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1화
“이건…….”
추길은 혜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마님께서 달거리를 안 하신 지 얼마나 됐지?”
혜연도 엽연채의 몸 상태에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대답했다.
“지난달에… 안 하신 것 같은데.”
엽연채는 이미 달거리를 안 한 지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에도 주기가 불규칙한 적이 있었고 또 수주에 가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이 문제엔 다들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혜연은 엽연채가 동우산에서 넘어지고 뛰었단 사실이 떠오르자 낯빛이 확 변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자마자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아야겠다.”
“태의를 모셔와 진찰을 받는 게 낫겠어!”
추길이 얼른 말했다.
“수주에서 다쳐서 돌아왔을 때 의원을 불렀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아무것도 진단해 내지 못했잖아. 태의가 더 신뢰가 가지.”
추길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 태의를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진서후부에는 여주인인 엽연채밖에 없는 데다 병이 깊은 것도 아니니, 이 시각에 갑자기 사내를 집으로 불러 방에 들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님.”
혜연은 엽연채를 부축했다.
“일단 침상으로 가서 쉬세요.”
“그래.”
엽연채는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위가 비어 있기 때문에 속이 조금 아팠지만 그보다는 메스꺼운 느낌이 미친 듯이 올라와 온몸에 힘이 쭉 빠질 정도로 괴로웠다.
전에 그녀도 자신이 언제쯤 회임을 하게 될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하지만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정신이 없어 자신의 몸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아이에 대한 생각이 들자 엽연채는 심경이 복잡하면서도 괴로웠고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기대가 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한편, 혜연은 안절부절못했다. 며칠 전 수주에서도 의원을 불러 엽연채를 진찰하게 했는데 회임의 징후가 있는 맥박을 짚어 내지는 못했다. 지금도 그저 위장이 아픈 것일지도 모르니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엽연채는 그저 침상에 누운 채로 날이 밝을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혜연과 추길 또한 매한가지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아침이 오자 추길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고 혜연은 물을 길어 와 엽연채가 씻는 걸 도와줬다.
새벽녘의 일을 모르는 청유와 매화 등은 밖에서 새에게 모이를 주고 회랑을 닦고 있었다. 이때, 추길이 태의를 데리고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언니, 왜 이른 아침부터 태의를 모셔온 거예요?”
하지만 추길은 대꾸 없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태의는 추길과 방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름답지만 안색이 창백한 젊은 부인이 탑상에 앉아 있었다. 태의는 그녀가 바로 진서후 부인임을 알아보고 얼른 인사를 드렸다.
“이 늙은이가 진서후 부인을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일어나시게.”
엽연채는 손을 살짝 들어 인사를 받았다.
혜연은 팔목을 올려 두는 작은 받침대를 가져와 한쪽의 항탁 위에 놓았다. 엽연채의 새하얀 손목은 그 작은 받침 위에 올려졌고 손목 위에는 얇은 담홍색 손수건이 덮였다.
태의는 그제야 실례하겠다고 말한 후 엽연채의 손목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잠시 후, 그는 축하의 말을 꺼냈다.
“부인, 감축드리옵니다. 맥이 약하기는 하나 확실히 회임하신 게 맞습니다.”
“아……!”
그 말에 추길과 혜연은 놀랍고도 기뻐했고 추길은 다급히 물었다.
“며, 몇 개월입니까?”
“3개월이네. 부인의 몸이 약해져 있어 진단하기 어려웠던 거네.”
“천지신명께 감사하나이다!”
태의의 대답에 추길은 흥분해서 자리에서 팔짝 뛰어오를 지경이었다.
“하늘이시여. 이제서야 주셨군요!”
혜연도 두 손을 모으며 감격했다.
엽연채는 추길이 기뻐하며 태의에게 재잘재잘 말을 붙이는 모습을 보더니 손을 살포시 자기 배 위에 올려놓았다. 마침내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선 온갖 감정이 교차했고. 마음이 따뜻해지면서도 또 너무나 괴로웠다. 이렇게 되면 주운환은 곧 첩실을 들일 것이었다.
그녀는 추길을 쳐다보며 노교아를 떠올렸고 이어 동우산의 그 산굴이 생각났다.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산굴 안에서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난 온몸이 진흙투성이라 꼴이 말이 아니었지.’
찬 기운을 풍기며 등장한 자신은 마치 그들만의 오붓한 세계에 갑자기 들이닥친 불청객 같았다. 아름다운 만남을 방해하고 그들의 연분을 망친 것만 같았다.
자신은 가만히 도성에 머물렀어야 했다. 수주에는 도대체 왜 갔단 말인가.
그랬다면 주운환과 노교아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등장 때문에 난처해하지 않았을 거고 육체적인 관계를 이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주운환은 깨어났을 때 그녀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을 것이다.
자신은 얌전히 집에 앉아 있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주운환이 도성으로 귀환할 때 기나긴 대열의 뒤쪽에 조그만 가마 하나가 함께 따라왔을 것이다.
그럼 자신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상대의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을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고 그러한 식으로 인연도 맺었으니 부군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내가 나서서 자네를 집안으로 들였을 걸세.”
이는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자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고 온 세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이었다.
엽연채 스스로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집안에선 이렇게 그녀를 교육했다. 어떻게 해야 어진 부인이 되고 어떻게 해야 좋은 아내가 되는지 말이다.
시집을 가면 정성껏 남편을 섬기고 아이를 갖게 되면 자발적으로 나서 남편을 위해 첩실을 들여야 했다.
임신 문제를 떠나서도 남편에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인이 생기면 먼저 나서서 그녀를 첩실로 들이고 웃는 낯으로 축하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남편의 첩실과 형님, 동생 하면서 다감하게 자매로 지내야 했다.
엽연채는 출가 전의 일은 이미 너무도 요원해서 마치 전생에서 일어난 일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온씨가 그녀에게 신신당부를 했었고, 또 그녀를 위해 남편의 총애를 붙들어 놓을 여종들을 준비해 뒀던 것까지 말이다.
그때는 두말없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분명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너그러운 마음으로 후원을 관장하는 현명한 부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랬다. 장박원에게 시집갔다면 분명 그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운환에게 시집을 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추길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태의에게 갖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고, 혜연 역시 기뻐하며 그 대화를 듣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런데 엽연채가 한눈에도 실의에 빠져 있는 게 아닌가.
“마님?”
혜연이 깜짝 놀란 소리를 내자 추길도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봤고 이어 혜연과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수주에서 돌아올 때 있었던 일과 엽연채의 회임을 엮어서 생각해 보더니 엽연채가 첩실을 들이는 일 때문에 심란해하는 줄 알아챘다.
추길은 저도 모르게 조금 허둥대며 화제를 바꾸었다.
“마님, 처음 회임을 하셔서 두려우신 거죠? 저희가 얼른 이 좋은 소식을 자당께 전하겠습니다! 기뻐하실 거예요.”
멍한 표정을 짓던 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당께 이리로 오시라고 말씀드려.”
“내가 직접 가서 모셔올게.”
말을 마친 추길은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 매화를 불렀다. 두 사람은 경인에게 마차를 몰게 했고 잠시 후 장명가의 추씨 가문에 도착했다.
마차는 추씨 가문 수화문에 멈춰 섰고 추길과 매화가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어멈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어머? 추길이 아니니?”
“네!”
추길은 미소를 지으며 온씨를 찾았다.
“마님은 집에 계시죠?”
“그래.”
어멈이 고개를 주억이자 추길은 매화를 끌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마님! 마님!”
본채의 발이 촤르륵 소리를 내며 걷히더니 채 마마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잖아도 마님께서 너희 생각을 하고 계셨는데 어찌 알고 이렇게 왔구나. 무슨 일이냐? 아씨께서 돌아오신 게냐?”
“네!”
추길은 빠른 걸음으로 이미 계단을 올라섰다. 채 마마가 방한용 문발을 걷어 주자 추길은 안으로 들어서면서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마침 두 사람을 본 온씨가 손에 들고 있던 낙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연채가 집에 돌아온 것이냐?”
“감축드립니다, 마님!”
추길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 마님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뭐라고?”
온씨와 채 마마는 모두 깜짝 놀랐고 온씨는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회임을 했다고? 연채가 회임을 했단 말이냐?”
“예!”
추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의가 3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말…….”
온씨는 감격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고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팍을 두드렸다.
“드디어… 드디어 회임을 했구나.”
그녀가 이 문제로 그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건 하늘만이 알 것이었다. 온씨는 진서후부에 갈 엄두도 잘 안 났고 친척들과 왕래하는 것도 꺼려했었다. 주운환과 주씨 가문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걱정이 됐고, 사람들이 엽연채가 불임이라고 비웃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엽연채는 혼인한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갔다. 엽이채는 그녀보다 늦게 혼인했는데도 아이가 곧 있으면 걸음마를 배우고 온남아의 아이는 태어난 지 만 한 달이 코앞이었다. 심지어 엽영교도 하루가 다르게 배가 불러 왔다.
온씨는 애간장을 졸였다. 이러다 엽영교의 아이가 태어나고 주묘서마저도 아이가 생겼는데 엽연채에게는 여전히 소식이 없을까 봐, 그 생각만 하면 잠이 다 달아났다.
그런데 오늘 이런 희소식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온씨는 자신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매화가 작게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못 믿으시겠으면 어서 진서후부로 가셔서 저희 마님을 한번 꼬집어 보세요. 마님께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시는지 아닌지 보시면 되죠.”
“너도 참!”
온씨는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나무랐다.
“너희 마님은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됐으니 매사에 조심해야 하는데 나보고 꼬집으라고 하다니. 혼 좀 나야겠구나.”
그녀는 짐짓 화난 척 매화의 팔을 두어 번 톡톡 때렸고, 매화는 ‘아이고’ 하며 엄살을 부렸다.
“마님, 너무하세요. 저희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러 온 건데 상을 받기는커녕 매를 맞아야 하다니요.”
그녀의 너스레에 온씨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상을 주마. 채 마마는 가서 은덩이를 가져오게. 그리고 가는 김에 내 피풍도 가져오게. 진서후부에 가야겠어.”
“마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준비는 다 마쳤습니다.”
채 마마는 침실에서 걸어 나오며 미소를 지었고 그녀의 손에는 온씨의 짙은 회색 피풍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