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1화
엽연채는 방에서 의자 한 개를 가지고 나와 담장 옆에 놓았다. 하지만 의자를 밟고 섰는데도 담장 위로 오르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방으로 달려가 수돈을 가져왔다. 그러곤 우선 의자에 오른 다음 다시 수돈을 그 위에 올리고 그걸 밟았다.
엽연채의 조그만 두 손이 처마 위에 닿자 그곳을 덮고 있던 눈서리가 만져지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손가락이 곱았다. 어디 그뿐인가. 아래에 있는 수돈은 원래부터 불안정하게 놓여 있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결국 몸이 옆으로 조금씩 기울어 엽연채는 그대로 넘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발아래에 놓인 수돈이 고정됐다. 놀라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보니 제민이 그곳에 서 있었다.
“민아……!”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제민은 고개를 들더니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난…….”
엽연채는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솔직히 털어놨다.
“난 부군을 찾으러 갈 거야…….”
엽연채는 콧날이 시큰거렸고 눈언저리가 붉게 변했다. 제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결국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 나도 너랑 같이 갈게.”
“정말?”
엽연채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럼 나 좀 부축해 줘.”
“아니, 일단 내려와.”
엽연채는 그러잖아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던 상태라 제민의 말대로 아래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어 제민이 단숨에 처마 위로 오르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엽연채는 얼른 자신의 손을 제민의 손 위에 올렸다.
제민이 힘껏 엽연채를 끌어올렸고, 엽연채는 그제야 겨우 담장 위로 올라왔다. 그런데 담장 위가 너무 미끄러워 그만 ‘쿵’ 소리를 내며 맞은편 관아의 작은 뜰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연채야……!”
제민은 소스라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보니 가장자리 쪽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요즘 계속 눈이 내려 쌓인 눈이 아주 많았는데, 게으른 포졸들은 양쪽으로 눈을 쓸어 놓기만 했다. 그래서 가장자리에 눈이 수북수북 쌓여 있었지만, 엽연채는 거기에 파묻히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제민은 깜짝 놀라 온몸이 경직됐다.
그런데 ‘웁’ 하고 소리가 들리더니 다행히 엽연채가 눈 더미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하암…….”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하품 소리가 들려왔다.
제민과 엽연채 모두 깜짝 놀랐다. 제민은 얼른 몸을 숙였고 엽연채는 눈 더미 속으로 꼭꼭 숨었다.
엽연채가 떨어진 곳은 조그만 뜰이었는데, 오른쪽에는 뒷간처럼 보이는 작은 초가집이 있고 왼쪽에는 반월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포졸 한 명이 그 문으로 나왔는데, 눈을 비비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잠을 자다 말고 볼일을 보러 나온 게 분명했다.
엽연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눈 더미 속을 더듬어 돌멩이 하나를 찾아냈다. 포졸이 졸려 하며 자기 옆을 지나는 순간, 그녀는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돌멩이로 그의 머리를 ‘퍽’ 내려찍었다.
“커헉!”
그는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엽연채는 뻗어 버린 포졸을 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때, 뒤에서 쿵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민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그녀 쪽으로 달려와 말했다.
“잘했어. 얼른 이 사람 옷을 벗기자.”
“응.”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현재 주씨 가문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해 있고 엽연채도 이곳에 와 있으니 분명 주씨 가문 병사들이 관아의 주위를 둘러싸고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담장을 넘어 큰길로 뛰어나가면 그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었다.
즉, 나가고 싶으면 반드시 이곳을 통해야 했다.
두 사람은 포졸을 커다란 나무 밑으로 끌고 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정신없이 그 포졸의 옷을 벗겼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뎅뎅 요란한 라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와 제민은 깜짝 놀랐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엽연채가 말했다.
“들킨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제민은 바로 그 말을 부정했다.
“이건 관아에서 갑자기 사람들을 소집할 때 내는 소리야.”
전에 제민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현성縣城에도 가고 부성府城에도 갔었는데 너무 늦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쉬운 대로 타지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빠듯한 형편에 객줏집에서 자기는 돈이 너무 아까웠다. 그렇다고 여자아이가 밖에서 노숙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기 때문에 제민은 관아 주위에 숨어 잠시 쉬곤 했다.
가끔씩 관아에 긴급 상황이 발생해 사람들을 집합시킬 때면 이런 징 소리가 울리곤 했다.
“서두르자! 혼잡한 틈을 타면 아무렴 도망치기 더 쉬울 거야. 아니면…….”
엽연채는 주운환이 이곳 지부와 함께 비적 떼를 소탕하러 간 걸 떠올리자 지금 관아의 긴급소집령이 동우산 쪽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포졸의 겉옷을 마저 벗겼다.
“내가 입을게. 난 손발이 빠르니 바로 다른 옷을 찾을, 쉿……!”
말을 하던 제민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포졸 세 명이 왼편의 반월공문으로 황급히 뛰어나왔다.
엽연채와 제민은 얼른 몸을 웅크렸고 다행히도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포졸들은 집합해서 출발하기 전에 서둘러 뒷간에 가려는 것이었다. 포졸들은 번갈아 뒷간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두 사람이 밖으로 뛰어나왔다. 마지막 한 명이 나오자 제민은 들고 있던 돌로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제민에게 맞아 쓰러진 포졸은 먼저 쓰러져 있던 포졸 옆으로 끌려와 함께 옷이 벗겨졌다.
함께 포졸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엽연채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두 사람은 그 안에 든 잿가루를 얼굴에 발라 변장을 마치고는 서둘러 반월공문으로 뛰어갔다.
징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해 관아의 정청正廳에 도착해 보니 그곳에는 이미 백여 명이 집합해 있었다. 엽연채와 제민은 얼른 맨 뒤에 서서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몇몇 사람들이 잇달아 달려 들어와 그들 뒤에 일렬로 섰다.
“왜 이리 늦게 나오는 것이냐?”
맨 앞에서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는 모자챙을 더욱 푹 누르고 눈을 들어 그곳을 쳐다봤다. 앞쪽에 키가 작고 뚱뚱한 중년 사내가 서 있었는데 가장자리에 털이 달리고 엽전 문양이 들어간 비단옷 차림이었다. 그는 검은색 사각형 모자를 쓰고 있었고 두꺼운 여우 털로 만든 소매 없는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단정하게 생긴 편이었다.
“모두에게 알렸느냐?”
그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소 화가 난 목소리로 재차 외쳤다.
“예, 비장 대인.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일부는 먼 곳에 살고 있어 빨리 올 수가 없습니다.”
포졸들이 입는 군청색 옷을 입은 한 청년이 말했다. 차림을 보니 포졸들의 우두머리였다.
일각쯤 더 흐르고 나니 더 이상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포졸들의 우두머리가 여 비장에게 고했다.
“모두 도착했습니다.”
“좋다.”
여 비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뒷짐을 지고는 포졸들에게 일렀다.
“이 비적들은 아주 교활하고 꾀가 많은 것들이다. 특히 민간 제일의 기사奇士인 욱휘가 그들의 군사軍師인데, 그자가 알량한 능력으로 수년간 대제에 환란을 일으키고 있다.
다행히도 진서후께서 직접 나서서 비적들을 대부분 소탕했고 현재 비적들의 두목인 홍광수와 욱휘만 남아 잔당을 데리고 도주했다. 하지만 결국 진서후께 쫓겨 동우산으로 몰아넣어졌는데… 그 비적들이 너무 교활하고 악랄한 데다 동우산의 지형도 특이해서 아직까지 추포하지 못했다.
하여 지부 대인께서 명령을 내리셨다. 최대한 빨리 동우산으로 와서 힘을 보태라는 명이다!”
엽연채와 제민은 이 말을 듣더니 속으로 흥분을 금치 못했다. 동우산으로 가는 것이다. 그야말로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으로, 이들만 따라가면 주운환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출발!”
여 비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포졸들은 일제히 대답하고선 그를 따라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문 밖에는 말 열한 필이 서 있었다. 여 비장과 파란 옷을 입은 포졸들 열 명은 말을 탔고 그중 일부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제민은 상황을 지켜보더니 깜짝 놀랐다. 여 비장 등과 달리 자신들은 뒤에서 뛰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자신이야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기에 상관없다지만 엽연채는 어릴 때부터 곱게만 자란 사람이었다.
‘생고생을 하며 먼 길을 가야 하는데 과연 견딜 수 있을까?’
그러나 엽연채는 의연한 표정으로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대열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엽연채와 제민은 대열을 따라 관아를 떠나 큰길로 걸어갔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금세 종종걸음을 치게 됐다.
이미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라 백성들은 진작에 잠자리에 들었고 일부 부호들의 대문 밖에만 등롱이 두 개씩 걸려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옥은 어두컴컴해서 큰길 또한 칠흑같이 어두웠다.
오늘은 날씨도 추운 데다 밤바람이 휙휙 불어오자 길 양쪽에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해 주위에는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돌았다.
사람과 말로 이뤄진 긴 행렬은 큰길을 지나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황량한 교외는 더욱더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제민은 대열을 따라 뛰어가며 숨을 조금 헐떡였고 몸을 돌려 엽연채를 쳐다보니 그녀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지독히도 추운 날씨임에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콩알만큼 굵었고 결국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어두운 밤이라 안 보이기는 하나 제민은 지금 엽연채의 얼굴이 분명 창백하게 질려 있을 줄 잘 알았다. 발걸음도 무겁게 변해 있었다.
“연채야…….”
제민은 조그만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정 안 되겠으면 우리 천천히 뒤로 빠져서 일단 좀 쉴까?”
“아니…….”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팠고 목에서도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대열을 이탈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자신과 제민은 길도 모르는데 대열을 이탈했다가 동우산을 찾을 수 없게 되면 어찌한단 말인가. 방금 전 여 비장의 말을 들어 보니 주운환은 확실히 산에 올랐다. 그럼 그가 흉계에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앞에서 갑자기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고개를 드니 준마 두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고 앞에서는 횃불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달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한 사람은 포졸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주씨 가문 군사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