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44화 (544/858)

제544화

그 일의 ‘진상’이 밝혀지자 요씨 가문은 한순간에 온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감히 문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편, 조정 신하들과 귀족들은 태자가 시조始祖의 행동을 따라 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제의 초대 황제는 제위에 오르더니 태자비였던 여씨 대신 다른 중신의 여식을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왜냐하면 그때 여씨의 친정이 몰락했기 때문이다.

대제의 시조는 버젓이 그런 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였으니 사람들은 몇 마디 하는 게 고작이었고 감히 여러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태자비는 이렇게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당장 그녀를 폐위하지 않았으니 이것만으로도 태자는 이미 인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태자가 제위에 오르면 황후의 자리는 분명 다른 여인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태자는 태자비 일을 처리하고 나니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원래부터 어떻게 해야 태자비를 차 버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태자비가 스스로 약점을 갖다 바친 것이다. 그야말로 졸고 있는 사람 앞에 때마침 베개가 나타난 격이었다.

봉쇄되어 있는 정화원에는 처량하고 비참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반면에 묘언헌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장 폭죽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날 이른 아침, 진씨는 마차를 타고 주묘서를 보러 갔다.

묘언헌으로 들어서니 주묘서가 나른한 모습으로 비스듬히 탑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씨는 감격스러워하며 그녀 앞으로 달려갔다.

“서야. 내 딸아.”

“어머니.”

주묘서는 진씨를 보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절 보러 오셨군요. 그러잖아도 어머니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와 함께 나눌 즐거운 일이 한가득 있거든요.”

“알다마다. 그래서 이 어미가 널 축하해 주려고 이리 온 거 아니겠느냐?”

진씨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모녀는 탑상에 앉았고 주묘서는 녹지와 춘산만 남기고 다른 시녀들은 전부 밖으로 내보냈다. 듣는 귀가 사라지자 주묘서는 진씨와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만 모녀는 아직 마음속 깊숙한 곳에 둔 말은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 있던 시녀가 주묘서를 불렀다.

“마마, 이 공공이 왔습니다.”

“이 공공?”

주묘서는 어리둥절했다. 이 공공이라면 이계 아닌가. 그는 태자를 곁에서 모시는 측근으로 태자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서 안으로 들이거라.”

녹지는 직접 그를 맞이하러 나갔고 잠시 후 이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계의 뒤로 어린 환관 둘도 따라오고 있었는데 각자 쟁반 하나를 들고 있었다.

“측비 마마를 뵈옵니다.”

“이 공공,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주묘서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웬일인가? 이 시간이면 태자 전하께서는 조정에서 정무를 보고 계시지 않은가?”

이계는 몸을 일으키더니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예. 태자 전하께서 소인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내리셔서 소인은 입궁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 일이 바로 이것이옵니다.”

그가 말하는 사이, 뒤에 있던 두 어린 환관이 앞으로 나왔다. 한 쟁반 위에는 난새 문양이 들어간 정교한 도장 한 개가, 다른 쟁반 위에는 열쇠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이건…….”

주묘서와 진씨는 감격스러웠고 놀랍고도 기뻤다.

주묘서는 교양 있는 사람은 못 되지만, 그래도 적장녀로서 배워야 할 것들은 다 배웠다. 가사家事나 집안을 다스리는 것 같은 기본적인 일들은 진씨에게서 몇 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그녀는 이 물건들을 보자마자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건 태자비의 난인鸞印과 태자부의 곳간 열쇠였다. 즉, 그녀에게 집안을 다스리라는 의미였다.

“이건 난인과 곳간 열쇠이옵니다.”

이계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마마는 총명하고 기민한 분이시니 분명 태자부를 잘 관리하실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주묘서는 솟구쳐 오르는 흥분과 기쁨을 간신히 누르고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 공공, 과찬이네. 이건… 그저 전하께서 날 아끼셔서 맡기시는 것뿐이네.”

“그럼 앞으로 태자부 일은 마마께서 맡아 주십시오.”

녹지와 춘산은 물건들을 건네받았고, 이계는 다시 예를 올린 후 환관들을 데리고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그들이 대문을 나서자 주묘서는 그제야 흥분에 겨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는 녹지가 들고 있는 쟁반 앞으로 달려오더니 난인을 집어 들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 이 난인은… 태자비의 증표인데! 그럼 전하의 뜻은……!”

“전하께서 널 인정하신 게다!”

진씨도 앞으로 뛰쳐나오더니 손을 뻗어 그 정교한 난인을 만져 보고는 주묘서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지금 태자비라는 이름은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태자비인 게다. 향후…….”

향후 태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면 주묘서는 황후로 책봉될 것이다. 시조 황제가 그랬듯이.

“어머니……!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겠죠!”

주묘서는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으이그! 이게 어떻게 꿈이겠느냐? 이건 네 운명이다! 태어날 때부터 고귀하게 살 운명이었던 게지.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난 게야! 게다가 너보다 좋은 출신과 배경을 가진 이가 어디 있느냐? 태자부는 말할 것도 없고 온 대제를 다 뒤져 봐도 너보다 고귀한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게다.”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눈빛을 번뜩였다. 어떤 일들은 정말로 다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 * *

한편, 묘언헌을 나온 이계는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주묘서가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흥분해 있을 줄 익히 알았다.

당연했다. 그 물건은 말하자면 황후 자리를 약속하는 증표였다. 누구라도 기대와 희망으로 뒤설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자 이계는 옅은 한숨이 나왔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주묘서의 성격과 지능은 황후의 자리에 앉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주운환이 능력 있는 사람이니 어찌하겠는가. 주씨 가문의 권세는 그토록 막강했다.

이렇듯 뒷배가 충분하기만 하면 황후가 되기에 충분할 때도 있는 법이었다.

황제가 그녀의 친정을 중요하게 여기기만 하면 황후로서의 체면을 세워 줄 것이다. 궁 안의 여인들도 그녀의 출신이 좋기 때문에 감히 그녀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이계가 이런 상념에 빠져 반월공문半月拱門을 지나가는데 저 멀리 아름답고 화려한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붉은색 치마를 입고 있는 그녀는 추운 겨울에도 불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계는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바로 엽연채였다.

그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진서후 부인을 뵈옵니다.”

“아. 이 공공,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얼른 그를 부축하려는 시늉을 했다.

엽연채는 도성 안에서 실로 유명하기도 할뿐더러 주묘서의 새언니이기 때문에 태자부의 하인들이 지체 없이 그녀를 들여보낸 것이다.

엽연채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전에는 태자부에 한 번 오려면 첩자가 있어야 했고 온갖 수단을 다 써야 태자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고 한 발짝 내디딜 때도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런데 이젠 이곳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권세였다.

“주 측비 마마를 보러 오셨습니까?”

이계는 미소를 지으며 용무를 물었다.

“겸사겸사 왔네.”

그리 답하던 엽연채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태자비 마마의 일을 들었네……. 에휴,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셨을까!”

“집안의 허물은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진상은 밝혀지기 마련이죠…….”

이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반응에 엽연채의 곱고 아리따운 눈동자에 조롱기가 살짝 스쳤다. 이는 자신이 폭로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튼… 난 태자비 마마와 친분이 있으니 마마를 뵈러 왔네.”

엽연채의 말에 이계는 어리둥절했다. 지금 태자비는 천박하고 뻔뻔한 탕부蕩婦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 다들 태자비를 뱀이나 전갈을 보듯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진서후 부인은 그녀를 만나려고 구태여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순간, 이계는 불현듯 작년에 태자비가 엽연채를 여러 번 태자부로 불러 말린 꽃을 만들게 하고 차를 우리게 했던 일이 떠올랐다. 엽연채는 자신이 그때 태자비의 계략에 말려든 것임을 아직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태자비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고만 여길 터.

당시 고작 서자의 아내에 불과했던 엽연채에게 태자비의 그런 보살핌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도 같았을 것이고, 분명 지금까지도 자신을 보살펴 줬던 태자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가 맑고 투명한 커다란 두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맑고 투명한 물결이 남실거리는 듯 반짝이고 있었고 또 진심 어린 간절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이계는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무정한 분은 아니십니다. 부인께서 옛정을 생각하신다고 하니 그럼 가셔서 마마를 뵈십시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예를 표했다.

“고맙네, 이 공공. 그럼 난 이만 가 보겠네.”

“예. 일림아, 네가 부인께 길을 안내해 드리거라.”

이계는 자기 뒤에 있는 어린 환관을 불렀고, 지시를 받은 어린 환관은 엽연채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이계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쨌든 엽연채는 주묘서의 새언니이고 주묘서 쪽 사람이니 태자비에게 유리한 일을 하지는 않을 터였다.

게다가 태자는 여전히 엽연채에게 얼마간 마음을 품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서 있던 사람이 태자였다면 미인이 말간 눈으로 간절히 저를 바라보고 있으니 돌로 만들어진 마음이라고 해도 스르륵 녹아내렸을 테니, 분명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태자비에게 보냈을 것이다.

한편, 엽연채는 어린 환관을 따라갔고 잠시 후 정화원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입구에 서더니 고개를 들어 금박이 돋보이는 편액을, 생동감 넘치는 필체로 적힌 커다란 세 글자 ‘정화원’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어린 환관에게 일렀다.

“난 들어가 태자비 마마와 이야기를 좀 나눌 것이니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예.”

어린 환관은 대답한 뒤 대문 밖에 섰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