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4화
작은 숲을 지나며 보니 어둠 속에서 저 멀리 위치한 커다란 산이 보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지만 소머리 모양의 산봉우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 있으면 도착한다. 다들 속도를 높여라!”
현재 위치를 가늠한 여 비장은 말채찍을 내리치고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 십여 마리의 준마가 말발굽을 들어 올리며 땅에 쌓인 눈을 잇달아 튀겼다.
동우산에 점점 더 가까워지자 저편 산 아래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모습이 보였다.
“워워!”
여 비장이 말고삐를 힘껏 당기자 말은 자리에 멈춰 섰다. 쫓아온 포졸들도 자리에 멈춰 서더니 몸을 굽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유, 드디어 왔구나!”
누군가의 흥분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와 제민은 가슴을 움켜잡은 채 밭은 숨을 내쉬다가 낯선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가슴 앞쪽 흉배에 흰 꿩 문양이 들어간 두꺼운 관복을 입고 머리엔 관모를 쓴 작고 퉁퉁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왔다.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이 작자가 바로 수주의 마 지부, 즉 주운환을 해하려는 계략을 꾸미는 잡놈이었다.
‘대체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걸까?’
여 비장 등은 얼른 말에서 내리더니 포졸들을 전부 이끌고 마 지부를 향해 예를 올렸다.
“소관, 지부 대인을 뵈옵니다.”
“일어나게.”
마 지부는 초조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예!”
“다들 소식은 들었으렷다? 산에 올라가 비적들을 토벌하거라!”
여 비장과 포졸들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마 지부는 냉랭하게 소리쳤는데, 특히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이 말인즉슨 산에 올라가서 주운환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나면 바로 사살해도 무방하다는 의미였다.
마 지부는 당장이라도 산에 올라가 주운환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만에 하나 주운환이 아직 죽지 않았다면 반드시 죽여야만 했다.
물론 대낮부터 깊은 밤인 지금이 되도록 주운환 쪽은 아무도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으니 이미 절망적인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마 지부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마 지부가 뒤를 쳐다보자 포졸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는 커다란 포대를 들고 있었다.
마 지부는 여 비장의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렀다.
“한 사람당 하나씩 차고 몸에서 떼지 말거라.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면 전부 반납하거라.”
포졸들은 어리둥절했지만 명령에 따라 앞으로 나가 포대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안에 든 물건은 평범한 회색 향낭이었는데, 그 흔한 꽃문양 하나 없는 몹시 보잘것없는 물건이었다.
포졸들은 이것을 왜 차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지부는 그저 명령만 내릴 뿐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포졸들에게는 지금껏 상관이 말하면 그대로 따르고 상관이 설명하지 않으면 묻지 않는 규율이 있었다.
마 지부는 사람들이 모두 향낭을 받은 모습을 보더니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인!”
이때, 누군가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마 지부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쪽을 쳐다봤다. 말을 꺼낸 사람을 확인한 그는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무슨 일이냐?”
키 작은 사람은 모자챙을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반쯤 가려진 데다 또 어둠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향낭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이 향낭들은 무슨 용도입니까?”
그러자 마 지부와 여 비장 등은 낯빛이 확 변했다. 이건 당연히 적명사를 막기 위한 약초였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는가. 마 지부는 음력 섣달에 뱀이나 벌레에 방비하기 위한 약초를 준비한 일 그 자체로도 뭔가 수상해 보인다고 생각하여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 지부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내가 받으라고 하면 그냥 받을 것이지! 다 쓰임새가 있다! 이 고얀 놈, 감히 내 뜻을 의심하다니.”
“하하하.”
키 작은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고, 사람들은 그 웃음소리에 전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들어도 여인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싱그럽고 부드러운,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키 작은 사람이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홱 벗어 버리자 환한 빛이 흐르는 조그만 얼굴이 드러났다. 이어 머리를 묶고 있는 머리끈도 확 잡아채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차르륵 흘러내렸다. 청초하고 아리따운 절세미녀가, 그녀의 생기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달빛 아래에 여실히 드러났다.
마 지부와 포졸들은 일순 초점 잃은 멍한 두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빼어난 용모와 자태를 뽐내는 여인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은백색 달빛을 받으며 서 있으니 꼭 인간 세계에 내려온 월궁항아처럼 보였다.
마 지부는 한 박자 늦게 깜짝 놀라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넌 누구냐?”
순리에 거스르는 일을 하면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러니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여인은 분명 자신의 계획을 망치려고 온 자일 것이다.
마 지부는 음산하고 매서운 눈빛을 보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저 여인을 잡아라!”
“멈추어라! 누가 감히 내게 손을 대려는 것이냐!”
엽연채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호령했다.
햇빛을 받은 물결이 남실거리듯 환한 광채가 흐르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 확 굳어지더니 위엄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포졸들이 멈칫한 순간,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황제 폐하께서 직접 봉한 정1품 진서후 부인이다.”
마 지부는 그녀가 주운환의 아내라는 소리에 낯빛이 변하더니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가짜다. 저자는 비적이니 어서 죽여라!”
포졸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아리땁게 생겼고 또 자신을 진서후 부인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못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엽연채는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냉소를 지어 보였다.
“난 이미 도성으로 서신을 보냈다. 만약 내가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마 지부와 그 휘하의 간악한 자들의 소행이라고 말이다. 태자 전하께서… 바로 내 시누이의 부군이시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태자’라는 두 글자에 그녀를 에워싸고 있던 포졸들은 낯빛이 확 변했다. 마 지부도 낯빛이 새파래졌으나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가짜라니까! 저 여인을 당장 죽이지 않고 뭣들 하느냐!”
“하!”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광채를 뿜어내는 청아한 얼굴로 마 지부가 아닌 여 비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여 비장, 마 지부는 지금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다. 그런데도 자네는 저자와 함께 행동할 텐가? 내가 조사해 보니 마 지부는 비적들과 결탁하여 진서후를 산으로 유인했네. 몰래 음모를 꾸민 게지.
지금 산에 올라가 있는 진서후는 생사조차 불투명하네. 그래서 마 지부가 포졸들을 산에 오르게 하려는 것이고.
뭐라더라. 그렇지, 비적들이 무슨 얼굴을 바꾸는 요술을 쓴다고 하던데. 하하하, 화본을 너무 많이 봤나 보지? 비적들이 그런 요술을 쓸 수 있으면 이런 궁지에 빠졌겠는가?”
그 말에 포졸들은 전부 정신을 차리게 됐다.
사실 그들도 어느 정도 의혹을 느끼기는 했지만, 상관이 내린 명령에 감히 불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껏 정신없이 뛰어와서 머리가 어지러웠으니 어디 자초지종을 자세히 따져 볼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핵심을 짚으니 다들 깜짝 놀라 낯빛이 급변했다.
“그러니 산에 있는 진서후는 진짜가 틀림없다. 마 지부는 진서후를 죽이기 위해 부하에게 주씨 가문 병사를 사칭케 하여 거짓 상황을 보고하게 했다. 마 지부는 너희들이 진짜 진서후를 죽이게 하려고 하고 있단 말이다!”
엽연채의 이어진 말에 포졸들은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 줄이야.
엽연채는 다시 여 비장을 쳐다보며 입을 뗐다.
“이 일의 전말은 내가 이미 확실히 조사했고 도성에도 이 사실을 알렸다. 너희들이 이곳에서 나와 진서후를 죽인다고 해도 너희들은 비적들과 결탁하고 공신을 해친 대역죄인이 될 뿐!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께서 너희들의 구족을 멸하실 것이다!”
여 비장과 포졸들은 엽연채의 위협에 소스라치며 몸을 덜덜 떨었다.
특히나 여 비장은 표정이 싹 변했다. 그는 마 지부의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과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엽연채의 말은 구구절절 사실이었다. 그러니 증명할 필요도 없이 엽연채는 진짜 진서후의 부인이었다.
계획이 들통났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엽연채를 죽여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엽연채가 이미 도성으로 서신을 보냈다고 하니 그녀는 무론이고 주운환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계속 수행할 까닭이 없었다. 이득을 얻기는커녕 비참하게 죽게 될 게 뻔하지 않은가.
여 비장은 고개를 홱 돌려 마 지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대인… 이게 사실입니까? 지부 대인께서… 정녕 진서후 대인을 죽이려고 하셨습니까?”
마 지부의 둥근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는 여 비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엄포를 놓았다.
“여붕, 네가 감히 날 배반하려는 것이냐?”
“대인, 함부로 옭아매지 마십시오!”
여 비장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잡아뗐다.
“저와 제 수하들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대인께서 갑자기 기이한 사람을 은밀히 접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사람과 진서후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셨던 거군요.
저희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대인의 이동 명령에 따른 것뿐입니다. 대인께서 하라는 대로만 했지요. 대인께서 그러실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는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포졸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관리로 일하는 그들은 괜히 마 지부와 엮여서 죽고 싶지 않았다.
엽연채는 자신의 공갈 협박에 넘어간 여 비장을 쳐다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어찌 그들의 계략을 간파했겠는가? 단지 실낱같은 단서를 엿봤기에 주운환을 위해 사력을 다했을 뿐인데 운이 따라 준 셈이었다.
“저자를 결박하라!”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마, 맞다! 결박하고 입을 틀어막거라!”
여 비장도 그녀를 따라 고함을 쳤다.
“너희들이… 너희들이 감히……!”
마 지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뒷걸음질 쳤다.
포졸들은 조금 망설였다. 아직까지는 마 지부의 위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여 비장은 자신이 역으로 당할까 봐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뒤에 있던 포졸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그제야 우르르 앞으로 달려 나와 마 지부와 그의 측근 두 명을 단단히 결박하더니 입을 틀어막고 한쪽으로 내동댕이쳤다.
이때, 제민도 앞으로 나와 분위기를 잡았다.
“진서후 부인, 부인께서 어제 서신을 보낼 때는 미처 여쭙지 못했는데, 이런 악랄한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저들이 도대체 무슨 흉악한 계략을 꾸민 건지는 모르겠군요.”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자신도 이들이 무슨 계략을 꾸민 건지 알고 싶던 차였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여 비장을 쓱 쳐다보며 이렇게 을렀다.
“그걸 내가 직접 말해야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