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2화
“여 비장 대인, 오셨군요.”
“그래. 무슨 일이냐?”
다가온 포졸이 여 비장을 맞이하자 그와 포졸 우두머리 몇 명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을 멈춰 세웠다. 뒤에서 그들을 따라 뛰어오고 있던 포졸들은 전부 자리에 멈춰 서더니 쉴 새 없이 숨을 헐떡거렸다.
마침내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제민과 엽연채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엽연채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시선은 여 비장에게 고정한 채였다.
주씨 가문 군복을 입은 병사가 말했다.
“여 비장 대인, 진서후께서 중상을 입으셔서 산에서 철수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여 비장의 얼굴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뭐라고 했느냐? 그 용맹한 진서후께서 중상을 입었다고? 대체 어찌 된 일이냐?”
“그 비적 놈들이 몹시 교활합니다. 특히 그 욱휘라는 자가 민간에서 유명한 기사奇士인데 무슨 요술을 쓰는지 다른 사람으로 감쪽같이 변장할 줄 압니다.”
주씨 가문 병사가 말을 이었다.
“진서후께서 비적들을 수색할 때 마 지부 대인을 보셨습니다. 앞으로 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하는 찰나, 마 지부 대인이 갑자기 진서후를 공격해 중상을 입혔습니다. 그제야 욱휘가 마 지부로 변장한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뭐라?”
여 비장은 대경실색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이놈들이 과연 보통이 아니구나. 요술을 쓸 수 있다니! 그러니 수년 동안 대제에 화란을 일으킨 게지.”
“그러니 다들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후야께서는 이미 산에서 철수하셨고, 후야께서 기절하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산에서 후야를 보게 되면 그건 분명 가짜라고 말이죠! 그러니 절대로 그자의 명령을 따르면 안 되며 붙잡으면 바로 사살해도 무방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여 비장은 얼른 대답했고 돌아서서 포졸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다들 똑똑히 들었으렷다. 가짜 후야를 보게 되면 바로 사살해도 무방하다!”
“예!”
포졸들이 한입으로 대답했다.
제민은 멍해졌고 엽연채는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그렇잖아도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은 아예 하얗게 질려 버렸다.
엽연채는 서신을 떠올렸다. 그동안 주운환을 함정에 빠뜨리고 비적들을 지원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는데, 이제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마 지부와 여 비장이었다.
‘산에 가짜 주운환이 있기는 무슨! 분명 본인이야!’
엽연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상황을 보고하러 온 주씨 가문 병사부터가 진짜가 아니니까 말이다.
이 병사가 주운환의 친위병이라면 여양과 여한을 따라 그를 ‘나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소전처럼 말이다. 친위병이 아니라 보통의 병사였다면 그를 ‘후야’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보고하러 온 이 병사는 주운환을 ‘진서후’라고 칭했다. 또 이야기를 하는 모습 역시 오히려 지부 쪽과 더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이 병사의 실체는 마 지부의 측근일 것이다.
‘얼굴을 바꾸는 요술은 무슨!’
그 욱휘라는 자가 그렇게 대단하면 숨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비적 떼의 두목을 바로 다른 사람으로 변장시켜 도망갈 수 있는데 어찌 이런 궁지에 빠졌겠는가?
하지만 눈앞의 포졸들은 한참을 뛰어온 바람에 정신을 못 차렸고, 여 비장과 가짜 주씨 가문 병사가 큰 소리로 외치니 대부분 그 말을 믿어 버렸다.
물론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말단에 불과한 그들은 윗사람의 말에 따라 움직이고 본인 머리는 거의 쓰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 저들이 감히 내 부군을 해치거나 죽이려 하고 있으니, 부군의 현재 상황은 분명 심상치 않을 거야!’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엽연채는 더욱 초조하고 조급해져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십 리만 더 가면 동우산에 도착하니 속도를 높이겠다. 어서 가서 그 비적 떼를 붙잡자!”
여 비장은 힘 있게 외치더니 말채찍을 세게 내리쳤다.
“이랴!”
말을 탄 십여 명의 사람들이 다시 속도를 높이자 뒤에 있는 포졸들은 냅다 달음질하여 뒤를 쫓았다.
“연채야…….”
제민은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봤다.
“가자! 나도 빨리 가고 싶었으니까 잘됐어.”
엽연채는 이를 악물고 뛰기 시작했다.
“산에 있는 사람이… 내 부군이야! 우리가 부군을 찾아야 돼!”
“응!”
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의 입장에 서서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니 제민도 이것이 함정이라는 걸 알게 됐고 이 일의 자초지종도 짐작이 갔다.
엽연채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힘들어서 죽다 살아났는데 참 이상하게도 지금은 물불 안 가리는 힘이 생겨난 듯했다. 아무리 버겁고 괴로워도 두렵지 않았다. 오로지 앞을 향해 나아갈 생각뿐이었다.
찬바람이 씽씽 불어왔다. 앞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던 여 비장은 그제야 그 ‘주씨 가문 병사’와 함께 온 포졸에게 물었다.
“지부 대인은 잘 계시냐?”
“지부 대인은 평안하십니다. 일도 순조롭게 풀리고 있습니다.”
포졸이 이리 대답했다.
어젯밤, 주운환은 갑자기 비적 떼를 쫓아 수주로 갔고 결국 동우산에 이르게 되었다.
비적 떼가 도망갈까 걱정됐던 주운환은 병사들에게 동우산을 포위하라고 했지만 산을 수색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다. 그에 사람을 보내 여양과 마 지부가 각각 병사들을 이끌고 지원하기를 명했다.
소식을 전달받은 마 지부는 곧장 포졸들을 데리고 여양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병마兵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갔는데, 동우산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비적 떼와 맞닥뜨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마 지부는 깜짝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비적들은 진서후께 쫓겨 산으로 올라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성동격서의 전술을 쓰는 건가?”
그러자 말을 탄 여양이 앞으로 나와 차가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성동격서의 전술일 리가 있겠습니까? 공격을 하려면 저희 나리 쪽을 공격했겠죠. 왜 저희들 앞에 나타나 포악을 떨겠습니까! 분명 이것들은 또 다른 무리입니다! 두목이 산에 있으니 그자를 구하러 온 거죠.”
그러고는 말채찍을 힘껏 내리쳤다.
“너희들은 나를 따라오거라! 마 지부께서는 먼저 가셔서 저희 나리와 합류하십시오.”
“알겠네!”
마 지부는 얼른 대답했다.
그리하여 여양은 주씨 가문 병사들을 데리고 또 다른 비적 떼를 추격했고, 마 지부는 포졸들을 데리고 서둘러 동우산으로 향했다.
과연 동우산에 도착하니 검은색 군복을 입은 30여 명의 병사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진홍색 갑옷 차림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잘생긴 소년이 늠름한 모습으로 칼을 잡은 채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견줄 데 없이 수려한 이 소년은 날카로운 눈썹에서 예리하고 맹렬한 기운이 느껴졌고 눈초리에서는 눈서리가 떨어질 것처럼 차가운 분위기가 흘렀다. 살짝 위로 올라간 붉은 입술에는 다소 오만한 분위기가 담긴 듯싶었다.
마 지부는 그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저도 모르게 온몸에서 한기가 느껴졌고 등허리가 경직됐다. 이 사람이 바로 말로만 듣던 그 진서후였다. 과연 젊고 준수한 데다 풍채가 당당하기까지 했다.
“소관 마현, 진서후를 뵈옵니다.”
마 지부는 설레는 표정으로 그 앞으로 다가가 아주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주운환은 상관을 보면 쉼 없이 굽실거리는 부류의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냉랭한 목소리로 ‘음’ 하고 짧게만 대답했다.
“마 지부가 왔으니 이제 산으로 올라가겠다.”
“아…….”
마 지부는 놀라며 조금 실망한 듯 이렇게 말했다.
“저어… 후야께서 오셨는데 소관이 마중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후야께서는 이미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셨죠? 산에 있는 비적들은 후야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니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후야께서 괜찮으시다면, 멀지 않은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는데 소관이 그곳에 가서 후야를 위해 조촐하게 환영회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비적 떼를 소탕하고 성으로 돌아가면 지주의 예를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운환은 혐오의 눈빛을 번뜩이며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네.”
살집이 꽤 있는 마 지부의 둥근 얼굴이 확 굳어졌다.
“소관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후야와 여기 있는 병사들 모두 이곳에서 오래 계셨잖습니까. 산에 올라 비적 떼를 추포하려면 어쨌든 요기는 하셔야 할 텐데… 소관이 급히 오는 바람에 준비를 못 했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허둥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갑자기 두 눈을 반짝였다.
“일단 여기서 먹을 것을 구하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을 산으로 보내 먹을 것을 구해 오라고 할 테니 우선 그걸로 요기를 해결하시지요!”
“나리, 저도 배가 고픕니다.”
그때 여한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건량乾糧도 없으니 우선 병사들에게 뭘 좀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요 앞에 민가가 몇 채 있는 것 같던데 제가 가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주운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화 몇 냥을 지불해서 사 가지고 오너라.”
“예.”
여한은 얼른 대답한 뒤 사람들을 몇 명 불러 함께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그러자 마 지부는 또다시 주운환 앞에서 굽실거리며 포졸들에게 막사를 설치하라고 했고 사냥감과 음식을 굽고 데울 수 있게 준비하라고도 분부했다.
산에 오른 포졸들은 민첩한 몸놀림을 자랑하며 겨우 이각 만에 꿩 네다섯 마리를 잡아서 돌아왔다. 또 어떤 이들은 마른 나뭇가지를 한 묶음 주워 왔다.
여한과 주씨 가문 병사들 몇 명도 마대를 어깨에 지고 돌아왔다. 이들은 바닥에 마대를 내던졌고 그러자 그 안에서 꽤 많은 양의 고구마가 굴러 나왔다.
마 지부는 사람을 시켜 예닐곱 개의 불더미를 만들고 땅을 파 그 안에 고구마를 묻게 했다. 그러곤 그 위에 선반 형태의 구조물을 세운 다음 손질을 마친 꿩을 올리라고 분부했다.
“캑캑……! 어우, 매워.”
불을 붙이니 여한은 코를 막으며 주운환 곁으로 걸어갔고 주운환은 날카로운 눈썹을 치켜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콜록, 캑……! 날씨가 이래서 나뭇가지가 전부 젖어 있습니다.”
마 지부는 얼른 앞으로 나와 말했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하하…….”
과연 삼각쯤 굽고 나니 연기는 점차 줄어들고 고기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고 군침이 돈 여한은 얼른 품 안을 더듬어 조미료 꾸러미를 꺼냈다. 타지에서 행군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조미료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조미료를 뿌리자 바로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은 고기 냄새를 맡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힘들여 구운 고기 요리가 마침내 완성되자 마 지부는 얼른 익은 정도를 살펴보더니 뜨거움도 개의치 않고 꿩 몸에 꽂힌 나뭇가지째로 꺼냈다. 살점이 가장 많고 제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꿩이었다.
마 지부는 열기에 어어 대면서도 고기를 놓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손을 바꿔 드는 그 모습에 여한과 주씨 가문 병사들은 모두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뜨거움이 가시자 마 지부는 살집 좋은 몸을 흔들며 주운환 곁으로 달려갔다.
“후야, 드셔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