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5화
지난번 엽승덕이 온씨를 괴롭힌 일로 엽연채는 엽학문을 찾아가 경고를 날렸고 그는 그때부터 엽연채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 손녀와 관계를 끊겠다고 속으로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고 그저 앞으로는 그녀와 왕래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회임을 했다 하고 묘씨 등이 함께 외출을 하는 모습을 보니, 또 참지 못하고 그들 틈에 껴서 이곳에 온 참이었다.
어쨌든 웃어른인 자신이 방문했는데도 엽연채는 자신을 특별히 존중해 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엽학문은 부끄럽고 분한 마음에 화가 났지만 소매를 뿌리치며 나가기는 곤란했다. 괜히 티를 내기 민망한 것이다.
한편, 손씨와 엽승신도 굳은 표정으로 엽학문 뒤에 서 있었다. 사람들이 엽연채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질투가 나고 또 적대감이 들었다. 전에 엽이채가 회임을 했을 땐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 빌어먹을 계집애는 아이를 가지면 안 되는데 어떻게 갑자기 아이가 들어선 거지?’
손씨는 이상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허. 연채 너도 참 대단하다. 전에는 일 년 내내 아이 소식이 없었는데 이제 본가에서 나오고 부군이 타지로 떠나니까 바로 아이가 생기는구나.”
“그게 무슨 말인가?”
온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고 화가 나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씨의 방금 말은 귀에 정말 거슬렸다.
‘거짓 임신을 했다고 의심하다니!’
“형님… 아, 아니지. 온 부인, 왜 저한테 호통을 치는 겁니까? 전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손씨는 난처한 얼굴로 온씨를 쳐다봤다.
“제가 무슨 틀린 말이라도 했나요?”
“이!”
온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물론 말 자체에서는 확실히 잘못된 부분을 집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들 반편이도 아닌데 그 저의를 모를 수 있는가.
손씨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몇 마디 더 꺼내어 몰아붙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엽연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옆에 있는 여종들을 불렀다.
“청유야, 매화야. 숙모와 숙부를 밖으로 뫼시거라.”
손씨와 엽승신은 표정이 굳어졌고 손씨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을 더듬댔다.
“그, 그게 무슨 뜻이니? 우린 네 숙모와 숙부가 아니더냐! 우린 좋은 마음으로 널 보러 온 건데…….”
“좋은 마음인지 아닌지는 제가 압니다. 절 정말로 반편이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말을 잇는 그녀의 말간 눈에는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
“전 지금 숙모의 표면적인 호의를 받아 줄 기분이 아닙니다. 이곳은 제집이니 제가 내쫓고 싶으면 내쫓을 겁니다. 그러니 가세요!”
손씨와 엽승신은 얼굴이 새파래졌고, 손씨는 엽학문을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아버님……! 보세요, 이 계집애가……!”
그러자 엽연채는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쫓아내거라.”
청유와 매화는 얼른 앞으로 나오더니 우선 손씨부터 밖으로 끌어냈고, 또 밖에 있던 막일을 하는 어멈 두 명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그들 내외를 잡아끌었다.
엽학문은 그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이런……! 어쨌든 네 숙부랑 숙모다. 쟤들이……!”
그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엽연채가 냉담한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매서운 눈빛은 아니었지만 엽학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쳐 왔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더 시끄럽게 굴면 자신마저도 내쫓을 거라는 뜻인가?
엽학문은 성질이 치밀어 한바탕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할 게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럼 자신이 수십 년 동안 지켜온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엽학문은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 뿐 감히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영교는 벌써 5개월이지?”
온씨가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화제를 돌렸다.
“네.”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룩하게 튀어나온 자기 배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옥패의 부축을 받아 이미 엽연채 옆에 앉아 있었다.
엽영교는 경험자로서 엽연채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고자 했다.
“주의해야 할 부분들이 많아. 의원이 말한 건 일부분에 불과해. 그것 말고도 숨겨진 비결들이 아주 많거든. 우리처럼 진짜 회임한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거지.”
엽연채는 엽영교의 목덜미에 자신의 머리를 살포시 기대며 말했다.
“그럼 고모가 와서 제 곁에 있어 줘요.”
“알겠어. 네가 귀찮아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엽영교는 그녀를 담뿍 껴안았다.
사실 엽영교는 아이를 가진 후 밖으로 돌아다닐 엄두가 안 났는데, 그런 와중에도 엽연채가 속상해할까 봐 걱정이 됐다. 이제 엽연채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그녀 역시 마음이 편안해져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엽씨 가문 아이들 아닌가? 사돈어른과 안사돈 등이 이미 와 계셨군요.”
엽연채는 이 목소리를 듣더니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진씨였다.
그리고 진씨가 말한 아이들이란 묘씨 등과 함께 온 여종들이었다. 이 여종들은 전부 낭하에서 쉬고 있었는데, 진씨가 이들을 가지고 농을 치는 것이었다.
“백야와 마님, 주 측비 마마…….”
밖에 있던 소월이 얼른 사람들의 이름을 읊었다.
그러는 사이, 밖에 달린 주렴이 소리를 내며 걷혔고 이어 사람들이 한 사람씩 줄지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주 백야, 진씨, 주묘서 등으로, 주씨 가문 상전들이 전부 걸음한 것이었다.
엽연채가 그들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척을 하자 주 백야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유. 일어나지 말거라. 지금 몸도 무거운데.”
그는 손자가 한 명 더 생겼다는 기쁨에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반면 진씨는 눈 흰자위를 번득였다.
‘그저 회임한 것에 불과한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누구는 애 못 낳나!’
진씨는 허허 하고 음흉한 웃음을 짓더니 온씨 등을 휘둘러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사돈댁분들이 전부 오셨네요.”
그리 말하고는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셋째 너도 참. 회임한 소식을 제일 먼저 친정에 알리다니. 시어머니인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친정 식구들이 전부 와 계시는구나.”
온씨와 묘씨 등은 낯빛이 확 변했고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반면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어머님도 참. 시간이 이미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의 절반이 지났는데 당연히 와 있어야죠. 그런데 어머님은… 제 집안사람인데 손님들이 전부 도착한 뒤에야 오셨네요. 안 그래도 어머님 흉을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엽연채의 얼굴에 빈정거리는 기색이 고스란히 묻어나자 진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시어머니인 자신이 며느리에게 살갑게 굴지 않고 친정 식구들만도 못하다고 한 것 아닌가. 진씨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지더니 이렇게 반박했다.
“다들 정륭가에 사니 난 묘서를 기다렸다가 함께 오려고 그런 것이다.”
“아, 그러셨던 거군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역시 친딸이 최고죠. 저도 제 어머니의 친딸이고요.”
그러면서 응석을 부리듯 온씨의 팔을 끌어안더니 머리를 그 위에 살짝 기대었다.
온씨와 묘씨 등은 속이 후련해졌으나 진씨와 주묘서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엽연채는 너는 안 되고 나만 된다는 진씨의 태도를 비웃는 것이었다. 진씨는 자기 딸과 더 친밀하고 그다음에 며느리를 생각했다. 엽연채도 마찬가지로 자기 어머니와 더 친밀했다. 진씨나 엽연채나 똑같이 행동했는데 진씨가 무슨 자격으로 엽연채를 비난한다는 말인가?
“됐으니 그만하시오. 뭐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요?”
주 백야는 싸늘한 눈빛으로 진씨를 쏘아봤다.
물론 진씨는 이제 주 백야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태자 측비인데 왜 그의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딸의 앞날이 아직은 주운환에게 달려 있으니, 현재로선 입을 다물고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씨가 수세에 몰리자 주묘서는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거짓웃음을 지어 보였다.
“작은새언니. 이 측비가 새언니를 보러 왔어요.”
엽영교 등은 그녀가 꺼낸 ‘이 측비’라는 말을 듣자 속이 다 메스꺼웠다.
상대방은 신분과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자나 왕의 작위를 받은 사람처럼 따로 자기를 지칭하는 호칭이 있는 사람이면 또 모를까, 일개 측비가 스스로 측비라고 칭하며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민망하지도 않단 말인가?
“아, 자리에 앉아요.”
엽연채는 그저 냉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주묘서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측비이고 곧 황후가 될 사람이었다. 엽연채가 자신에게 예를 올리지는 않아도 된다지만 지금 이 태도는 너무 성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리 행동하다니, 이는 사람의 체면을 사정없이 깎는 행동이었다.
게다가 엽연채 주변의 간사한 인간들은 또 어떤가. 너무나도 뻔뻔했다. 자신은 태자의 측비인데 그들도 따라서 예를 올리지 않다니 말이다. 엽연채의 권세에 기대 감히 자신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이었다.
주묘서는 눈물과 분한 마음을 참으면서 저도 모르게 또 정선제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 죽지도 않는 늙은이! 왜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거야?’
곱게 세상을 떠 줬더라면 자신은 이미 황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엽연채에게 이런 수모를 당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 밖에 있던 소월이 갑자기 외쳤다.
“마님, 영안후부에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아, 오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거지?”
방 안에는 이미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는데, 밖에선 또 영안후부 사람들이 왔다니.
이에 엽승강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가 없으니 우린 그만 밖으로 나가 앉아 있자꾸나.”
그는 그리 말하며 엽균을 데리고 함께 응접실에서 나갔고, 주 백야도 하하 웃으며 자리를 떨쳤다.
“우리도 밖으로 나가 바람 좀 쐬자.”
그가 뒷짐을 지고 떠나자 주비양과 주종과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엽학문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사내들이 모두 자리를 뜨니 혼자 이곳에 남아 있기는 민망해서 하는 수 없이 새파란 얼굴로 그들을 따라갔다.
강심설과 주묘화, 나씨 등도 응접실을 나와 밖에 있는 소청으로 가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셨다.
잠시 후, 영안후부 부인이 원남옥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영안후부와 엽연채는 그다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원남옥과 엽연채가 친분이 있는 편이기 때문에 이곳에 방문한 것이었다.
영안후 부인은 문으로 들어서더니 어색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떤 말을 꺼내야 친근해 보일지 알지 못해 우물쭈물하던 그녀는 엽연채와 엽영교가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을 붙였다.
“엽씨 가문에 손자와 증손자가 연달아 태어나겠네요.”
온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이혼했지만 딸은 여전히 엽씨 가문 여인이었다. 그런데 몇 마디 하지도 못했는데 밖에 있던 소월이 또 이렇게 외쳤다.
“장씨 가문 손님들이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