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43화 (543/858)

제543화

보다 못한 석 마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전하……. 마마의 마음속에는 늘 전하뿐이었습니다……. 태자비 마마이십니다. 마마께서 이런 일을 하실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천한 것! 그 입 다물거라!”

그러나 태자는 노성을 치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태자비를 쏘아볼 뿐이었다.

“총애 다툼은 당연히 할 수 있소. 하지만 석 마마가 말했듯이 당신은 태자비요! 그런데 이런 파렴치한 수법을 쓰다니. 당신 같은 사람은 태자비가 될 자격이 없소! 그리고 이 물건은 정말이지 역겹기 그지없소! 내겐 악몽이나 다름없다, 이 말이오!”

말을 마친 태자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걸어갔다.

태자의 마지막 말은 태자비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았다. 그녀는 몸을 기우뚱하더니 힘없이 나부라지고 말았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이럴 순 없어…….’

“쯧쯧. 죄짓고는 못 사는 법이죠.”

주묘서는 앞으로 걸어가 비웃음과 쾌감이 섞인 눈빛을 보내더니 이내 그곳을 떠났다.

전 서비와 백여언 등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태자비는 정말로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럼 주묘서는 더욱 기고만장해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란 게 그렇다. 힘이 비슷한 두 세력은 공존할 수 없는 법.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돌아서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리고 누군지는 몰라도 개중 한 명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기루의 기생 어미 같네. 거기다 심지어 본인을 팔다니.”

태자비는 눈앞이 캄캄해졌고 탑상에 엎드려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까무러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뜻대로 할 수 없었다.

* * *

태자비는 총애를 얻기 위해 자신을 춘화도 속 인물로 그린 후, 심복 환관들에게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태자가 그들의 손에 들린 춘화도를 발견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럼으로써 태자의 흥미를 끌려고 했다.

태자는 강직한 사람이기에 이런 비뚤어진 유혹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화가 난 태자는 그 자리에서 두 환관을 포박했고 정화원으로 가서 태자부의 사람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태자비가 이실직고하게 했다.

태자비는 당연히 억울하다고 외쳤지만 물증과 증인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두 환관도 태자비가 그리하라고 시킨 거라며 인정을 했다.

이튿날, 태자부는 이 일로 발칵 뒤집어졌고 그뿐만 아니라 소식이 도성 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 추문을 들은 도성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참지 못했고, 하마터면 입 속에 있는 밥알을 내뿜을 뻔했다.

찻집과 주루, 공연장 어디에서든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태자부에서 이런 추잡한 일이 일어났는데 태자는 뜻밖에도 이 일을 숨기거나 덮지 않고 오히려 태자부 사람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즉, 그는 이 일을 은폐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도리어 대대적으로 퍼뜨리려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어쩜 그리 천박할 수가 있지? 자기 자신을 춘화도 속 인물로 그리다니. 쯧쯧. 집안의 안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첩실이나 통방이라고 해도 그런 일은 벌이지 못할 거야!”

“게다가 죽은 사람 같은 그런 경직된 얼굴로 말이야. 누가 태자비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를 춘화도 속 인물로 그리면 태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본 사람은 깜짝 놀라 죽을 뻔했을걸.”

공연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태자는 여색에 흔들리지 않는 사내지…….”

오십 대로 보이는 한 사내는 그리 말하며 같은 탁자에 앉아 있는 몇몇 사람들과 눈빛을 주고받았고, 다음 순간 모두 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여색에 흔들리지 않는 사내는 무슨. 분명 못생긴 태자비가 춘화도에까지 그려졌으니 기겁했을 뿐! 절세미녀가 그려져 있었다면 분명 이런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 * *

그 시각, 요씨 가문.

태자비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 알게 된 요씨 가문 사람들은 순식간에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사실 태자비에게 일이 생기자마자 그녀의 심복이 바로 요씨 가문에 이를 보고했고, 소식을 들은 요양성은 화가 나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이튿날, 그는 휴가를 내고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나갔다가는 조회가 끝난 후에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것이었다.

요 부인과 요 노부인은 이날 이른 아침 황후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궁한 두 사람이 봉의궁에 도착하자 봉의궁 사람은 그들에게 황후가 정선제 곁에서 병간호를 한다고 알려 줬다. 두 사람은 정오까지 기다린 후에야 봉의궁으로 돌아오는 정 황후를 배알할 수 있었다.

요 부인과 요 노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펑펑 쏟았다.

“황후 마마, 태자비 마마는 분명 누명을 쓰신 겁니다. 그러니 마마께서… 태자비 마마를 위해 이 일을 해결해 주십시오……. 흑흑흑…….”

정 황후는 자신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저 혐오감이 들 뿐이었다. 그녀는 상서로운 용 문양과 봉황 문양이 들어간 탑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더니 냉소를 지었다.

“참 서럽게도 우는구려!”

“마마… 마마…….”

요 노부인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태자비를 연신 변호했다.

“태자비 마마께서 그런 일을 하셨을 리가 없사옵니다.”

정 황후는 동그스름한 얼굴의 빛깔을 바로잡더니 목청을 높였다.

“무엄하다!”

요 노부인과 요 부인은 고개를 들어 정 황후를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에 황후는 요씨 가문 사람들에게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 황후랍시고 거드름을 피우지도 않았고 항상 자신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안면몰수를 할 줄이야.

“감옥 안의 범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억울하다고 소리치는데, 설마 그자들이 전부 다 억울한 사람들이겠는가?”

정 황후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마마… 태자비 마마는…….”

“요 노부인,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정 황후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태자비는 명백히 잘못을 저질렀네. 한데 그대들이 이렇게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소란을 피우며 억울하다고 하면 억울한 일이 된단 말인가? 아니면 태자비이니 벌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우리 황실에서 태자비를 억울하게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서 태자비에게 벌도 못 주게 만드는 겐가?”

요 노부인은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그럼 울면서 법석을 피울 게 뭐가 있는가? 증인과 물증이 모두 갖춰져 있네! 그런데 이렇게 찾아와 억지를 부리는 겐가? 하하. 사 마마, 두 부인을 내보내게.”

사 마마는 즉시 대답하고는 앞으로 걸어나왔다.

“두 분, 나가시죠.”

요씨 고부는 안색이 확 변했지만 감히 일언반구도 더 할 수 없었다. 기가 푹 꺾인 모습으로 사 마마를 따라 문을 나설 수밖에.

정 황후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비웃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는 태자비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학자 가문 출신이고 아버지가 상서尙書이니 태자를 보필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태자비는 평범하게 생겼지만 단정하다는 강점이 있었고, 예전에는 태자를 위해 적자도 낳아 줬었다. 결과적으로 그 적자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녀를 탓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태자에게는 서자가 두 명 더 있었기 때문에 정 황후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문제로 조급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태자는 대권을 손에 쥐었고 곧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 황후는 요씨 가문이 그저 그래 보였고, 태자 또한 태자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입장이 아니었다.

눈에 거슬리는 이상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바꿔 버리면 된다. 태자에게 더욱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요씨 가문 고부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요양성은 정 황후가 그렇게 매정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낯빛이 극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갖은 애를 써서 태자부로 하인을 들여보냈고 석 마마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된 다음에는 격정을 주체 못 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하인을 통해 태자비에게 이 일은 이쯤에서 접고 진상을 폭로해서는 안 된다며 그녀를 타일렀다. 그런 후 요 노부인의 처소에 가서 고함을 쳤다.

“지금은… 자중해야 하오!”

요양성도 반편이가 아니니 태자가 일부러 자신들에게 손을 썼음을 당연히 알아차렸다.

지금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해도 헛수고였다. 군君이 죽으라 하면 신하는 죽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죄를 씌우려고 한다면 그 구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게다가 이 일은 결코 태자비가 누명을 쓴 것이 아니었다.

한편, 태자는 사실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을 시켜 계속해서 조사하고 추궁했다.

그때 태자부의 누군가가 얼마 전에 태자비 곁에 오 마마라는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흘 전에 자취를 감췄다고 알려 왔다. 그자는 태자부의 하인으로 등록된 사람도 아니었다.

태자는 실마리를 따라가다가 오 마마라는 자가 사실 춘화도를 그리는 화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는 화가 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태자비를 혐오하기는 하나 그래도 그의 여인이었는데 감히 외간 사내를 곁에 머물게 했던 것이다.

태자는 오 화공을 잡아오려고 했지만 오 화공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난 후였다.

진작부터 태자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태자는 지금 그녀가 직접 자신의 약점을 갖다 바치니 당연히 그녀의 죄명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그래서 오춘이라는 사람을 잡을 수가 없게 되자 서쪽 거리에서 춘화도를 그리는 화공 하나를 잡아와 감옥에 처넣었고 결국 그 화공은 형벌이 두려워 자결하고 말았다.

그 후 태자비의 죄명이 정해졌다. 태자를 유혹하기 위해 파렴치하고 천박하게 스스로를 춘화도 속 인물로 그려 냈으니, 이는 음란죄에 해당하며 황실의 체면을 바닥에 떨어뜨린 죄였다.

게다가 그녀는 외간 사내를 자신의 처소로 끌어들였으니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었다.

태자는 태자비를 유폐했고 정화원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백성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 염치도 모르는 여인은 폐위도 결코 지나친 처사가 아니지. 일국의 태자비는 고사하고 여염집에서도 이런 아내는 내치려고 할걸.”

“맞아. 지위에 맞지 않는 행실을 보이면 폐위해야지. 요씨 가문에서 대체 자식을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한 걸까?”

“화공도 자백했고 두 환관도 자백했어. 물증도 있고. 그런데 태자는 어째서 아직도 태자비를 폐위하지 않는 걸까?”

“황제의 병이 위중하니 태자가 조정에 나가야 하고 또 황제 곁에서 병수발을 들어야 하잖아. 게다가 태자비는 황제의 며느리이고 황제가 직접 책봉했으니 폐위 여부도 황제가 결정해야 하는 거지.”

“이렇게 보니 태자 전하께서는 정말로 인덕仁德을 갖췄고 옛정을 생각하시는 분이시네.”

“어쨌든 십여 년을 함께 산 부부이고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군주郡主가 있잖아.”

아직 폐위가 결정된 건 아니지만 태자비의 말로가 좋을 리 없었다. 황제의 병이 위중하니 그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태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면 태자비는 황후에 책봉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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