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46화 (546/858)

제546화

엽연채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더니 우선 진씨에게 예부터 올렸다.

“어머님.”

진씨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중이기에 엽연채에게도 한결 부드러운 기색을 보였다.

“일어나거라.”

주묘서는 엽연채가 진씨에게만 예를 올리고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자 조그만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제 자신은 곧 있으면 황후가 될 귀인인데 엽연채는 감히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난번 꽃놀이 연회에서 태자가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던 일이 또 떠올라 주묘서는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황후가 되고 나면 그때 엽연채를 무릎 꿇릴 것이다.

주묘서는 거짓웃음을 지으며 엽연채를 불렀다.

“작은새언니.”

“큰아가씨.”

엽연채는 그제야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새언니, 어서 앉아요.”

주묘서는 언짢은 기분을 참으며 엽연채에게 마음에도 없는 호의를 베풀었고 엽연채는 하좌의 권의에 앉았다.

주묘서는 엽연채가 알랑방귀를 뀌려는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한층 짜증이 치밀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느냐?”

진씨가 먼저 운을 떼자 엽연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자부에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어 아가씨를 보러 왔습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전 잘 지내고 있거든요.”

주묘서는 득의만만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 녹지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엽연채에게 조롱 섞인 말을 건넸다.

“마님, 태자비 마마를 뵈러 가셨다면서요.”

방금 전 밖에 나갔던 녹지는 엽연채를 데리고 왔던 어린 환관을 보더니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에 엽연채가 태자비의 처소에서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묘서는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불현듯 작년 일이 떠올랐다. 당시 태자비가 엽연채를 특별히 신경 써 줬기 때문에 자신 역시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주묘서는 전에 주씨 가문에서 지낼 땐 그 무렵을 언급하는 걸 극도로 꺼렸다. 태자부에서 비참하게 쫓겨난 것이 몹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후 태자의 측비가 되었고 이젠 머지않아 황후가 될 것이었다. 과거의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던 경험이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고 역습을 가해서 판을 뒤집은 찬란한 행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꺼내도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호호호. 태자비 마마를 뵈러 갔었군요! 에휴. 마마는 자중하는 법을 모르시지만 어쨌든 새언니에게는 꽤나 살갑게 대하셨으니까요. 그러니 새언니는 당연히 마마를 뵈러 가야지요.”

엽연채는 능청을 떠는 주묘서를 보며 피식하더니 청화 찻잔을 살며시 들어 올린 채 그 가식적인 모습을 구경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때 저희는 이곳에 함께 왔었죠……. 어느새 일 년이 흘렀네요. 이곳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저희의 처지는 크게 바뀌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새언니는 전과 마찬가지로 가끔 이곳에 오지만… 전… 가끔 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됐어요. 전 이곳에 살게 됐으니까요. 호호호…….”

“호호호.”

진씨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지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삐죽거렸고 뒤에 있던 혜연과 추길도 자신을 과시하는 주묘서의 농담을 듣고는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멋……!”

그때, 뒤에 있던 춘산이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들고 있던 쟁반을 하마터면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가까스로 제때에 손아귀에 힘을 준 춘산은 고개를 돌려 녹지를 쳐다봤다. 방금 전 녹지가 그녀를 툭 밀쳤기 때문이다.

춘산은 이계가 전달한 물건을 여태껏 들고 있었다. 곳간 열쇠와 난인 말이다.

이 물건들은 보통 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묘서는 그것들을 계속 들여다보았고, 아예 계속 손에 들고 있으라고 했다. 누군가가 와서 이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얘, 춘산아. 왜 그러느냐?”

진씨는 고개를 들어 춘산을 바라봤다. 진씨와 주묘서는 어떻게 해야 난인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적절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역시나 영민한 녹지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들고 있는 건 태자비 마마만이 가질 수 있는 난인과 태자부의 곳간 열쇠야. 절대 떨어뜨리면 안 된다, 하하하!”

엽연채와 두 여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씨 모녀는 엽연채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를, 그리고 자신들의 환심을 사려고 안달이 난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눈을 돌려 엽연채를 쳐다보니 그녀는 마치 아무 말도 못 들은 사람처럼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모녀는 얼굴이 굳어졌다.

“시간이 늦었군요. 큰아가씨가 편안해 보이니 저도 안심이 됩니다. 어머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다만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작별 인사를 전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엽연채가 자신들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흥을 깨며 돌아가 보겠다는 소리나 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자신들만 공연히 우쭐거린 꼴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진씨 모녀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고 엽연채가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진씨가 입을 열기도 전에 엽연채는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을 향했다.

진씨는 엽연채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저게 대체 무슨 태도인 게냐!”

“마님…….”

춘산은 얼른 진씨를 부르며 그녀를 제지했다.

“측비 마마는 여전히 셋째 나리에게 기대고 계십니다.”

그녀는 이 말로 진씨 모녀를 상기시켰다.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주운환에게 기대야 잘나갈 수 있는 거고 주운환이 없으면 주묘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진씨는 낯빛이 어두워졌고, 주묘서는 되씹을수록 분통이 터져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다짐했다.

“내가 황후가 되면 톡톡히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저 인간이 앉고 싶어 하면 세워 놓을 거고 서 있고 싶어 하면 무릎을 꿇게 만들 거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탑상 위에 털썩 앉았다. 난인을 쳐다봐도 좀 전만큼 흥이 오르지 않았다. 이건 그저 난인에 불과했다. 언제쯤 비로소 진정한 봉인鳳印을 손에 쥘 수 있을까?

주묘서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정선제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 죽지도 않는 늙은이! 반송장인 채로 보름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안 죽는 거야? 공연히 사람 애만 태우게 하고 말이야.’

전에는 태자비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씨와 주묘서는 좀 더 참을성 있게 굴었다. 하지만 이제 태자비는 제거되었고 난인까지 얻게 됐으니, 딱 한 발짝만 더 앞으로 내디디면 황후가 되지 않는가.

여기에 엽연채에게 자극까지 받자 주묘서는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다.

한편, 묘언헌을 나온 엽연채는 바로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추길이 말했다.

“오춘 말이에요. 그냥 이렇게 도망가게 놔두실 거예요? 저희가 태자 전하께 그자를 넘겨 버리면 되는데 굳이 그자를 놔줄 필요가 있을까요? 태자 전하께서 그자를 못 잡으면 아무나 대신할 사람을 찾으실 거예요.”

“이 바보야!”

혜연은 그녀를 쏘아봤다.

“오춘이 고통을 못 견디는 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럼 매 한 대만 맞아도 사실을 전부 털어놓을 거야. 자신이 그렸던 사람이 실은 마님이라고 실토할 텐데, 그럼 마님의 평판이 나빠질 거 아냐?”

어느 여인이든 간에 이런 일에 엮이게 되면 좋은 꼴은 못 보기 마련이었다. 태자비 같은 결말이 나는 건 아니라고 해도 명예와 절조에 흠집은 무조건 생기게 된다. 그러니 오춘을 태자에게 넘겨서는 안 됐다.

태자비도 엽연채를 대상으로 흉계를 꾸몄다고는 감히 자백하지 못할 터였다. 본인이 섣부른 행동을 해 망신을 자초한 상황이잖은가. 설령 원래는 엽연채를 그렸던 거라고 말한다고 해도 평판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어찌 됐든 태자비의 그림은 확실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실상을 밝힌다고 해도 기껏해야 엽연채를 끌어들이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태자비는 감히 그런 짓을 벌이지 못할 터.

그녀가 스스로를 춘화도의 인물로 그린 건 처첩들 간의 총애 다툼에 국한된 일이었다. 하지만 진서후 부인을 모해하려 했다는 죄명까지 쓰게 되면 요씨 가문과 진서후부의 다툼으로 비화되고 만다.

그럼 태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요씨 가문이 진서후부를 음해하려 했다고 주장하며 요씨 가문을 아예 축출할 것이다. 설령 태자가 이 일을 더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해도 나중에 주운환이 돌아오면 요씨 가문에 책임을 물으려고 할 테고 말이다.

그러니 태자비는 감히 더는 엽연채를 끌어들일 수 없고 엽연채도 차마 이 일을 주운환에게 알리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주운환도 다른 사람이 엽연채를 해치려고 춘화도를 그렸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둘 테니 말이다.

“이건 이미 지나간 일인 거야.”

혜연이 말을 이었다.

“마님이 사람을 시켜 오춘을 주시하고 계셔. 만약 그자가 감히 그런 일을 또 맡는다면 우리가 처리해 버리면 돼.”

추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방금 전 엽연채가 주묘서의 체면을 조금도 살려 주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더니 걱정이 되었다.

“마님, 주 측비가 좀 천박하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이제 난인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향후…….”

지금 정선제는 병이 고황에 들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죽게 되면 주묘서는 황후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주묘서가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주묘서를 상관하지 않을 거다.”

추길이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추길은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마님은 지난번에 태자비가 했던 말을 걱정하지 않는 건가? 주묘서를 무너뜨리고 엽미채로 주묘서를 대신하겠다고 했는데.’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주 측비도 나리의 누이동생입니다. 마님이 정말로 주 측비를 무너뜨리고 셋째 아가씨를 측비로 만드신다면… 나리는 분명 마님이 친정만 생각하고 시댁은 마음에도 없다고 생각하실 거예요. 주 측비와 나리가 돈독한 사이는 아니지만 이건 태도 문제입니다.”

엽연채는 표정이 착 가라앉더니 나무라듯 대꾸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행입니다……. 하긴 애당초 성사시키기도 어렵긴 하죠.”

추길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엽미채가 정말로 주묘서를 대신해 태자부로 들어가게 된다면 향후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자매가 서로를 돕고 보살필 텐데, 그럼 엽연채에게 자신을 대신해 아첨을 해 줄 수족이 그 이상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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