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한편, 산굴 안에서 의식을 잃고 있던 주운환은 갑자기 깜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꼭 엽연채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고 멀리서 누군가가 우는 듯한 소리도 들려왔다.
주운환은 벽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가 산굴 입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희끄무레한 하늘 덕분에 저 멀리 조그만 체구를 가진 한 사람이 가랑비를 맞으며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뒷모습을 알아본 주운환은 중상을 입은 몸도 개의치 않고 재빨리 산비탈을 굴러 내려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엽연채는 마음과 달리 막상 그렇게 멀리까지 가지 못했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부인!”
엽연채가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주운환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닦으며 계속 걸음을 재촉했으나 주운환이 이미 그녀를 따라잡은 후였다.
주운환은 그녀의 손을 확 잡아끌더니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부인, 어떻게 여기 있는 겁니까? 대체 어떻게 왔어요?”
엽연채의 얼굴엔 진흙이며 때가 잔뜩 묻어 있었는데 거기에 눈물까지 훑고 지나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입술을 물며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까지 더해지니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지경이었다.
주운환은 이런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너무도 아파 그녀를 자신의 품에 확 끌어안고 얼굴을 감쌌다.
“부인, 부인… 왜 우는 겁니까? 울지 마십시오…….”
그는 엽연채를 달래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녀가 어떻게 이곳에 온 건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선가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주운환은 방금 전 산굴에서의 상황이 떠올랐고 가슴 아프게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그의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그녀였어도 가슴이 갈가리 찢어졌을 것이다. 숱한 고생을 무릅쓰고 겨우 배우자를 찾아냈는데 그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말이다.
“미안합니다. 내가 부인 마음을 아프게 했군요. 하지만 그 소저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엽연채는 주운환의 사과를 듣더니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어 그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겁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 주운환은 맥없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부군?”
그녀도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밤새도록 누적된 피로가 갑자기 그녀의 몸을 덮쳐 오는 듯했다. 그녀의 가냘픈 몸으론 주운환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그를 껴안은 채 함께 바닥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으…….”
엽연채는 주운환이 자신에게 눌리지 않게, 몸을 일으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가 워낙 꽉 부둥켜안고 있는 탓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들어 보니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아마도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이미 여명이 밝아 온 후였으나 가랑비는 아직도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어!”
이때, 누군가가 깜짝 놀라 낸 외마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니 주씨 가문 병사들의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뛰어오고 있었다. 바로 소전이었다.
“나리! 나리!”
소전은 엽연채를 끌어안은 채 쓰러져 있는 주운환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고 얼른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제야 주운환의 손이 풀어졌다.
가까스로 주운환의 품에서 벗어난 엽연채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만 넋이 나가 버렸다.
주운환은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팍까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상처 부위도 검게 변해 있으며 입술 또한 살짝 검푸른 색을 띠고 있었다. 중독된 게 틀림없었다.
“나리께서 다치셨습니다.”
소전은 이 상황을 보고 있으니 초조함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어제 저희가 산에 올랐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나리께 상처를 입혔고, 또 뱀이 물어 독에 중독되셨습니다. 다행히도 그때 한 낭자가 나타나 나리와 여한 형님을 구해 줬습니다…….”
엽연채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부상자가 어떻게 이런 날씨를 견딜 수 있겠는가? 불이 있는 그 산굴로 당장 돌아가야만 했다.
엽연채가 주운환을 부축해 일으키려고 하자 소전이 얼른 그녀를 도왔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주운환은 통증 때문에 정신이 들었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더니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크윽, 부인…….”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또다시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오듯 눈물을 흘렸다.
“부군… 움직이지 말아요.”
움직이면 통증이 심해질까 봐 걱정이 됐다.
“울지 마십시오.”
그러나 주운환은 제 상처는 거들떠보지 않고 엽연채부터 달랬다. 이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소전을 쳐다보며 분부했다.
“마무리하거라.”
소전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가 품속에서 뼈로 만든 호루라기를 꺼내어 힘껏 불자 휘익 소리가 길게 울리며 먼 곳까지 전해졌다. 그러자 저 멀리 떨어진 울창한 숲에서 푸르르 떨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숲속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밖으로 튀어나와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때, 또 다른 주씨 가문 병사 두 명이 달려왔다. 둘은 의식을 잃은 주운환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랐고 힘을 합쳐 그를 들어 올리더니 산굴 쪽으로 걸어갔다.
엽연채는 그들을 따라 그 산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는 여전히 모닥불이 타고 있었고 알고 보니 산굴의 가장 안쪽에 한 사람이 더 누워 있었다. 바로 여한이었다.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까 그 소녀가 여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인기척을 들었는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소녀는 조금 하얗게 바랠 정도로 깨끗이 세탁한 푸른색 솜옷 차림으로,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가슴 앞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옷과 같은 색깔의 푸른색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수수하고 청초했지만, 미간에서는 농촌 아이들 특유의 억척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녀를 보자 엽연채는 방금 전 그녀가 주운환을 안고 있던 광경이 또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그를 위해 상처를 치료해 주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소녀도 엽연채를 쳐다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저도 모르게 그녀를 쓱 훑어봤다.
엽연채는 꾀죄죄한 포졸 차림에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조그만 얼굴 역시 엉망진창이라 꼭 진흙으로 만든 사람 같았다.
그 소녀는 엽연채를 한 차례 훑어보더니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전과 주씨 가문 두 병사가 주운환을 산굴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소저, 어서 이리로 와서 나리의 상태를 좀 봐 주시오.”
소전이 다급한 목소리로 찾자 노교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쿨럭……! 그럴 필요 없다.”
주운환은 고개를 있는 힘껏 가로저었다.
“이 정도로 안 죽는다.”
그는 그리 말하며 또 소전을 쳐다봤다.
“하산하자!”
노교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전도 멍한 표정을 짓기는 매한가지였다. 주운환의 다친 정도를 볼 때 이곳에서 좀 더 머무르며 상처를 돌보는 것이 마땅했다. 필요하다면 제대로 된 의원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운환은 당장 떠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다. 소전은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기는 곤란해 노교아에게 이렇게만 물었다.
“여한 형님은 어떻습니까?”
“걱정 놓으셔도 됩니다.”
노교아는 그제야 첫마디를 꺼냈다. 차분함이 느껴지는 산뜻한 목소리였다.
“상황은 나쁘지 않습니다. 열만 내려가면 괜찮을 겁니다. 후야께서도 체내의 뱀독이 제거되었으니 돌아가서 몸조리를 잘하시면 되고요.”
엽연채는 주운환의 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제야 안도의 숨을 훅 내쉬었다.
이때, 누군가가 엽연채의 옷 뒷자락을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가 마구 헝클어지고 진흙투성이인 한 사람이 보였다.
“미, 민이야?”
“응.”
제민은 숨을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결국… 찾아냈구나. 어서 산을 내려가자!”
그때 멀리서 주씨 가문 병사들 네 명이 달려왔다. 그들은 주변의 나무와 등나무 줄기를 이용해 간단한 들것을 만든 다음 주운환과 여한을 그 위에 실었다.
주운환이 또다시 의식을 잃자 일행은 황급히 산굴에서 나왔다.
앞에는 주씨 가문 병사들이 무려 네 줄로 서 있었는데 족히 2백 명은 되어 보였다. 다들 온몸이 진흙투성이라 행색은 말이 아니었지만 엄숙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어 조무래기 같은 느낌은 전연 없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대여섯 명이 포승으로 묶여 있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기분이 침체된 탓에 자세히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주운환이 산굴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전부 그를 따라 질서정연하게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기슭에 도착하자 마 지부 등이 보였고 여 비장과 포졸들도 그 자리에 같이 묶여 있었다.
“아아! 나리!”
이때, 준마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말에 탄 사람은 여양이었고 그의 뒤로 한 무리의 병사들과 마차 한 대가 따라왔다.
여양은 쿵 소리를 내며 말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주운환에게 달려왔다.
“나리? 나리! 흑…….”
“여양 형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리는 무사하십니다. 어서 수주로 돌아가시죠.”
소전이 말했다.
“그걸 누가 몰라?”
여양은 그를 쏘아봤다.
“어서 움직여라.”
그러자 사람들은 우르르 달라붙어 주운환과 여한을 마차에 태웠다. 그런 후에야 여양은 흙투성이인 두 여인이 한쪽에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고,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님과 제민 소저? 아니, 두 분이 어떻게 이곳에 계시는 거예요?”
“말하자면 기니 수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예, 어서 수주로 돌아가시죠.”
제민의 대꾸에 여양은 서두르며 동조했다.
“어서 마차에 오르세요.”
주운환과 여한이 쓰러졌으니 여양이 사람들을 이끌었고 기병대는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마 지부와 산에서 붙잡힌 일당들은 말 뒤꽁무니를 쫓아 뛰어갔다.
마차 안에 앉은 엽연채는 깨끗한 손수건으로 주운환의 얼굴에 묻은 진흙 따위를 조금씩 닦아 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조금 떨리면서도 바윗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고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밖을 내다봤다. 방금 전 머물렀던 산기슭에 노교아라는 소저가 소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차는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모습은 엽연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