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5화
여 비장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얼른 코를 매만지며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마 지부 옆에 포박된 포졸 한 명을 마구 때렸다. 흠씬 두들겨 맞은 포졸은 뱀을 유인한 일, 산에 맹호가 나타난 일 등을 전부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는 이들이 꾸민 이 음험하고 악랄한 계책을 듣더니 정말로 막으려야 막을 수 없는 위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명사만 나타나도 주운환에게는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일 텐데 갑자기 맹호까지 나타났으니 말이다.
“전부 나와 함께 산에 오른다. 진서후를 찾아내거라.”
엽연채는 냉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으나 두 눈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여 비장은 몸을 떨었고 안색이 계속 바뀌었다. 올라가자니 산 위에 큰 호랑이가 있다지 않은가.
그렇게 그가 망설이는 사이, 엽연채는 이미 앞장서서 산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 비장의 낯빛이 확 변했다. 어린 여인도 망설임 없이 산으로 향하는 판에 자신이 가지 않으면 어떻게 보이겠는가.
“가자! 부인과 함께 산에 올라가 후야를 찾을 것이다.”
여 비장은 격양된 어조로 말하더니 이어 무공이 가장 뛰어난 몇 명을 끌어당겨 방패로 삼았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가고 나머지는 흩어져서 산에 오르거라.”
엽연채의 모습은 이미 숲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제민은 황급히 뒤를 쫓아가 그녀를 만류했다.
“너 밤새 고생했잖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안 가면 마음이 편치 않을 거야.”
엽연채는 단박에 거절하며 숨을 훅하고 내쉬었다.
그에 제민은 입을 살짝 오므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몸에 그 향낭을 차고 있으니 동면에서 깬 뱀들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건 그 호랑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밤중이고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몰려가며 손에 횃불도 들고 있었다. 호랑이가 정말 주운환을 해쳤다고 해도, 그때 병사들이 필시 힘을 모아 호랑이를 공격했을 것이다. 즉, 녀석 역시 상처를 입은 채 겁을 집어먹고 숨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조심하기만 한다면 산에 오르는 것 자체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성싶었다. 문제는 엽연채의 몸에 이미 무리가 왔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도성에서 출발할 때부터 그녀는 오는 내내 주운환의 안위를 걱정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게다가 무리해서 이동한 탓에 수주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미 바짝 야위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도 이렇게 한참을 고생했다. 엽연채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조차도 한 번에 이렇게 먼 길을 달려 본 적은 없었다.
제민은 가슴과 목에서는 여전히 따끔따끔한 통증이 느껴졌고, 두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쳐서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발바닥도 잔뜩 까져서 걸을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도 서 있기가 힘든데, 연채는 어떻겠어. 나보다 체력이 훨씬 약하니 지금 연채의 상황은 훨씬 심각할 거야.’
하지만 엽연채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듯 그저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지켜보던 제민은 이를 악물더니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부군! 부군!”
엽연채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주운환을 불렀고 횃불을 든 채 뒤를 따르던 포졸들도 잇달아 산으로 들어서며 그를 불렀다.
“진서후 대인!”
엽연채는 산비탈을 오르며 여러 번 넘어졌다. 극도로 지친 나머지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토도독, 토도독.
이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빗방울이 나뭇가지와 잎 사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얼어붙어 있는 그녀의 조그만 얼굴에 빗방울까지 떨어지자 살을 에는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이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빗방울이 점점 더 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 이런……. 망할. 비가 내리네……!”
갑작스러운 비에 난처해하던 제민이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연채야! 연채야……!”
고개를 돌려 보니 엽연채는 여전히 앞에서 산비탈을 오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제민은 기운을 짜내 그녀에게 달려갔다.
“연채야, 비가 내리니까 일단 돌아가자.”
이렇게 오랫동안 찾았는데도 도중에 다른 사람들의 주검만 봤을 뿐 주운환은 흔적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민은 십중팔구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그저 산비탈을 오르는 데만 집중했다. 덩굴을 잡아당기며 힘겹게 산비탈을 올랐다.
그런데 엽연채는 위로 올라서자마자 순간 빗물에 발이 미끄러져 다른 방향으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연채야!”
제민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고 얼른 산비탈을 올라갔다.
비탈을 따라 구르던 엽연채는 무언가에 턱 부딪치고 말았다. 커다란 바위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 물체는 조금 물컹거리는 듯했다.
엽연채는 뒤쪽에 있는 그 물컹물컹한 물체를 더듬어 봤다. 그때 마침 은백색 달빛이 비치자 누런 몸체에 검은색 줄무늬가 들어간 커다란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꺅!”
엽연채는 기겁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도망치려고 하는데 넝쿨에 발이 걸려 그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운 와중에도 무언가 의아했다.
‘호랑이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자 엽연채는 자리를 박차더니 달빛을 이용해 그 호랑이를 유심히 살펴봤다. 바닥에 쓰러진 호랑이의 몸 이곳저곳에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다란 창 하나가 호랑이의 주둥이에서 머리 뒤편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역시 녀석은 죽은 상태였다.
그러자 엽연채는 마음속에서 흥분이 밀려왔다.
“연채야!”
횃불을 든 제민이 산비탈 위쪽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쿵 소리를 내며 엽연채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빠졌다.
제민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엽연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랑비를 맞으며 비틀비틀 달려왔다. 그러더니 제민이 들고 있던 횃불을 홱 낚아챘다.
“내가 가져갈게.”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호랑이 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제민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엽연채를 따라갔고 이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엔 검은 얼룩무늬가 있고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커다란 호랑이가 있었는데, 몸 아래쪽에 응고된 새빨간 피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마 지부가… 자기가 산에서 내려오기 직전에 맹호가 부군을 공격하는 걸 봤다고 했잖아……! 여기 이 호랑이가 분명 그 호랑이일 거야! 근데 호랑이가 이렇게 죽었잖아. 그렇다면 부군은 아직 살아 계시다는 거지.”
횃불을 들고 그 호랑이를 유심히 관찰하며 말하는 엽연채의 쉰 목소리에 흥분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오늘 밤 주운환을 찾는 동안 그녀는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두려움이 자리했다. 독사와 맹호. 어떤 것이든 간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기에는 충분한 위험이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너져 내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를 악물고 그가 무사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마침내 희망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엽연채는 마치 자신이 다시 살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탈진 직전의 몸에도 무한한 힘이 생긴 성싶었다.
가만 보니 핏자국은 이곳에만 흥건히 남아 있는 게 아니었다. 발자국들이 한 방향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핏자국이 묻은 그 발자국들은 고작해야 대여섯 개밖에 되지 않았다.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하지만 어쨌든 방향을 알려 주는 발자국을 찾았으니 실마리는 생긴 셈이었다. 엽연채는 발자국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질주했다.
“어……!”
제민은 아직도 달려갈 힘이 남아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더니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허덕거리며 급히 그녀를 쫓아갔지만, 제민에겐 무한한 힘이 없어 거리가 속절없이 벌어졌다.
엽연채는 뒤쪽의 상황을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고 그저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동안 하늘에선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렸고 결국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횃불도 꺼져 버렸다. 그러자 엽연채는 아예 횃불을 집어 던지고 비틀거리며 어둠 속을 나아갔다.
발밑엔 지저분한 나뭇가지가 가득했고 눈서리가 반쯤 녹아 생긴 진흙탕도 있었다. 그 길을 헤치고 걷자니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듯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요동치는 마음과 그가 살아 있을 거라는 믿음은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저건……!”
엽연채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고 앞을 쳐다보더니 깜짝 놀랐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어스름한 노란 불빛은 흐릿하여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부군……!”
엽연채는 콧날이 시큰거렸고 빛이 반짝이는 방향을 향해 냅다 달려갔다.
“부군!”
빛은 점점 더 가까워졌고 점점 더 또렷해졌다. 분명 인위적인 불빛이었다.
산굴의 벽을 비추고 있는 불빛, 그 불빛은 바람이 불어서인지 가물가물했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 엽연채는 가까스로 근처에 도착했으나 또다시 험한 산비탈과 맞닥뜨리게 됐다.
“부군! 윽!”
그녀는 힘겹게 기다란 잡초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한 장丈(약 3m) 높이의 험한 산비탈 오르려니 산을 넘고 물을 건널 때보다 더욱 고생스럽고 멀게만 느껴졌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고 온몸은 차갑게 얼어붙었으며 잡아당기고 있는 들풀은 그녀의 손바닥을 베었다.
마침내 산비탈을 오른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따스한 불빛이 보였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보자 기쁨이 넘실거리던 그녀의 얼굴은 확 굳어졌다.
산굴 안에 피워진 모닥불. 그 옆에는 상반신을 탈의한 주운환이 그녀를 등진 채 한 소녀와 서로 껴안고 있었다.
반면, 그 아리따운 소녀는 엽연채를 마주 보고 있었다. 소녀는 갑자기 웬 사람이 기어 올라오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경악스러운 광경에 그녀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다가 이내 또 차갑게 식어 버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한 탈력감이 들면서 손이 미끄러지자, 엽연채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꺄악!”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산굴에서 멀어지기 위해 마구 내달렸다.
엽연채는 도저히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고 그 광경을 마주하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온갖 고생을 하며 그를 찾아냈는데 뜻밖에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난생처음 이렇게 먼 길을 달려왔고 이렇게 높은 산을 오르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건 다 주운환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가 해를 입었을까 봐, 그가 죽었을까 봐 염려돼 견딜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정말로 무너져 버렸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겨울비 속을 달려 주운환에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