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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47화 (547/858)

제547화

마차는 덜덜 소리를 내며 정륭가를 지나갔고, 잠시 후 모퉁이를 돌더니 진서후부의 동쪽 측문으로 들어갔다.

수화문 밖에서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자 혜연은 얼른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 놓은, 꽃문양이 조각된 자줏빛 손난로를 손에 쥐여 주었다.

일행이 고개를 들어 보니 복도 양쪽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추길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일을 어떻게 했길래 눈도 깨끗이 안 치워 놓은 거야.”

“요 며칠 눈이 많이 내렸으니 어쩔 수 없지. 원래 집안에 일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괜찮다.”

그리 말하는 엽연채는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주운환을 떠올리자 콧날이 시큰거렸다. 집을 떠난 지 어느덧 한 달이 넘었건만 감감무소식에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양왕도 조앵기를 데리고 그렇게 도성을 떠났으니,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연 알 수가 없었다.

양왕마저 갑작스럽게 떠나 버리자 도성에 자신 홀로 남게 된 셈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도성의 정세마저 급변하자 엽연채는 간혹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엽연채는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며 수화문을 넘어섰다.

운연거로 돌아와 보니 방 안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청유와 소월 등이 엽연채가 대략 이때쯤 돌아올 줄 알고 미리 목탄을 태워 둔 덕이었다.

엽연채가 방으로 돌아간 뒤 추길은 바로 후조방으로 돌아갔다. 요즘 그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혼자서 수놓기를 좋아했다.

엽연채는 탑상에 앉더니 혜연에게 일렀다.

“경인이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요씨 가문 저택으로 가서 그곳을 지켜보라고 하거라.”

“요씨 가문이요?”

혜연의 되물음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태자비가 그렇게 큰 손해를 봤는데 요씨 가문에서 그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있겠느냐? 게다가 주씨 가문이 요씨 가문의 체면을 짓밟았는데 그들이 아무 짓도 안 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태자비조차 주운환을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요양성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겠는가?

혜연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더니 얼른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경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며칠이나 지켜봤지만 요양성 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는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납팔절臘八節(음력 12월 8일)이 되었지만 주운환에게선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엽연채는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전처럼 양왕이 이곳에 있었다면 그를 찾아가 주운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수라도 있었겠지만 지금 양왕은 도망을 가지 않았던가.

엽연채는 주씨 가문으로 돌아가 명절을 보내며 주 백야에게 주운환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주운환에 대해 묻자 주 백야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셋째가 집을 떠난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진씨는 냉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떠돌이 비적들이 보통 사나운 게 아니라던데. 용맹한 오 지휘관조차 불구가 되지 않았느냐?”

엽연채는 고소해 죽겠다는 진씨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어머님은 제 부군을 위해 신령님께 자주 비셔야겠네요. 제 부군이 무사하도록 부디 보살펴 달라고 말이죠. 그래야 주 측비도 평안할 테니까요.”

진씨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주운환 그 빌어먹을 종자가 비명횡사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지금은 중요한 고비였다.

주묘서가 아직 황후에 책봉되지 않았는데 주운환이 목숨을 잃어버리면? 태자가 마음을 바꿔 다른 사람을 황후로 책봉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하하. 당연히 셋째를 보살펴 달라고 신령님께 빌어야지. 이따가 묘서에게 셋째 쪽 상황이 어떠한지 태자 전하께 여쭤보라고 하마.”

“예.”

진씨가 그렇게 대꾸하고 나서야 엽연채는 만족스러워했다.

“곧 있으면 새해를 맞이하는구나. 셋째도 돌아와 가족끼리 함께 보내야 보기 좋을 텐데.”

주 백야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비적 토벌은 변방에 나가 전쟁을 치르는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비적들이 중원中原 내에 있기 때문에 추격하는 과정에서 집으로 한 번쯤은 돌아올 수 있었다.

엽연채는 궁명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이튿날 이른 아침 바로 진서후부로 돌아갔다.

저녁 무렵이 되자 주 백야를 곁에서 모시는 대복이 몸에서 찬 기운을 풍기며 운연거로 들어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마님, 걱정 마세요. 나리께서는 무탈하십니다. 나리께 공격을 당한 비적들이 겁을 먹어 정면 대결은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사람들을 데리고 숨어 버렸다고 하네요. 지금 비적 떼 두목이 수하들을 데리고 명주銘州 쪽으로 도망을 쳐 나리께서 명주 지부知府와 손을 잡고 비적들을 수색하고 있다 합니다.”

엽연채는 그 말을 듣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비적 두목이 몹시 교활한 자라 아마 상대하시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새해까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리께서 그전에 돌아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복은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백야께서 마님 혼자 집에 계시니 백부로 와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시면 가족들이 보살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럴 필요 없다. 여기서 지내다가 새해를 맞이할 때 돌아가면 된다.”

대복이 다시 권했지만 엽연채는 역시나 거절했고, 대복은 그제야 포기하고 그곳을 떠났다.

추길은 작은 집게로 난로 안에 목탄을 넣고 있었다. 그녀는 떠나가는 대복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조금 우울해졌다.

“마님, 저희끼리만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참 외롭고 쓸쓸한데, 당분간 백부로 돌아가서 지내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진 마님도 저희를 건드렸다가 본인이 더 큰 손해를 볼까 봐 겁내고 계시잖아요. 감히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는 못하실 겁니다.”

탑상 위의 푹신푹신한 커다란 담요 안에 쏙 들어가 있는 엽연채는 조그만 입을 배죽거리며 거절했다.

“난 여기서 부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거야.”

추길의 말대로 이곳은 너무 크고 휑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들 두 사람의 보금자리였다. 그녀는 주운환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자신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추길은 말문이 막혔다. 자나 깨나 주운환만 생각하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니 몹시 언짢았다.

“참, 어제는 눈이 안 왔지?”

“네, 오지 않았어요.”

엽연채가 화제를 바꾸자 이번에는 혜연이 대답했다.

“오늘도 안 왔고?”

“예!”

혜연이 고개를 주억이자 엽연채는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가서 활을 좀 쏘자꾸나!”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운걸요.”

“그래도. 요 며칠 계속 누워 있었더니 허리 모양이 다 변할 지경이다.”

혜연이 만류했지만, 엽연채는 뜻을 꺾지 않고 손바닥으로 허리 뒤쪽을 두드렸다.

“겨울이라고 해도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 된다. 자주 몸을 움직여야 돼. 그래야 건강해지지.”

혜연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에요.”

엽연채는 혜연을 끌고 침실 쪽으로 달려가더니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갑옷과 비슷하게 생긴 붉은색의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고, 승마화를 신었다.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까지 걸친 그녀를 보더니 혜연은 과장되게 이야기했다.

“마님께서 궁술을 잘 익혀 놓으시면 나리께서 돌아오셨을 때 분명 깜짝 놀라실 거예요.”

엽연채는 그 말에 들뜨나 싶더니 이내 조금 우울한 모습을 보였다.

무도장으로 향한 엽연채는 동쪽으로 또 서쪽으로 활을 쏘며 더없이 즐거워했다.

“와! 명중할 뻔했어요!”

혜연이 말했다.

“엥? 왜 하늘로 날아간 거지?”

청유가 말했다.

“와! 하늘에서 새가 떨어진다! 마님, 정말 대단하세요! 사냥도 하실 수 있겠어요.”

소월이 감탄하자 여종들은 다 함께 손뼉을 쳤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정말로 화살에 맞은 새 한 마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한순간에 과녁조차 맞추지 못하는 사람에서 사냥도 할 수 있는 능력자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쏜 화살은 전부 빗나갔으니 이게 어디 실력으로 맞춘 것이겠는가.

청유는 아주 기뻐하며 달려가 그 새를 집어 들더니 다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마님, 비둘기예요. 양념을 발라서 구울까요? 아니면 탕으로 끓일까요?”

엽연채가 얼핏 보니 청유의 손에 들린 건 정말로 비둘기였고 몸에 꽂힌 건 바로 자신이 쏜 화살이었다. 녀석은 구구 울면서 날개와 다리를 파닥거렸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순간 멍해졌다. 그 비둘기의 다리 부분에 작은 죽통 하나가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분명 전서구傳書鳩였다.

“양념을 발라 굽는 게 낫겠네, 하하하.”

혜연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른 전서구를 건네받았다.

“너희들은 얼른 작은 주방에 가서 준비를 하거라.”

엽연채의 분부에 소월과 청유는 즐거운 모습으로 달려 나갔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혜연은 화살에 맞은 그 전서구를 들고 엽연채에게 다가섰다.

“마님, 보세요. 전서구예요.”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서구는 전서구인데, 관아가 아니라 개인이 기른 녀석처럼 보였다.

엽연채는 손을 뻗어 그 비둘기의 다리에 묶여 있는 조그만 죽통을 풀었다.

“누가 보낸 건지 모르겠구나. 이 비둘기는 아무래도 못 살릴 것 같으니 서신이나 한번 보자꾸나. 정보를 얻어 낼 수 있을지 어디 보고 주인이 짐작 가면 서신을 보내 주자.”

엽연채는 조그만 죽통을 열더니 안에서 돌돌 말려진 서신을 꺼냈다. 천천히 펼치자 혜연이 가까이 다가와 서신을 들여다봤다. 보니 서신 위에는 반듯반듯한 글씨체로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거짓으로 도망침. 동우산東牛山으로 유인하면 지원군이 있음.」

엽연채와 혜연은 서신을 읽고 어리둥절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 동우산이란 단어를 본 적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러셔요?”

엽연채의 말에 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려 냈다.

“참! 지난번에 저희가 추씨 가문으로 마님을 뵈러 갔을 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 서책을 꽤 많이 사지 않았나요? 그때 마님께서 지지地誌를 꽤 많이 구입하셨잖아요.”

엽연채는 맹한 표정을 짓더니 곧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지지를 꽤 많이 샀었지.”

엽연채는 화본 보기를 아주 좋아했지만 주운환이 도성을 떠나자 온종일 그를 염려하느라 화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 책방에 갔을 때도 화본 대신 지지를 한 무더기 구입했다.

주운환은 이번에 비적들을 추격하러 남하했다. 그에 엽연채는 지지를 사 와서 남쪽 지역의 특색과 풍습을 살펴봤다. 그쪽 지역이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면 그래도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가자. 돌아가서 지지를 다시 살펴보자꾸나.”

엽연채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활을 한쪽에 내려놓았고, 혜연은 그 비둘기를 받쳐 들며 물었다.

“그럼 이 비둘기는 어떡할까요?”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니 비둘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전서구인지라 어떤 단서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푹 익히렴.”

말을 마친 엽연채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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