늘로 천운금天雲錦을 살포시 뚫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

제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사내는 다 그래. 네 부군이 그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마을에 살던 노인도 쌀 몇 말을 더 타면 기녀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하더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쥘 수 있는 건 전부 수중에 넣는 거야.”

엽연채는 권세 있는 사내들뿐만 아니라 행상인이나 심부름꾼도 한평생 한 여인만 사랑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라 입을 열었다.

“참, 민아. 너 올해 열여덟 살이지?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야?”

제민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난 시집가지 않을 거야.”

“어?”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자 제민은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었다.

“속았지? 시집은 가야지!”

“어?”

엽연채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 들어 봐.”

제민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자세히 말했다.

“초빙풍이 얼마나 후회를 하든 비참해졌든 간에 그 사람은 이미 혼인을 했잖아. 그런데 내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내가 자기 때문에 수절한다고 생각할 거 아냐! 흥, 내가 왜! 죽어도 시집은 갈 거야.”

엽연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한 끝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 사람한테 좌우되면 안 돼. 자기 뜻대로 살아야지.”

“이게 내 뜻이야. 초빙풍이 아무리 너절한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내 과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쓰레기 같은 사내에 불과한데 굳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을 필요가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건 불가능해.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일어난 적 없는 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거야. 진짜로 존재했으니까!

마음 아파해 봤으니 예전하고 똑같을 순 없어. 과거는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영향을 줄 거야. 그러니까 내가 그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 건 불가능해. 화를 내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난 내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는 거야! 내 생각은 이래.”

엽연채는 멍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말이 맞아. 무엇보다 자기 마음이 편해야지.”

이 말과 함께 엽연채는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비난을 쏟아내든, 자신의 마음이 편안한 방향으로 살기로.

* * *

그 시각, 집으로 돌아온 장씨 가문 사람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수화문에 선 맹씨는 엽이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을러댔다.

“이 빌어먹을 것! 앞으로는 외출하지 말거라! 네가 우리 장씨 가문의 체면을 아주 바닥에 떨어뜨렸다.”

엽이채의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는 이미 집안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체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젠 외출조차 금지라니?’

그녀는 화가 나 눈에 핏발을 세우며 말했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간 줄 아세요?”

맹씨는 감히 그녀가 말대답을 하자 가슴을 움켜잡으며 더욱 분노했다.

“우리 가문의 명성이 너 때문에 엉망진창이 되었어! 너 때문에 만만이가 아직도 시집을 못 가고 있잖느냐!”

장만만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고 엽이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떴다.

“보만 아니었다면 벌써 저 빌어먹을 것을 쫓아냈을 것이다.”

맹씨는 분기탱천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장찬을 쳐다봤다.

“아버님, 곧 있으면 정초입니다. 그럼 만만이는 한 살을 더 먹게 돼요. 더는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다.”

장찬은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이미 사람을 시켜 매파에게 혼처를 부탁해 놨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거라! 명절을 쇠기 전에 혼처를 정할 것이다. 어떠냐?”

“정말입니까?”

맹씨는 반색하며 진행이 어찌 돼 가는지 궁금해했다.

“어느 가문 사람입니까?”

“넌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 없다.”

장찬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그리 대꾸하고는 뒷짐을 진 채 빠른 걸음으로 수화문을 넘어섰다.

맹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자기 친딸의 일인데 관심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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