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9화
이튿날 이른 아침, 주운환은 엽연채를 데리고 아침 식사를 한 뒤 바로 문을 나섰다.
혜연은 엽연채와 주운환이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자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엽연채는 창틀에 기대어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고, 한쪽에 앉아 수를 놓고 있던 혜연은 온종일 그곳을 떠나지 않는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정오가 되어 주운환이 돌아오자 엽연채는 뛸 듯이 기뻐했다. 주운환은 그런 그녀를 데리고 방에 가서 식사를 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내일 난 칭주에 가야 하니 부인은 먼저 도성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드리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주운환은 엽연채가 의기소침해지자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감싸 쥐며 사정을 설명해 줬다.
“비적 떼의 두목은 이미 생포했지만 아직 이인자는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그자도 영향력이 있는 편이라 이번에 처리하지 못하면 후환을 남겨 두게 되는 셈이지요.”
그제야 엽연채는 반짝거리는 매력적인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알겠어요.”
“내 말에 따라 줘서 고맙습니다. 여양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부인을 도성까지 바래다주라고 하지요.”
주운환은 말을 끝내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양은 부군 곁에 남겨 두는 게 좋겠어요. 사람들 몇 명만 붙여 주면 돼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엽연채의 거절을 주운환이 다시 거절했다.
“칭주 쪽에는 이미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어 병력이 충분하니, 이 일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지요. 정초 전에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운환은 그녀에게 음식을 집어 줬다. 그렇게 함께 식사를 마친 후 둘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운환은 여양과 소전에게 상인으로 변장해 엽연채를 보호해 성 밖으로 나가라고 지시했다. 자신도 그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갔고, 칭주와 도성으로 나뉘는 갈림길에 도착하자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엽연채가 타고 가는 마차는 주운환이 특별히 구한 것이라 속도가 빨라도 흔들리지 않고 아주 편안했다. 또 마차 벽에 작은 서랍이 여러 개 달렸는데, 주운환이 안에 간식거리와 말린 과일도 넣어 두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기운 없이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 부드러운 베개를 안고 있었다. 제민과 청유는 그런 엽연채의 모습을 보더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 조용한 마차 안과는 달리 마차 밖은 소란스러웠다. 여양과 소전, 평해는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었고 평범한 백성들로 변장한 주씨 가문 병사들이 두 줄로 서서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도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보게, 여양. 들어 보니 아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고 하던데.”
평해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모처럼 가까이에서 나리의 늠름한 풍모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소문만 듣게 됐어.”
그는 그리 말하며 서운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옥안관에 있었을 때는 이번보다 위험한 상황이 더 많았는걸요.”
여양이 그런 그를 달래듯 대답했다.
“그런데 그 마 지부라는 사람, 참 음험하고 악독하네요.”
마차를 몰며 대화를 듣고 있던 경인이 흥미로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맞아요!”
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자가 우리 나리가 어떤 출신인지는 몰랐던 거죠. 우리 나리는 장군이 되기 전에 장원이셨어요! 그런데 우리 나리를 상대로 잔꾀를 부리다니! 하하하!”
그 말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는 소탕이 내년까지 길어질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이렇게 그 비적들을 일망타진하고 집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내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소전이 이리 말하면서 끄트머리에 노교아를 언급했다.
“나리야 당연히 지혜롭고 높은 식견이 있는 분이시지만, 그 노씨 낭자도 정말 적잖은 도움을 줬어요.”
“노씨 낭자요?”
평해는 처음 듣는 인물에 관심을 보이며 머리를 쭉 내밀었다. 그러자 소전은 노교아가 약초를 주고 주운환을 구해 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 주더니 또 이렇게 덧붙였다.
“그 낭자가 없었다면 나리와 여한 형님은 아마 유명을 달리하셨을지도 몰라요. 그때 그 낭자가 정말 용감하게 행동해 준 덕분이죠!”
“어떻게 했는데요?”
평해가 얼른 물었다.
“그때 저희가 그 낭자에게 잠시 후 산에 올라가 비적 떼를 잡을 거라고 알려 줬거든요. 보통의 낭자였다면 진작에 달아났을 텐데 그 낭자는 그러지 않았어요. 뱀을 유인하고 피하는 비결을 말해 줬을 뿐만 아니라 저희가 약초를 제대로 쓰지 못했을까 봐 다시 돌아왔더라고요.
저희를 위해 비적 떼와 맹호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되돌아온 거죠. 결국 그 낭자 덕분에 나리와 여한 형님도 살 수 있었고요.”
“와……!”
소전의 대답에 평해는 작게 감탄했다.
행렬의 다른 사람들도 흥미진진하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이런 염문설 같은 것은 사람의 말초적인 흥미를 크게 유발하는 법 아닌가.
“아유, 그럼 미녀가 영웅을 구한 건가?”
평해는 웃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런데 방금 전에 노씨 낭자가 나리의 옷을 전부 벗겼다고 했잖아. 하하하하. 남녀가 살을 맞댔으니 이거 어떻게 정리해야 되는 거야?”
그러자 여양은 농담 섞인 말투로 그를 나무랐다.
“그 낭자는 의원이었어요! 급한 상황이었으니 융통성 있게 행동한 거죠.”
“그러게 말이에요. 굳이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아예 집안으로 들이면 되죠.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요.”
소전이 웃으며 이리 말을 받자 사내들은 전부 떠들썩하게 웃어댔다.
이때, 마차의 발이 확 걷히더니 제민이 머리를 내밀고 큰 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왜 이렇게 요란한 것이냐? 그리 웃어대는데 우리가 쉴 수 있겠느냐?”
여양과 평해 등은 전부 표정이 확 굳어졌고 문득 그들의 안주인이 이곳에 계신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녀는 주운환의 아내였다.
첩실을 들이는 건 사내들에겐 지극히 평범한 일이지만 여인들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릴 것이다. 더군다나 코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으니 엽연채는 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저 말 한마디 꺼낸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 대고 노골적으로 호통을 치다니, 참 기품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찌 됐든 간에 그 낭자는 주운환을 구한 사람이었다. 언급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엽연채가 직접 나서서 그녀를 집으로 데려오는 일 역시 지극히 이치에 맞았다.
평해와 소전을 포함한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엽연채의 도량이 너무 좁고 옹졸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저러면서 무슨 후부의 적녀란 말인가!’
개중 가장 불만스러운 사람은 소전이었다. 노씨 낭자는 주운환을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이고 여러 병사들도 그녀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에 반해 엽연채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괜히 찾아와서 폐만 끼쳤고 주운환의 상처가 더 악화되었다.
요 며칠 동안 주운환은 아프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상처가 심했다. 약을 다시 바를 때 보니 상처가 곪아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도 그는 엽연채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소전은 고삐를 당겨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곤 마차의 창문 쪽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마님, 저희는 그저 농담을 주고받은 겁니다. 그날 마님과 나리께서 돌아가신 후 제가 나리를 대신해 그 낭자에게 답례로 은화를 줬습니다. 그런데 그 낭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고요.”
이 말인즉슨 노교아는 순박한 사람이고 주운환에게 들러붙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순전히 엽연채가 소인배의 마음으로 군자의 속을 헤아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만약 지금 엽연채가 화를 내며 방금 노교아를 첩실로 들인다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게 되면, 그녀는 상대를 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스갯소리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소전은 마차 안을 힐끗 쳐다봤는데 창가에 앉은 제민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엽연채는 가운데에 앉아 있었는데, 곱고 아리따운 작은 얼굴이 빛을 받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다.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소전에게 냉담한 눈빛을 보내더니 이렇게만 대꾸했다.
“음, 그래서?”
소전은 말문이 막혔다. 예상치 못한 반응인지라 순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그에 한 박자 늦게서야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다.
“참, 요 앞이 그 낭자가 사는 마을입니다. 그 낭자가 나리를 구해 줬으니 마님께서 들르셔서 감사 인사를 전하면 어떠세요?”
“부군이 우리와 수주로 돌아간 후에 그곳에 가 보셨느냐?”
엽연채의 동문서답에 소전은 어리둥절해하며 대꾸했다.
“나리께서는 공무로 바쁘셔서 가 보실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럼 그쪽에 어찌하라고 분부하셨느냐?”
“나리께서는 저희에게 은화를 주시면서 제대로 사례하라고 하셨습니다.”
소전은 생명의 은혜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엽연채의 모습을 보더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어쨌든 그 낭자는 나리를 구해 준 생명의 은인입니다. 저 앞에 살고 있으니…….”
엽연채는 소전을 쓱 쳐다보며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부군은 야박한 사람이 아니시니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을 하셨을 것이다. 안 그러느냐?”
소전은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한 말은 틀림이 없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부군이 직접 가서 그 낭자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않으신 건 부군만의 어떤 생각이 있어서 그러셨을 게다. 그런데 내가 부군의 생각을 저버리며 쓸데없는 일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소전은 말문이 닫혔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후 이렇게 말했다.
“나리께 뭐 특별한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그건…….”
“그래, 그럼 네가 가서 직접 여쭤보거라!”
“맞아. 네가 가서 여쭤보거라!”
엽연채는 웃음을 지었고 제민은 소전을 노려보며 창문의 발을 아래로 확 내렸다.
소전은 어안이 벙벙했다.
‘모든 문제를 나리께 전부 떠넘기다니!’
그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참아야 했다.
엽연채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과 의도는 전부 틀렸다.
‘교활하게 궤변이나 늘어놓다니!’
자신이 보기에 주운환이 가지 않은 건 주운환이 군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낭자는 순박하고 고결한 품성을 가진 사람이며 주운환과 살을 맞댄 사이이니, 주운환과 다시 만나게 되면 당연히 난처해할 것이다.
주운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군자가 해야 할 행동이었다. 하지만 엽연채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녀는 주운환을 대신해 그 낭자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따지자면 아예 보살펴 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이는 현명한 부인의 마땅한 도리일진대, 엽연채는 되레 주운환이 가진 군자의 마음을 이용해 궤변 따위나 늘어놓으니 진정 소인배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녀와 논쟁을 하게 되면 부부 사이를 이간질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었다. 게다가 주운환의 집안일인지라 지나치게 간섭하기도 곤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