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62화 (562/858)

제562화

채 마마는 또 주머니 두 개를 가져오더니 추길과 매화의 손에 각각 하나씩 쥐여 주었다. 매화는 아주 기뻐했지만 추길은 돈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소매 안의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을 뿐이었다.

온씨는 피풍을 걸치고 문을 나섰는데 하늘에서는 거위의 깃털처럼 가벼운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장이라도 엽연채 곁으로 날아가고 싶은 심정이니, 어디 가랑눈인지 함박눈인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수화문에서 마차에 오른 다음 황급히 정륭가로 향했다.

온씨는 기쁜 마음에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며 회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회임했는지는 어떻게 알았느냐?”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어요. 일어나셔서 음식을 드시겠다고 하셔서 교자를 내왔는데 한 입 드시더니 바로 뱉어 내셨고요. 처음엔 그냥 입맛에 안 맞으신가 해서 국수를 다시 내왔죠. 담백한 고기 국수였는데 그것도 뱉으시더라고요.

그때야 비로소 마님께서 달거리를 하신 지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가 들어섰구나 싶었죠! 그래서 아침이 밝자마자 태의를 모셔와 진맥을 했고 회임이 맞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마님께 소식을 전달하러 온 겁니다.”

온씨는 추길의 이야기를 듣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더욱 즐거워했다.

“요 녀석…….”

“하지만… 일이 하나 있습니다.”

추길은 그리 말하며 조심스럽게 온씨를 쳐다봤다.

“왜 그러느냐?”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자 온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좋은 소식을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설마 태의가 회임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 건 아니겠지? 진단이 잘못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건 아니겠지?’

“어서 말하지 않고 뭐 하느냐?”

고 잠깐새, 온씨는 초조해 죽을 것만 같아졌다.

“회임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말이죠, 마님께서 처음엔 기뻐하시더니 금세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셨어요.”

“노씨 낭자 때문이에요.”

매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노씨 낭자라니?”

온씨가 이맛살을 찌푸리자 추길이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얼마 전에 마님께서 저희 마님을 보러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저희가 마님은 법화사로 향불을 피우러 가셨다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어제 돌아오셨는데… 사실은 나리를 찾으러 수주에 가셨던 거였어요.”

추길도 엽연채가 포졸들 틈에 껴서 함께 달리고 눈비를 맞으며 산에 올라가 주운환을 찾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엽연채가 주운환이 보고 싶어 수주에 갔는데, 주운환이 비적 떼를 잡다가 한 낭자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지게 됐고 그러다 살을 맞댄 일이 있음을 그녀가 알게 됐다는 이야기만 했다.

이후,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위병들이 노씨 낭자가 주운환의 첩실로 들어올 거라는 농담을 했는데 엽연채가 언짢아해서 오는 내내 어색한 분위기였다고 말해 줬다.

이제 회임을 했다는 진단이 나왔으니 원래라면 아주 기뻐했을 일인데 엽연채가 그런 반응을 보여 흥이 싹 깨졌다는 것이었다.

온씨는 노씨 낭자 이야기를 듣더니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 역시 꺼림칙했지만 결국 옅은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잠시 후, 마차는 진서후부로 들어갔다.

* * *

그 시각 운연거.

추길이 떠난 후 태의는 회임 시의 주의사항들을 이야기해 줬고 유산을 방지하는 약을 처방해 준 뒤 진서후부를 떠났다.

엽연채는 여전히 응접실에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배를 어루만졌다.

청유, 소월, 백수 등 몇몇 여종들은 낭하에 서서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고 그들의 얼굴에 흥분과 기쁨이 가득했다. 그들도 엽연채가 회임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다만 엽연채가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해서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이때, 온씨와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청유 등은 얼른 그들 주위를 에워쌌다.

“오, 마님께서 오셨군요! 어서 안으로 드세요. 저희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방 안에 있던 혜연은 여럿이 하하호호 웃는 소리를 듣고는 얼른 온씨를 맞이하러 나왔다.

“마님.”

엽연채는 온씨가 왔다는 소리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런 때에 온씨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연채야.”

그러나 이미 온씨가 빙그레 웃으며 방에 들어선 후였다.

“어머니.”

엽연채가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온씨는 걸어가 그녀 곁에 앉았다.

“의원이 뭐라고 이야기했니?”

엽연채는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진 않고 몸을 잘 돌보라고 했어요.”

“그래, 신경을 잘 쓰려무나.”

온씨는 그리 대꾸하며 청유 등 몇몇 여종들을 쳐다봤다.

“너희들은 이만 나가 보거라.”

청유와 백수, 소월은 영문을 몰랐지만 바로 자리에서 물러나 방문을 닫았다. 그러자 엽연채 모녀와 혜연, 추길, 매화, 채 마마만 방 안에 남게 되었다.

온씨가 운을 뗐다.

“이제 회임을 하여 그런 일은 하기 불편하니 사위가 첩실을 두게 해 줘야지.”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릎 위에 올려놨던 손을 꽉 움켜쥐었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얘도 참…….”

온씨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네 마음이 어떨지 이 어미도 다 안다만, 여인들은 다 이런 일을 겪는단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딸의 얼굴이 쇠약하고 창백해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온씨는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어떤 일들은 분명하게 말해 둬야 하는 법이다.

엽연채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온씨가 다시 한번 말했다.

“누구나 다 겪어야 하는 일이다. 피해 갈 수 있는 여인이 어디 있겠니? 사위가 예전 그 몰락한 가문의 서자라면 네 눈치를 보며 지낼 테니 네 마음대로 할 수 있겠지만, 지금 사위는 진서후부의 주인이다.”

곁에 있던 매화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맞습니다. 지금 나리의 신분과 권세라면 설령 공주라고 해도 존중할 겁니다. 게다가… 나리는 원래 마님을 원치 않으셨잖아요.”

“뭐라?”

온씨는 깜짝 놀라더니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매화는 조금 머뭇거렸다.

“연채야?”

온씨는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다시 추길을 쏘아보며 독촉했다.

“어찌 된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추길은 엽연채를 한 번 힐긋하더니 그제야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장박원이 사랑의 도피를 해서 마님은 어쩔 수 없이 주씨 가문으로 시집오셨죠. 하지만 그래도 마님은 나리와 부부로 잘 지내실 생각이었는데 나리께서는… 부부가 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엔 마님을 원치 않으셨어요.”

온씨는 충격을 받아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예.”

추길은 미간에 주름살을 잡으며 한 가지를 마저 실토했다.

“계속 합방하지 않으시다가… 올해 구월이 되어서야 합방하셨어요.”

온씨는 현기증이 더욱 심해져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그녀는 줄곧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시집을 갔으니, 이 몰락한 가문의 서자 주운환에게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 일이며 그가 아주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운환은 엽연채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럴 수가!’

지금껏 상대에게 들러붙었던 사람이 도리어 자기 여식이었을 줄은 몰라 온씨는 크게 놀랐다.

“전에는 저희도 나리가 눈이 삐신 거 아니냐 생각했습니다.”

추길이 말했다.

“그런데 그 후 나리는 장원이 되셨고 출정하여 후야에 봉해지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이해가 됐죠. 나리는 눈이 삐셨던 게 아니라 정말로 마님이 눈에 차시지 않았던 겁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운이겠습니까? 나리는 재능이 넘치는 분이셨던 겁니다. 다만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어리석은 척해서 상대가 방심하게 만들었던 거죠.

나리께서는 그때도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고 있었고 장차 후야에 봉해지고 재상에 임명될 마음을 먹고 계셨던 겁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이름도 없는 일개 후부의 적녀를 원했겠습니까?”

그러자 온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럼 이제…….”

“마님, 걱정하지 마세요.”

혜연은 추길을 쏘아봤지만 추길이 말한 이야기가 사실이기는 했다.

“나리께서 처음에는 마님을 원치 않으셨지만 이후 천천히 마님을 좋아하게 되셨고 이젠 마님을 많이 아끼고 계십니다.”

그러나 온씨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거 큰일이 아니냐! 사위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때 네가 시집을 갔다면 사위도 널 원했을 테니 지금 네 마음대로 한다 해도 상관없다만…….”

엽연채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운환은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숨겨 왔는데, 무엇을 위해 그리했겠는가? 바로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고 자기 뜻대로 살기 위해서였다. 대신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공명을 떨치고 부와 미인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엿한 후야가 뭣 하러 자기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하겠는가?

분명 그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며, 세상 사내들 모두가 바라는 것인데, 그라고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 그가 이렇게 높은 곳에 오른 건 바로 이런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자신은 왜 주운환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그만은 특별하리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설마 자신이 환생을 했고 그는 그런 자신의 남편이기 때문에 다른 사내들과는 다를 거라고 기대했다는 말인가?

아니, 실상 그는 일찍이 답을 줬다. 그날 밤 그가 부부로 지내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씨 가문에서 지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님과 큰형수의 괴롭힘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리하기 전에 소저가 어떤 사람한테 시집왔는지부터 먼저 알아보시죠! 전 서자에 불과합니다! 비천한 신분이라고요!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주운환은 그저 사랑받지 못하는 서자에 불과했으니, 그 역시 모든 서자들이 가지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바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로 올라가는 것 말이다.

그도 사내이니 모든 사내들이 가지는 야망을 품고 있을 것이다. 대신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올라 공명과 부귀를 누리며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 말이다.

막 시집왔을 때 자신은 그가 본인의 분수에 만족하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밝혔다. 그는 정말 보통의 사내들처럼 야심과 욕망을 가진 사람이며 다른 서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름다운 사랑에 푹 빠져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번 수주행이 자신을 제대로 각성시켰다. 그 역시 아주 평범한 사내였다.

돌아오는 길에 소전과 사내들이 나눈 대화의 의미를 자신이라고 어찌 모를까. 그러나 알고 모르고를 떠나 기분은 나빠졌다. 그래서 그저 싫은 내색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어쩌면 주운환은 여전히 자신을 가장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많은 여인들이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부유한 사내가 한 여인만 데리고 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