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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57화 (557/858)

제557화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정교하게 꾸며진 방 안, 부드러운 침상 위에 누운 채였다. 침상 양쪽엔 하얀색 얇은 휘장이 살짝 걷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방 안에는 은사탄銀絲碳이 타고 있어 훈훈한 공기가 감돌았다.

엽연채는 천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사지가 풀린 듯한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러자마자 두 다리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때마침 혜연이 놋쇠 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가 눈을 뜬 모습을 보더니 무척이나 기뻐했다.

“마님, 깨셨군요!”

그녀는 황급히 앞으로 다가갔고, 손에 들고 있던 놋쇠 쟁반을 붉은 칠을 한 세검가자 위에 올려놓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있니? 가서 의원을 모셔와.”

누군가가 알겠다고 대답하자 혜연은 침상 옆에 앉더니 엽연채를 이리저리 살폈다.

“마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프신 데는 없으세요? 불편하신 데는요?”

엽연채는 끙끙거리며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다리뿐 아니라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런 그녀를 보고 혜연은 눈시울을 붉혔다.

“마님, 어째서 갑자기 뛰쳐나가신 거예요……. 저희한테 약까지 먹이시면서요.”

혼돈을 먹었던 그날 밤, 혜연은 갑자기 의식을 잃었고 이튿날 이른 아침이 돼서야 청유와 함께 정신이 들었다. 얼마 안 가 엽연채가 실종됐음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초조한 나머지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쯤 되었을 때, 주씨 가문 병사들이 우르르 이곳으로 돌아왔다.

혜연과 청유는 온몸이 진흙투성이인 엽연채와 제민을 보더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엽연채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두 사람은 엽연채와 제민을 데리고 들어가 씻긴 다음 방 안에 눕혔다. 바삐 움직여 의원을 불러 약까지 처방 받고 나니 어느새 한나절이 지난 후였다.

“으……. 하루를 꼬박 잤더니 배가 고프구나.”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배를 움켜잡았다.

“하루가 아니에요. 이틀 내내 주무셨어요.”

혜연을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혜연은 얼른 밖으로 나가더니 청유를 불렀다.

잠시 후, 청유는 쟁반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쟁반 위에는 제비집과 대추가 들어가 닭죽 한 그릇, 찐 교자 한 접시, 수정고水晶糕 한 그릇이 올려져 있었다.

엽연채는 여전히 마음이 몹시 답답했지만 일단은 뱃가죽이 등에 붙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죽과 찐 교자를 단숨에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 허기진 모습을 본 혜연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죽 한 그릇과 소룡포 몇 개를 더 가져다줬다. 엽연채는 그것 역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는데, 먹고 나니 너무 과식했는지 조금 부대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화 같은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부군은?”

혜연은 청유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에 입을 뗐다.

“나리와 마님은 함께 들것에 실려 오셨어요. 나리께서도 정신이 든 지 얼마 안 되셨는데, 방금 전에 밖으로 나가셨어요.”

“부군은 산에서… 어떻게 된 거니?”

혜연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이 돌아오신 후에 저희는 두 분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여쭤볼 기회가 없었어요. 지금 여한이 밖에 있으니 안으로 불러서 물어보겠습니다.”

“여한?”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여한도 중상을 입지 않았느냐?”

“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한이 밖에 있는 건 확실히 봤습니다.”

“그럼 안으로 부르거라.”

“예.”

혜연은 바로 대답하고 방을 나섰고, 그동안 청유는 옷장으로 걸어가 엽연채가 입을 옷을 꺼내 왔다.

엽연채는 매화 절지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상의에 오밀조밀한 매화 문양이 들어간 하얀빛을 띤 노란색 마면군을 입었다. 청유는 소매 없는 두꺼운 진홍색 피풍을 걸쳐 줬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놓은, 두루미가 목을 길게 빼고 있는 문양이 들어간 작은 손난로도 손에 쥐여 줬다.

“흐읍!”

엽연채는 바닥에 발을 디디자 통증이 느껴져 신음성을 냈다. 그에 청유는 얼른 허리를 굽히며 자신에게 업히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엽연채를 업고 밖으로 나가더니 동쪽 낭하에 놓인 기다란 나무 걸상에 앉혀 주었다.

엽연채는 따스한 햇살을 쐬다가 고개를 돌려 청유에게 물었다.

“참, 민이는?”

“제민 소저는 어제 깨어나셨어요. 하지만 나리께서 돌아오셨으니 두 분과 한 처소에서 지내기는 건 곤란하다고 하셨어요. 또 마 지부와 그 식솔들을 전부 잡아넣었기도 했고요. 지금 맞은편 서과원에 있는 객방에서 머무르시는데, 가서 모셔올까요?”

“괜찮다.”

청유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이도 지금 나보다 더 나을 게 없는 상황일 게다. 쉬게 놔두렴.”

“예.”

청유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여한이 혜연의 뒤를 따라 이곳으로 걸어왔다.

“마님!”

“여한아, 너도 다치지 않았느냐? 그때 보니 산굴 안에 누워 있던데.”

엽연채의 질문에 여한은 당시가 생생히 떠오르면서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엽연채 앞에서는 티 내지 않고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 금수의 발톱에 등이 좀 긁혔었죠. 심각한 상처를 입은 건 아닙니다. 외상은 별것 아니었는데 그때 하필 또 독사가 달려들어서요. 독 때문에 의식을 잃었던 것뿐이라, 하산한 뒤 하루 종일 약을 마셨더니 이제는 괜찮습니다. 다행히 체내에 빠르게 흡수되긴 하지만 해독도 빨리 되는 독이었어요.”

“마 지부가 부군과 너에게 독사를 유인하는 연기를 쐬게 했다더니, 그것 때문에 뱀에 물린 모양이구나.”

엽연채가 물었다.

“사실 미리 대비했습니다.”

여한이 말했다.

그때 여한은 주운환과 함께 비적들을 추격해 동우산에 갔고 비적들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숲은 울창하고 병력은 부족하니 비적들은 손쉽게 도망칠 수 있었다. 이들을 또 도망치게 한다면 소탕에 얼마나 더 시간을 소모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욱휘와 황광수는 확실히 수완이 좀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수년 동안 대제에 환란을 가져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주운환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그저 산을 포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에 주운환은 관아로 사람을 보냈다. 여양과 마 지부에게 머릿수가 더 필요하니 병사들을 이끌고 오라고 전하기 위해서였다.

주운환은 대제를 구한 영웅이자 변방에서 온 힘을 다해 대세를 만회한 장군이었다. 도적들이 산으로 도망치는 걸 보고도 상황과 환경을 따지지 않고 불나방처럼 곧장 산속으로 뛰어드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옥안관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마 지부가 오기 전, 주운환은 사람을 시켜 동우산을 정찰했다. 게다가 그 비적들이 도망친 것도 어딘가 수상했다. 북쪽으로 도망치면 더 안전할 텐데 하필 남쪽으로 도망쳤으니 말이다.

부리나케 도망가느라 길을 가릴 겨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사전에 어떤 모의를 한 걸까? 둘 중 어떤 상황이든 간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하며 제대로 조사해야 했다.

이때, 멀리서 파란색 옷을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한 소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등에 대바구니를 매고 있었고 은은한 약 냄새가 그녀에게서 은근히 풍겼다. 보아하니 약초를 채집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여한은 소녀를 막아서며 질문을 던졌다.

“이봐요, 뭐 좀 물읍시다. 우리 장군님이 비적들을 추격하시다가 이곳에 오시게 되었는데, 그 비적들이 앞에 보이는 저 산으로 들어갔소. 혹시 산에 뭐 주의할 만한 거라도 있소?”

그 소녀는 눈을 들어 앞을 쳐다봤다.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한 청년 장군이 검 한 자루를 눈 속에 박아 놓고 커다란 손을 그 칼자루 위에 올려놓은 채 늠름한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 청년 장군은 외모가 견줄 데 없이 수려했고 날카로운 눈썹에선 차갑고 맹렬한 기운이 느껴졌다. 또 붉은 갑옷을 입고 있어 고고하고 오만한 분위기가 한층 더 부각됐다.

소녀는 잘생기고 위엄 넘치는 그의 모습을 감히 오랫동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하며 여한에게 자신이 아는 바를 들려주었다.

“군인 나리, 이 산엔 원래 뱀과 곤충, 쥐와 개미가 가득한데 지금은 한겨울이라 이런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들어 보니 어디선가 맹호 한 마리가 나타나 산으로 들어갔다고 하던데,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조심하셔서 나쁠 건 없겠지요. 그리고 또 하나 나리들께서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이 산에는 적명사라고 불리는 뱀이 있습니다. 지금은 음력 섣달이라 동면하고 있지만, 벽락초라는 풀을 불에 넣고 태워 그 연기가 몸에 묻게 되면 적명사들이 냄새를 맡고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도 있단 말이오?”

여한은 크게 놀랐다.

“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메고 있던 대바구니를 등에서 내리더니 그 안에서 녹색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벽락초는 뱀을 유인하지만 이 월견초月見草는 반대로 뱀이 사람을 피해 가도록 해요.”

이때, 차르랑차르랑하는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운환이 소녀의 앞으로 걸어와 몸을 쭉 펴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물었다.

“어째서 이런 약초를 가지고 있는 건가?”

“전 앞에 있는 남가요南家坳에 사는 촌민이고 저희 아버지는 이 마을의 낭중郎中(의원)이십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약리藥理를 배웠고, 부친과 함께 적명사를 잡아 녀석들의 쓸개를 꺼내 약재로 팔고 있습니다. 그래서 뱀을 유인하고 물리치는 약초들을 평소에 채집하고 있고요.”

여한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 주운환이 조그만 은덩이를 꺼내더니 소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약초를 우리가 사겠네.”

그 소녀는 일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얼른 은덩이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대바구니를 등에 멨다.

“이 약초는 그렇게 값나가는 게 아닙니다. 근처에 있는 연못가에 수두룩해요. 촌민들이 이 약초의 효능을 잘 모를 뿐입니다. 장군님께서 비적 떼를 잡는 것도 저희 백성들을 위해서인데 저희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약초는 저희의 생계 수단이니 부디 다른 사람에게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알겠네.”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소녀는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여한은 그 소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감탄사를 뱉었다.

“참, 정말 순박한 촌민이네요.”

주운환이 동의의 뜻으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자 여한이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나리, 이 약초들은 사서 뭘 하시려는 겁니까?”

“만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우선 보관해 두거라.”

주운환은 이렇듯 늘 매사에 철저히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마 지부가 뜻밖에도 인근 마을에 가자고 제안했다. 큰일을 앞둔 상황에서 갑자기 환영회를 열어 주겠다는 게 아닌가. 주운환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그는 고집을 부리며 그럼 야생 동물이라도 잡아 구워 먹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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