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평해는 엽연채가 이번 여정에서 다치기라도 할까 봐 심히 걱정되어 속전속결하려는 마음뿐이었고, 엽연채도 주운환 쪽이 걱정돼서 최대한 빨리 그곳에 도착하고 싶었다. 목표가 같으니 자연히 효율은 높아졌다.
사흘 후, 마침내 그들은 명주 근처에 다다랐다.
제민은 얼른 인근 마을로 달려가 허름한 옷 몇 벌을 구해 오더니 엽연채와 혜연 등에게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러고는 엽연채의 얼굴에 잿가루를 묻혀 사내아이로 변장시켰다.
엽연채는 제민이 자신의 얼굴에 잿가루를 묻히자 퉤퉤 침을 뱉으며 투덜댔다.
“아우, 지저분해.”
“지저분해도 해야 돼.”
제민은 그녀의 얼굴에 잿가루를 덧바르며 까닭을 설명해 주었다.
“이 일대에 도적들이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데. 게다가 새해를 앞두고 있어서 그럴싸해 보이는 행렬을 보면 냉큼 쫓아와서 도둑질하려고 할 거야.”
마차도 작고 허름한 달구지로 바꿨고, 평해와 다른 호위병들은 타지에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명절을 쇠려는 농부로 변장했다.
이틀을 더 가서 일행은 마침내 명주에 도착했다.
대복의 말에 따르면 주운환은 현재 명주에 있다고 했고, 그 서신도 얼결에 엽연채가 중간에서 가로챘으니 주운환은 수주에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엽연채는 평해에게 명주의 지부知府를 찾아가라고 했다. 타지로 비적 떼를 잡으러 가면 반드시 그 지역 관리와 같이 행동해야 했다. 그러니 주운환도 아마 명주 지부와 함께 있을 것이었다.
평해는 진서후부의 영패令牌를 들고 명주의 지부를 찾아갔고, 엽연채가 말한 대로 주운환에게 겨울옷을 전달해 주러 왔다고 알렸다. 그런데 명주 지부는 뜻밖에도 주운환이 이미 수주로 떠났다고 알려 주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이 정말로 수주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고, 황급히 평해에게 수주로 가자고 명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일행은 수주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서둘러 수주의 관아로 달려갔는데, 관아 밖은 주씨 가문 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알아본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였다.
수주에 들어왔을 때 엽연채 일행은 이미 의복을 다시 갈아입은 상태였다. 평해 등은 주씨 가문 호위병들이 입는 의복을 입고 있었고 엽연채와 몇 명은 사동 차림을 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얼른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평해가 걸어오기도 전에 말이다. 때마침 저 멀리 낯익은 사람 형체가 말을 끌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여양이었다.
“여양! 여양아!”
엽연채는 그를 보자마자 유달리 친근감이 느껴졌다.
“어?”
여양은 순간 멍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끌벅적한 큰길에서 누군가가 익숙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여양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는데 그 사람은 그를 향해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누구인지 여양이 제대로 살펴보기도 전에 그 사람은 쏜살같이 달려와 앞에 섰다.
여양은 깜짝 놀랐다. 그의 눈앞에는 사동 한 명이 서 있는데 희뿌연 잿가루가 묻어 있는 아주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작은 연모를 쓰고 있었다. 이 소년은 꾀죄죄한 얼굴로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분명 눈에 익은 얼굴이긴 한데 누구인지 알아보지는 못했다.
“여양!”
그때 엽연채가 또 한 번 이름을 불렀다.
“어……!”
이 친숙한 목소리에 여양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마……! 흠흠,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그게…….”
엽연채는 입을 빼죽거리더니 이렇게만 말했다.
“부군께 옷을 전달하러 왔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먼 길을 직접 오셨어요. 나리께서 분명 화내실 겁니다. 일단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여양은 손짓을 하며 엽연채 등을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마침내 엽연채를 주운환 곁으로 무사히 데려다준 평해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주운환은 현재 수주 지부의 처소 뒤편에 위치한 뜰에서 지내고 있었다.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여양을 한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이렇게 물었다.
“부군께서 동우산으로 가셨느냐?”
여양은 어리둥절했다.
“그게…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저께 그 도적 떼가 명주에서 이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동쪽으로 가긴 갔죠. 나리께서는 그자들을 추격하시면서 저에겐 먼저 이곳에 들러 마 지부 대인을 만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리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실은 며칠 전에 내가 집에서 활을 쏘며 놀고 있었는데 전서구 한 마리를 우연히 맞추게 되었단다. 녀석은 그렇게 죽어 버렸고 누구의 서신인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서신을 열어 봤지. 그런데 이런 걸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니.”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소매 안쪽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여양은 서신을 건네받아 보더니 놀라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지지를 봤을 때 동쪽이 가장 숨기에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로 꼽힌 장소가 이 동우산이었어요. 그런데 이 정보는 너무 애매모호해서 그쪽에서 반드시 일이 생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너와 부군은 원래 명주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 비적 떼를 쫓아 이쪽으로 오게 됐고 거기다 동쪽으로 가게 됐어.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니?”
“공교로운 건 마님께서 활을 쏘고 계시다가 정보를 얻게 된 거죠.”
여양은 하하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간에 나리께 알려 드려 방비하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병졸 한 명이 걸어왔다.
“여양 호위병, 방금 전 후야께서 내린 이동 명령을 받았네. 자네는 3천의 군사를 이끌고 마 지부 대인과 함께 동우산으로 가면 되네.”
“어?”
여양은 어리둥절했다.
“동우산이라고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그 비적 떼가 동우산으로 도망쳐서 진서후께서 부하들에게 산을 포위하라고 하셨다더군. 우리 쪽 사람들이 도착하면 바로 산으로 올라가 비적 떼를 토벌할 수 있다고.”
병졸이 말했다.
곁에 있던 엽연채도 동우산이라는 세 글자를 똑똑히 들었다. 게다가 비적 떼가 정말로 산으로 도망쳤다. ‘거짓으로 도망침. 동우산으로 유인하면 지원군이 있음.’이라는 서신 내용과 일치했다.
“여양아.”
“알겠습니다.”
엽연채가 여양을 쳐다보자 그 역시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이 일을 나리께 알리겠습니다. 마님께서는 이곳에서 푹 쉬고 계세요. 그런데… 아무래도 계속 남장하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리께서 타지에서 행군 중인데 마님께서 이곳에 찾아오셨으니 아무래도 남들 보기에 그리 좋지 않을 겁니다.”
“그래.”
엽연채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소전에게 마님께서 쉬실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여양은 그 병졸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여양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님, 진정하시고 우선 좀 씻으세요.”
보다 못한 청유가 말했다.
명주에 들어선 후로도 안전을 위해 엽연채는 얼굴을 깨끗이 씻지 않았고 여전히 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 우리도 아는 건 그 정보밖에 없잖아. 네 부군은 영민한 사람이니 그렇게 일러 주면 알아서 경각심을 가질 거야.”
제민도 엽연채를 안심시켰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뭔가 떠올라 청유를 붙잡고 물었다.
“동우산에 뭐 특별한 점이라도 있니?”
“그게…….”
청유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전 여덟 살에 팔려 와서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특별한 점을 물으셨는데… 별로 그렇다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
“이 바보. 우리가 지금 수주에 와 있잖아. 청유한테 뭐 하러 물어. 이따가 밖에 나가서 식사할 건데 그때 현지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되겠네!”
제민의 말에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였다.
이때,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소인은 소전이라고 합니다.”
그의 두 손에는 깨끗한 옷이 들려 있었다.
주운환 곁에는 3천 명의 친위대가 있는데 그에게 충성심이 가장 강한 군대였다. 이 외에도 주운환은 옥안관에서 지내는 동안 열 명의 맹장을 키워 냈는데, 그들은 지금 모두 응성 쪽을 지키고 있다.
“이곳이 후야의 처소이니 마님께서는 편히 쓰시면 됩니다.”
“그래, 고맙다.”
소전의 안내에 엽연채는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혜연이 그에게 다가가 옷을 건네받자 소전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엽연채와 제민은 옷을 갈아입었다. 엽연채는 회색 도포를 입었고 천 조각으로 머리를 묶은 뒤 얼굴을 누렇게 칠했다. 이리하니 왜소한 소년처럼 보였다.
제민도 똑같이 분장을 했는데 그녀는 금색 빛이 나는 갈색 옷을 입었다.
그들이 옷을 바꿔 입고 밖으로 나오니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소전의 모습이 보였다.
“동우산에 대해 알아본 게 있느냐?”
“저희는 어제저녁에 이곳에 왔고 나리께서는 직접 비적 떼를 쫓아 동쪽으로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저희에게 여양 형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지부 대인을 만나라고만 하셨습니다. 동우산으로 가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정찰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가서 알아보자꾸나.”
소전의 대답을 들은 엽연채는 탁자 위에 차려진 밥과 반찬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음식은 저녁에 먹고 일단 밖으로 나가자꾸나!”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전은 일순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도 엽연채의 심려하는 마음이 십분 이해됐다. 전에 자신이 종군했을 때도 가족들은 안절부절못했고 매일 자신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다. 자신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예. 그럼 밖으로 나가시죠.”
소전이 대답했다.
엽연채는 제민과 청유를 데리고 함께 문을 나섰고 소전은 뒤에서 그들을 보호했다. 혜연은 이곳에 남아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관아를 나온 그들은 근처의 큰길로 향해 꽤 북적거리는 요릿집에 들어갔다. 그들은 객실을 대절하지 않고 대당大堂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손님,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점원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자 제민 역시 웃으며 주문했다.
“이 집 간판 요리로 몇 개 내오면 된다.”
“예!”
점원은 대답을 하고서는 바로 돌아서서 걸어갔다. 간판 요리는 일반적으로 비싼 편인데 보지도 않고 시키는 걸 보니 통이 큰 손님들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쟁반 하나를 어깨에 메고 걸어오더니 쟁반 위에 있는 요리들을 하나하나 탁자 위에 차려놓았다.
엽연채는 이 기회를 틈타 점원에게 물어봤다.
“이 근방에 동우산이 있다고 하던데… 어때, 가 볼 만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