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4화
맹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일개 부인이 회임한 것에 불과한데 시아버지도 일부러 찾아와서 이 이야기를 꺼내다니, 정말이지……!’
맹씨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겉으로는 선웃음을 유지했다.
“아. 진서후 부인의 일을 말씀하신 거군요. 저희도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하하하. 내일 사람을 시켜 축하 선물을 그쪽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장찬은 고개를 돌리더니 맹씨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사람을 시켜 보내다니? 넌 발이 없는 것이냐?”
맹씨는 표정이 굳어졌다. 엽연채는 손아랫사람인데 자신더러 직접 선물을 전달하러 가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달갑지 않았다.
“저희가 가서 소란스럽게 굴면 싫어할까 봐 그런 것뿐입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손아랫사람입니다…….”
“누군들 손아랫사람이 아니겠느냐?”
장찬이 그녀를 쏘아보며 반문했다.
“설마 네 손윗사람이 아이를 가졌는데 너보고 가서 선물을 전달하라고 하는 것이겠느냐?”
맹씨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젊은 부인들이니 당연히 다들 손아랫사람이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자신이 회임을 했을 때도 친정과 시댁 어른들이 자신을 보러 찾아왔었다.
“제가… 잠시 어리석었습니다.”
맹씨는 얼굴이 붉게 변했다.
“내일 저희가 그 아이를 보러 가 보겠습니다, 하하.”
장찬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전에 이 며느리는 전체적인 국면을 볼 줄 아는 편이었다. 그뿐 아니라 밖에서도 대인관계가 아주 좋았으며 경조사 같은 집안일들도 순조롭게 잘 처리했다.
하지만 엽이채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장박원이 폐인이 된 후로 맹씨는 마음을 다잡지 못했고 나날이 침울하고 무기력해졌다. 성격도 날카롭고 쩨쩨하게 변했으며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장찬은 한숨을 푹 쉬고는 재차 입을 뗐다.
“내일 우리 가족 모두 함께 갈 것이다.”
“예?”
맹씨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미 창피하다고 생각했고, 비위를 맞추러 왔다고 엽연채가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뭐라고? 온 가족이 모두 가야 한다고?’
그럼 무슨 꼴이 되겠는가. 정말로 아첨을 하고 환심을 사려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저… 아버님… 제가 며느리와 만만이를 데리고 가 보면 됩니다. 진서후부에는 사내도 없는데 아버님께서 가시면… 그다지 보기 좋지 않을 겁니다.”
“그 입 다물거라!”
장찬이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좋지 않아 보일 게 뭐가 있느냐? 주정은 사내가 아니더냐? 분명 엽학문 그 늙은이도 올 텐데 그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면 된다.”
맹씨는 더는 반박하지 못하고 그저 표정만 더욱 굳혔다.
“가서 첩자를 보내거라.”
장찬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그곳을 떠났다. 이런 일엔 여인들 몇 명만 보내면 된다는 걸 누가 모르겠는가. 사내가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 회임을 축하하는 건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엽연채와 꼭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맹씨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더니 여종을 불러와 첩자를 써서 진서후부로 보냈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는 첩자를 한 무더기 받은 상태였다.
엽연채는 매화 절지 문양이 들어간 자단목 탑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여종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앉아 요란을 떨며 손에 든 첩자의 개수를 세고 있었다.
“이건 동영후부東榮侯府에서 보낸 첩자인데 내일 마님을 뵈러 이곳을 방문한다고 합니다.”
청유가 말했다.
“이건 육씨 가문에서 보낸 겁니다.”
백수는 또 다른 첩자 한 장을 들며 말했다.
“이건 전씨 가문에서 보낸 겁니다.”
매화의 말까지 듣고 추길은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다 모르는 사람들이네. 한쪽에다 치워 놔. 고맙다는 답장만 보내 주면 되니까.”
그때 혜연이 첩자 한 장을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건 영안후부에서 보낸 겁니다.”
“그것도 치워.”
추길의 대꾸에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원남옥 집에서 보낸 거니 봐야지. 언제 온다고 적혀 있니?”
추길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영안후부는 별 볼 일 없는, 이미 기울어진 후부에 불과하니 왕래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청유는 혜연 곁으로 다가가 첩자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일 오신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오라고 회신하렴.”
엽연채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을 많이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데다 자신과 원남옥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이때, 추길이 예쁜 분홍색 첩자 한 장을 집어 들더니 미소를 지으며 알렸다.
“이건 상관운 소저께서 보내신 건데, 모레 이곳에 와서 놀다 가시고 싶다 합니다.”
엽연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한 무더기의 첩자들 중 그냥저냥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 보낸 첩자는 전부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하지만 몇몇 권세가들과는 경조사 때 반드시 서로 인사치레를 해야만 했다. 예를 들면 공주부, 양왕부, 태자부, 또 유씨 가문과 정씨 가문 등의 권신들의 첩자에는 엽연채가 하나하나 직접 답장을 썼다.
물론 이런 권신들은 다들 첩자와 선물을 보내며 의례적으로 안부를 묻는 게 다였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투덜거렸다.
“이제 막 아이를 가진 것뿐인데. 아직 낳은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으시면 더욱 시끌벅적할 겁니다.”
청유가 이리 말을 받는데 밖에 걸려 있는 발이 걷히더니 소월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여양이 왔습니다.”
엽연채는 지금 주운환 곁에 있는 사람만 봐도 좀 짜증이 나서 인상을 쓰면서 대답했다.
“그래. 안으로 들이거라.”
“예.”
소월은 대답을 하고선 밖으로 나갔다.
여양은 바깥에 있는 소청에 서서 주렴을 사이에 두고 엽연채를 향해 읍했다.
“마님, 감축드리옵니다. 제가 소전과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마님께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헤헤.”
‘나리께 아이가 생기다니!’
여양은 더없이 기뻐하며 또 이렇게 말했다.
“참, 마님. 이 일을 언제 나리께 알리실 생각입니까? 제가 지금 당장 달려가서 나리께 알려 드릴까요? 아니면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직접 큰 기쁨을 전하시겠습니까?”
엽연채는 주운환 생각을 하자 마음이 우울해져 적당히 대꾸했다.
“너 좋을 대로 하거라.”
여양은 어딘지 냉담한 것 같은 엽연채의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원래부터 그리 섬세하지 못한 성격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가진 탓에 푹 쉬지 못해 그러는 거라고만 생각하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헤헤헤, 그럼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게 좋을 성싶습니다. 분명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혜연을 불렀다.
“상을 주거라.”
혜연은 대답을 하고는 얼른 작은 돈주머니를 한 무더기 꺼냈고 주머니를 건네받은 여양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한걸음에 자기 처소로 돌아간 여양은 그 주머니들을 형제들에게 나눠 줬다.
이들은 전부 주운환의 친위병이었다. 주운환이 집에 있으면 그들도 집에 머물고 주운환이 파견 명령을 받고 타지로 출정하면 그들도 따라갔다. 그럼 집안은 평해 등의 가병들에게 맡겨졌는데, 지금은 주운환이 먼저 돌아가 있으라고 해서 일부만 이렇게 머물고 있는 것이었다.
소전 등이 주머니를 열어 봤는데 무려 은화 두 냥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기뻐했고 거기에 껴 있던 평해는 헤헤 웃으며 엽연채를 추켜세웠다.
“마님은 정말 인심이 후하시네.”
“그러게 말이야!”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소전은 냉소를 지었다. 그는 그녀가 정말로 후덕한 사람이었다면 노씨 낭자를 집으로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전은 엽연채가 노교아를 집으로 데려오지 않은 일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때 그 낭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마 지부의 계략을 피할 수 없었을 거야. 어쩌면 모두 동우산에서 죽었을지도.’
노교아는 마음씨가 착하며 의술이 뛰어났다. 그리고 주운환과 살을 맞대기까지 했으니, 이건 그녀의 명예와 절조에 악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주운환이 깨어났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서 책임지고 집안으로 들이겠다는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일이 진행되는 걸 막아 버린 것이다.
게다가 노교아는 성품이 고결해 시기를 놓쳐 버렸고 엽연채가 투기를 부려 주운환은 나중에 노교아를 첩실로 들이겠다는 말을 다시 하기가 곤란해졌다. 안주인인 엽연채가 자리에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은 엽연채가 왔으니 더더욱 그녀가 나서서 노교아를 집안으로 들여야만 했다. 그게 주운환의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엽연채는 포용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교활하게 궤변까지 늘어놓아 주운환이 책임을 지지 않는 비정한 사내처럼 보이게 됐다.
지금 돈을 아주 후하게 챙겨 줬지만 그저 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신들은 이리 쉽게 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주운환을 좋아하는 여인들은 차고 넘친다. 얼마나 많은 귀족들의 서녀가 그의 첩실이 되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이제 엽연채가 아이도 가졌으니 그 명문가 서녀들을 첩실로 들이면 된다.
‘상황이 이런데, 엽연채는 질투심을 숙성시켜서 독이라도 하나 가득 채울 생각인가 보지? 그렇담 양이 어마어마하겠어. 하루에 한 입씩, 십 년을 마신다 해도 다 못 비우겠는걸.’
한편, 소전을 제외한 나머지 사내들은 껄껄대며 ‘이 돈으로 어느 공연장에 가서 어떤 배우의 노래를 들을까.’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온씨와 묘씨 등은 일찌감치 진서후부에 왔고 엽영교도 그들을 따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밖을 지키던 소월이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할아버님과 할머님… 자당과 도련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름을 한가득 불렀고, 이어 주렴이 ‘촤르륵’ 소리를 내더니 온씨와 묘씨 등이 줄지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씨 가문 상전이란 상전들은 전부 다 온 모양이었다.
“연채야.”
앞장선 묘씨와 나씨가 소리 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다들 오셨군요.”
엽연채는 반가운 얼굴들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하려 하자 옆에 앉아 있던 제민이 얼른 그녀를 도로 앉혔다.
“뭘 이리 바쁘게 움직여. 다 네 사람들인데 이렇게 예의 차릴 필요가 뭐가 있다고. 그냥 앉아 있어!”
그러는 사이, 묘씨 등은 이미 응접실로 들어섰고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제일 먼저 운을 뗐다.
“홑몸도 아닌데 막 움직이려는 거야?”
그러자 엽연채가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남 말 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고모 배 좀 봐요. 꼭 고무공 같거든요.”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번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불룩하게 솟아오른 엽영교의 배로 향했다.
그러자 엽영교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나 싶더니 삽시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엽연채의 얼굴을 살짝 꼬집었다.
“요 나쁜 계집애. 고모를 이렇게 놀려? 두고 봐라. 네 배는 조만간 나보다 더 부풀어 오를 테니 말이야. 흥.”
“연채야…….”
엽균도 온씨의 뒤를 따라왔고 엽연채를 보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엽승덕 일을 떠올려 보니 그런대로 엽균이 잘 처신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에 그의 체면을 살려 주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방 안은 상당히 화목한 분위기였지만, 뒤에 선 엽학문은 예외였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딱딱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