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63화 (563/858)

제563화

사내들은 다 똑같았다.

전생의 장박원도 엽이채를 아주 사랑했지만 결국 여러 첩실들을 들였다. 엽승덕도 은정랑을 아주 사랑했지만 전생에서 그들 모자를 집안으로 들이는 데 성공한 후에는 첩실들을 들이지 않았던가.

양왕과 태자는 말할 것도 없고, 몰락한 집안의 장자였던 주비양과 무기력한 주 백야에게도 첩실들이 있었다.

그리고 주운환은 양왕 같은 방탕아가 길러 낸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에 아내를 맞이하고 첩실을 들이는 건 간단하고 평범한 일이며, 그는 양왕이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사는 걸 보면서 풍류를 안다고 칭찬까지 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가장 일반적인 일이며 이 세상의 법칙이었다. 마치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나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그가 저를 위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버릴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지금 친어머니인 온씨마저 자신에게 대범하게 행동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온 세상도 그리해야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조금도 내키지 않았다.

엽연채는 이를 악물더니 배에 손을 얹고는 결정을 내렸다.

온 세상이 자신을 욕하고 비난한다고 해도 뭐 어떠한가? 자신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살게 되면서 어머니도 잘 살고 자신도 잘 살기를 바랐다. 구속받지 않고 제 뜻대로 살며 아름답고 빛나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자신은 주운환이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며 사는 꼴을 보고 싶지도, 다른 여인과 그를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나 자신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 아파할 바에야 차라리 그를 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온씨는 엽연채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는 데 반해 엽연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러나 실은 억울해 견딜 수 없고 마음이 너무 아픈 탓에 그리 보일 뿐이었다.

“연채야?”

“아, 네.”

멍하니 있던 엽연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방금 전 내가 했던 말, 들은 게냐?”

온씨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엽연채의 얼굴을 부여잡으며 당부했다.

“결국 조만간 벌어질 일이다. 그런데 왜 제대로 처신하지 못하는 거니? 들어 보니… 네 부군의 수하도 이 일로 네게 불만이 많다고 하던데. 그러잖아도 네 시어머니는 널 좋아하지 않는데 이 일로 트집을 잡으면 넌 또 편히 지내지 못할 게다.”

엽연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이렇게만 대꾸했다.

“알겠어요, 어머니. 일단 돌아가 보세요.”

온씨는 표정이 굳어졌으나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신경질을 부리는 게냐? 에휴. 네가 계속 짜증을 부리면 사위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기 손으로 어여쁜 첩실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올 텐데, 그리되면 네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까 봐 이 어미는 걱정이 되는 거란다.

네가 직접 나서서 첩실들을 들이면 대범하고 현명하다는 평판을 얻게 될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냐? 됐다. 그만 말하마. 아직 사위가 돌아오지 않았으니 넌 마음부터 추스르고 있거라.”

온씨 또한 이런 일을 경험해 봤으니 당연히 엽연채의 심정이 어떤지 이해가 됐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현실을 겪으면 조만간 그녀는 각성할 것이고 이 사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채 마마와 함께 문을 나섰고 매화는 그들을 배웅하러 나갔다.

추길은 온씨가 설득을 하다 말고 떠나 버리자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고 그녀의 시선은 저절로 엽연채에게 향했다. 보니 엽연채는 복숭아 문양이 조각된, 금색이 섞인 보라색 손난로를 들고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참. 아기씨가 생겼으니 관련된 준비를 해야 하겠지요. 옷가지나 이불, 신발 그리고 아이가 처음 입을 옷 등은 어머니인 마님께서 직접 만드시는 편이 좋습니다.”

엽연채는 이 말을 듣더니 그제야 반응을 좀 보였고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그래.”

“그… 유모도 준비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볼 사람도 준비해야 합니다. 노주가 아이를 제일 잘 달래요. 넷째 아가씨와 다섯째 아가씨가 어렸을 때 기억나세요? 노주만 보면 웃곤 하셨잖아요. 그러니 노주를 불러오는 건 어떨까요?”

추길은 그리 말하며 간절함이 섞인 기대하는 눈빛을 보였다.

엽연채가 출가할 때 온씨는 여종들의 역할을 정해 줬다. 혜연은 엽연채를 끝까지 보살필 여종이었고 추길과 노주는 엽연채를 향한 주운환의 총애를 붙들어 놓을 여종들이었다.

그런데 후에 혼사에 변화가 생기면서 노주 등 몇몇 여종들은 전부 별장으로 보내졌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엽연채 부부에게 자신만의 집이 생겼고, 그제야 여종들은 이곳 진서후부로 돌아왔는데 노주만 별장에 남게 되었다.

왜 하필 노주만 남았는가. 추길은 정말로 두려웠고 엽연채가 고의로 그런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추길은 자신의 앞날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갑자기 또 노교아가 튀어나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이지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게다가 엽연채가 갑자기 회임을 하게 됐고 첩실을 들이는 일도 이미 공개적으로 언급되었다. 그러니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를 위해 총애를 붙들어 줄 첩실을 찾아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공연히 다른 여인만 이득을 보게 될 테니까.

만약 대단한 여인이 오게 되면 추길 자신 혼자만으로는 절대 당해 내지 못할 것이었다.

추길이 노주를 언급하자 혜연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무어라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콧방귀를 뀌더니 웃는 게 아닌가.

“그럼 불러오거라! 곧 있으면 정초이니 정초가 지나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예.”

추길은 기뻐했다. 드디어 엽연채와 의견이 맞게 되었다. 노주가 돌아오게 됐으니 자신도 당연히 뒤로 물러나지 않게 될 것이다.

혜연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결국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화목하게 지내는 게 보기 좋았고 두 사람이 영원히 오붓한 한 쌍으로 지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바람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종류였다. 주운환은 어엿한 진서후이니 첩실의 자리를 결코 비워 두지 않을 것이었다.

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추길을 쓱 훑어봤다. 추길은 성미가 조급하긴 하지만 어쨌든 충복이니 엽연채의 수족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진씨 곁에 있는 백 이낭이 그랬다. 그녀는 이낭이 되어 주묘화를 낳았는데도 여전히 진씨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엽미채의 생모도 원래는 온씨를 곁에서 모시던 여종이었다.

이런 일은 피할 수가 없으니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가혹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잠든 척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저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혜연아.”

엽연채가 갑자기 혜연을 쳐다봤다.

“예.”

혜연이 얼핏 보니 엽연채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반짝거리는 두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주 측비를 본 지 오래됐구나. 내가 회임을 했으니 어머님과 주 측비에게 이 사실을 알리거라. 그럼 날 보러 올 게다.”

엽연채가 뜬금없이 이 말을 꺼내자 혜연은 어리둥절했다. 회임은 큰 경사였다. 매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진씨와 주묘서 같은 사람들은 가급적 안 볼 수 있으면 안 보는 게 좋은데, 일부러 그들을 불러오라는 게 영 이상했다.

‘어째서 스스로 산통을 깨시려는 걸까?’

하지만 엽연채의 행동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으니 혜연은 다만 고개를 주억였다.

“예, 지금 가서 알리겠습니다.”

“그래.”

엽연채의 고갯짓을 뒤로하고 혜연은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고 추길은 이미 침실에 가 있었다. 그녀는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포목들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입을 새 옷을 만들어 주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포목을 뒤적거리며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콧노래 소리에 엽연채는 냉랭하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니 지금껏 추길의 변화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추길의 속내를 눈치챈 지도 당연히 오래였다. 추길은 애초에 온씨가 첩실감으로 자신에게 붙여 준 사람이기도 했고, 자신도 추길의 미세한 변화 속에서 그녀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전에는 이를 모른 척 무시했다. 이 일을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일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주운환을 좋아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던 것이다. 그를 마음에 뒀기 때문에 제자리걸음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감히 현실을 직면할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모르는 척하며 살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일들은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마주해야만 했다. 첩실을 들이는 문제가 그것으로, 주운환이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에게는 막을 방도가 전무했다.

이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도저히 두 사람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곤 그와의 관계를 끊어 내고 자신의 감정을 거두며 그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잘라 내는 것뿐이었다.

엽연채는 양왕 쪽 일이 빠르게 진행되기만을 바랐다. 자신이 양왕에게 힘을 보탰으니 양왕의 거사가 성공하게 되면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주운환과의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게 해 달라고, 또 봉호를 내려 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 후에는 아이를 데리고 혼자서 살아가는 거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배를 슬슬 어루만지다가 코끝이 찡해졌다.

‘아가야, 미안하다. 이 어미 때문에 아비 없는 아이로 태어나겠구나. 하지만 이 어미는 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된다.’

* * *

혜연은 주씨 가문을 찾아가 주 백야와 진씨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이어 엽연채의 친정에 가서 묘씨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런 다음에 엽연채를 줄곧 걱정해 왔던 엽영교를 떠올리고는 진씨 가문도 찾아가 그쪽에도 말을 전했다.

주운환이 지위 높은 대신이 됐으니 그에게 아첨하고 싶은 자들이 잔뜩 관심을 쏟고 있었고, 그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엽연채가 회임을 했고 또 주씨 가문과 엽씨 가문을 찾아가 희소식을 전했단 사실은 한나절도 안 돼서 도성 사람들 절반이 알게 되었다.

엽연채가 회임한 사실을 알게 된 장씨 가문은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맹씨 부부와 장박원은 엽이채를 집안으로 들인 걸 후회하고 있었고 날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단 하나 그들에게 위안이 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엽연채가 불임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비로소 마음이 조금이라도 안정됐다.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가 회임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응접실에 있던 맹씨와 장굉은 여종이 가져온 소식을 듣더니 혐오감이 확 들었다.

“어르신께서 오셨습니다!”

내외가 분하기 짝이 없어 가슴을 치며 발을 구르는데, 밖에서 갑자기 여종의 외침이 들렸다.

장찬은 뒷짐을 지고서는 찬 기운을 풍기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리둥절해하던 부부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고 맹씨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장찬은 방 한가운데로 걸어가더니 난로 위에 대고 손을 쬐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서후부… 그 아이의 일을 너희들도 알고 있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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