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엽연채가 대문을 넘어서자 널찍한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안으로 들어서면 시녀들이 부산을 떨며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자가 하인들을 전부 철수시키고 태자비만 혼자 이곳에 유폐한 것이 틀림없었다.
엽연채는 널찍한 정원을 지나 낭하에 올라 문으로 들어섰다.
태자비는 침상에 처박혀 있었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걸어나온 태자비는 엽연채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을 보더니 증오심이 불타올라 그녀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엽연채, 이 빌어먹을 년. 감히 정말로 이곳에 오다니!”
엽연채를 이곳으로 부른 사람이 바로 태자비였다. 그녀는 노여움이 치솟았고 그뿐만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엽연채에게 반드시 물어봐야 할 것이 있기에 시녀를 통해 엽연채에게 첩자를 보낸 것이다.
태자비가 가사 관리권을 빼앗겼다고 해도 십여 년 동안 집안을 관장해 왔으니 하루아침에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녀를 따르는 하인들이 꽤 있었고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소한 일은 그녀를 위해 해 주려고 했다.
예를 들면 지금처럼 엽연채와 만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어린 시녀들의 눈에는 태자비와 엽연채의 사이가 괜찮아 보였다. 아마 태자비가 엽연채에게 부탁할 게 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해 주저 없이 서신을 전달해 줬다.
태자비는 증오를 활활 불태우며 엽연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엽연채는 손쉽게 태자비를 밀쳐 버렸고, 태자비는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이, 이 천한 년!”
“천한 년이요? 어디 마마만 하겠습니까!”
엽연채는 피식 차디찬 웃음을 지었다.
“네가 한 짓이냐? 정말 네년이 한 짓이야?”
태자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유폐되어 있는 동안 그녀는 깊이 생각해 봤다.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화첩을 받았을 때 그녀와 석 마마 모두 화첩을 검사했고 틀림없이 엽연채가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에도 석 마마가 직접 환관의 손에 그 화첩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째서 인물이 자신으로 바뀐 것일까? 설마 두 어린 환관이 바꿔치기한 것일까? 아니,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으로 바꾸게 되면,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태자는 분명 그 화첩을 챙기지 않았을 것이다. 태자가 받지 않게 되면 가장 먼저 재수 옴 붙게 되는 건 바로 그 두 어린 환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그리 제멋대로 행동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일이 벌어졌을 때, 오춘은 이미 도망간 후였다. 어째서 내뺀 것일까?
태자비는 생각하면 할수록 의심스러웠다. 엽연채를 모해하려고 했는데, 덫에 걸린 사람은 도리어 본인이 되었으니까. 엽연채가 미리 정황을 알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게 틀림없었다.
“예.”
엽연채는 비웃음을 지으며 조롱기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엽연채는 야유하는 모습 또한 이리도 곱고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러자 질투심에 사로잡힌 태자비는 눈에 핏발이 다 섰다.
“마마, 정말로 기막힌 계획을 세우셨더군요. 거슬리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저희 주씨 가문을 아예 뿌리 뽑으려고 하셨죠. 그래서 절 그린 춘화도를 태자 전하께 보내려고 하셨나요?
태자 전하께서 제게 나쁜 마음을 품고 부적절한 짓을 하게 만든 다음, 제 부군께 그 일을 폭로하여 태자 전하와 주씨 가문이 반목하게 만들려고 하셨죠. 그리되면 태자 전하께서는 주씨 가문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어디 그뿐인가요. 의심을 살까 봐 엽미채를 이용해 협력하자는 거짓 계획까지 제시하며 절 미혹하셨죠.”
“이!”
태자비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화를 냈다.
“화첩에는 분명 네가 그려져 있었다!”
“아닙니다. 처음부터 화첩에는 마마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제가 오춘에게 화첩에 마마를 그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화첩을 가져와 연우묵煙雨墨을 이용해 마마의 모습을 제 모습으로 바꿨습니다. 그런 뒤 다시 오춘에게 돌려줬죠.”
“연우묵이 무엇이냐?”
태자비는 어리둥절했다.
“아. 마마는 모르시는군요. 하기야 이 먹은 희귀한 종류거든요. 아마 먹과 벼루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들만 알 겁니다. 휘발성을 지닌 먹인데 그림을 그린 후 열두 시진이 지나면 감쪽같이 사라집니다.
마마와 석 마마는 스스로 단정하다고 자부하여 춘화도를 몹시 경멸했을 테니 검사를 한 뒤에는 두 번 다시 보지 않고 곧바로 아랫사람에게 건넸겠죠. 그래서 화첩이 그 환관의 손에 들어갔을 때 저를 그렸던 먹은 날아가 버리고 원래 오춘이 그려 놓았던 태자비 마마의 그림이 드러난 겁니다.”
엽연채는 오춘의 그림 위에 자신의 모습을 직접 덧그렸었다. 차마 남에게 자신이 역겨운 짓을 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태자비는 그 말을 듣더니 현기증이 났고 너무나도 고상하게 굴었던 자신과 석 마마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엽연채의 말대로였다. 혐오감에 춘화도를 당장이라도 내버리고 싶었으니 어디 한 번 더 살펴보려고 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태자비는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자신과 석 마마가 환관들에게 화첩을 건넬 때 딱 한 번만 더 봤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자비는 생각하면 할수록 달갑지가 않았다.
“이 빌어먹을 년! 감히 날 모해하다니!”
그녀는 욕설을 내뱉으며 재차 엽연채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엽연채가 옆에 있던 찻잔을 팩 집어 던지는 게 한발 더 빨랐다.
찻잔을 밟은 태자비는 중심을 못 잡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지더니 ‘아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
엽연채는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왜 마마가 절 모해하는 건 되고 제가 마마를 모해하는 건 안 되는 겁니까? 마마가 절 모해하면 전 얌전히 당해야 하는 겁니까? 그래야 저의 현숙한 면모를 보여 줄 수 있는 겁니까?”
할 말을 다 한 엽연채는 돌아서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다.
태자비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손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기겁을 하며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쳐다봤다.
“어떻게 알아챈 것이냐……. 태자 전하께서 네게……!”
엽연채는 이미 문 입구에 도착했는데 그 말을 듣더니 붉은 입술을 쓱 위로 올렸다. 그녀는 몸을 살짝 기울여 역광 속에 서서는 이렇게 대꾸했다.
“어떻게 알아챘냐고요? 아주 오래전에 알아챘죠.”
태자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아주 오래전? 작년에 엽연채를 태자부로 불러 말린 꽃을 만들고 차를 우리게 했을 때 이미 다 눈치챘다는 말인가?’
그 말인즉슨 자신의 계책이 오래전에 이미 엽연채에게 들켰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당시에는 왜 반항하지 않았지? 왜 적극적으로 태자부에 오려고 했단 말인가?’
생각을 이어 가던 태자비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또다시 욕을 퍼부었다.
“이 천박한 것! 이 음탕한 년!”
그녀는 깨달았다. 엽연채는 글러 먹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본인을 이용해 태자의 총애를 받으려고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전연 저항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엽연채가 당시에 주운환이 서자인 걸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엽연채는 그때 정말로 태자를 유혹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이 성사되지 않았는데 주운환은 그사이 처지가 확 뒤바뀌었다. 장원급제를 하고 후야에 봉해져 엽연채는 고귀한 후 부인이 되었다. 그러니 어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었겠는가? 바로 손을 뗐던 것이다.
엽연채는 뒤에서 들러붙는 태자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더니 그곳을 떠났다. 선홍색 옷을 입고 널찍한 정원을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유난히도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선 태자비는 문틀에 기대어 끝없이 저주를 퍼부어 댔다.
“엽연채, 이 천박한 년! 넌 제명에 못 죽을 게다! 주묘서 그 빌어먹을 년과 한편이 되려는 게냐? 하하하. 어림없다! 죽을 날이나 기다리고 있거라!”
주묘서는 단 한 번도 주운환을 거들떠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정말로 황후가 된다면 분명 주운환과 엽연채를 제거할 방법을 강구할 것이고, 그럼 그때가 바로 엽연채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날일 것이다.
태자비는 주묘서와 엽연채가 서로 물고 뜯고 할 모습을 떠올리자 증오심이 솟구치는 와중에도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자신은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파렴치한 것들이 서로에게 이를 세우다가 결국 공멸하는 꼴을 지켜볼 것이다.
엽연채는 뒤에서 태자비가 퍼붓는 저주의 말을 들으며 붉은 입술을 쓱 올리더니 대문을 넘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일림이라는 그 어린 환관은 아까 그곳에서 엽연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얼른 몸을 굽히며 앞으로 다가왔다.
“부인, 말씀은 잘 나누셨습니까?”
“그래.”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음, 주 측비를 보러 가자꾸나.”
이왕 태자부에 오게 됐으니 주묘서를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람들은 늘 자신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일부러 주묘서와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 주묘서가 해 줘야 할 중요한 일도 있지 않은가.
“부인, 이쪽으로 가시지요.”
어린 환관은 부지런히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참. 아직 부인께서 모르시는 경사가 있습니다. 태자부의 가사 관리권이 주 측비 마마께 넘어갔습니다. 앞으로 주 측비 마마께서 더욱 홍복洪福을 누리실 겁니다.”
“그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과연 큰 경사로구나!”
이는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태자는 진작부터 주묘서를 안주인으로 세울 마음을 갖고 있었다. 태자비 일은 그야말로 손 안 쓰고 코 푼 격으로, 태자비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면 당연히 주묘서를 밀어줄 것이었다.
엽연채는 천천히 묘언헌으로 향했다.
그 시각 묘언헌.
진씨와 주묘서는 태자부의 가사 관리권을 얻었다는 기쁨에 흠뻑 취해 있었다.
“마마, 진서후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시녀가 이리 고해 오자 모녀는 어리둥절했다.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여긴 왜 왔을까요? 아, 알겠다……. 하하하.”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였다. 옆에 있던 녹지도 냉소를 지으며 거들었다.
“태자비가 무너졌고 머지않아 태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면 마마는 황후 마마가 되시니 분명 비위를 맞추러 온 걸 겁니다.”
주묘서는 입꼬리를 당기며 단정한 자세로 앉았다.
“안으로 뫼시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