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2화
태자비가 보니 태자는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오늘 밤에 못된 짓을 벌이지 않았는가. 태자비는 안절부절못하며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갑자기 이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 측비 마마, 백 측비 마마, 전 서비께서… 도착했습니다!”
이계는 전 서비 뒤로도 여러 명의 이름을 또 불렀는데 태자부에 있는 모든 첩실들이었다. 태자비는 밤중에 그들이 전부 이곳에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어리둥절했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어 주묘서, 백여언, 전 서비 등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갑자기 많은 여인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는데 그들은 제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태자가 자신을 불렀다는 생각에 다들 화려하게 치장을 한 참이었다.
“태자 전하와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주묘서 등은 얼른 몸을 굽히고 예를 올렸다.
“일어나거라!”
태자는 냉담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태자비가 인상을 쓰며 묻자 태자는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이계를 찾았다.
“가져오너라!”
이계는 얼른 몸을 낮추며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품속에서 분홍색 첩자 한 권을 꺼냈다.
태자비는 이 익숙한 첩자를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왜 그러시오? 이 첩자를 정말로 아는가 보오?”
태자는 냉소를 짓더니 그 첩자를 홱 가져왔다.
태자비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왜 이러는 거지? 미색에 넘어가지 않은 거야? 그 고약한 습성이 바뀌었다고? 그럴 리가! 그런 행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게다가 정말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도 일부러 이곳에 올 필요가 뭐가 있어?’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태자비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전…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는 말이오? 좋소. 그럼 내 지금 알려 주겠소!”
태자는 그리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책자를 바닥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그 책자는 바닥에 던져지면서 펼쳐져 버렸고 주묘서와 백여언 등은 목을 쭉 내밀고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들은 사내와 여인이 뒤엉켜 있는 그림을 확인하곤 깜짝 놀라 작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
“어머나……! 이게 다 무엇입니까? 아우, 망측해라!”
주묘서는 놀란 소리를 내지르자마자 태자비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게 태자비 마마의 물건이옵니까?”
태자비는 낯빛이 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 측비,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런 게 어째서 내 것이겠느냐?”
“마마의 것이 아니라면 태자 전하께서 왜 부러 이곳에 찾아와 마마께 물어보시는 겁니까?”
주묘서는 차게 웃으며 반박에 나섰다.
“주 측비, 아무 근거도 없이 사실을 날조하여 남을 헐뜯지 말거라!”
태자비는 얼굴빛을 어쩌지 못하더니 고개를 돌려 태자를 쳐다보며 하소연했다.
“전하, 소첩은 억울하옵니다.”
“됐소!”
태자는 써늘하게 호통을 치더니 비웃는 눈으로 태자비를 바라보며 다그쳤다.
“난 지금 이 책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어보는 게 아니오! 요씨. 당신은 이 집안의 안주인이고 태자비요. 앞으로 당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크단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물건이 태자부 안에 돌아다니게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태자비는 낯빛이 확 변했다.
“소첩… 소첩이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 손에서 나온 것이옵니까?”
태자는 소리 내어 냉소를 흘릴 뿐, 반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이계가 얼른 그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태자 전하께서 주 측비 마마의 처소에서 나와 호숫가를 지나가고 계셨는데 환관 두 명이 길가에 숨어 속삭이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서 서로 보겠다고 하고 있었는데 태자 전하께서 부르자 그것들이 깜짝 놀라더군요.
전하께서는 두 환관이 말한 좋은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들에게 물건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물건이었던 겁니다!”
백여언과 전 서비 등은 그 말을 듣더니 쯧쯧 혀를 찼다. 너무 티가 나는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주묘서는 냉소를 머금더니 마치 자신만 똑똑한 사람인 양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이었습니다. 정말로 재미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방에 숨어서 보면 될 일이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분명 태자 전하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겁니다.”
태자비는 자신이 제일 똑똑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주묘서의 모습을 쳐다보며 적대감이 가득한 눈빛을 번뜩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좀 어리석은 계획이긴 했다. 하지만 그 화첩에 그려진 사람은 엽연채였고 태자는 진작부터 엽연채에게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화첩을 얻으면 분명 진귀한 보물을 얻은 양 고이 챙겼을 것이다. 어디 이렇게 팔을 걷어붙이고 시끄럽게 떠들어 댔겠는가?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느 부분에서 실수가 생긴 걸까?’
“그런데 그 환관들도 좀 이상합니다. 왜 태자 전하의 주의를 끌려고 했던 걸까요? 그래 봤자 춘화도에 불과한데 말이죠. 귀중한 것도 아니고요.”
주묘서는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태자비는 마음이 불안했다. 상황을 보니 일이 틀어진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태자가 그림 속 인물이 엽연채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리 결론지은 태자비는 이 일을 얼버무려 넘기려고 했다.
“소첩이 어서 그것들의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내 이미 그것들을 붙잡아 놓았소. 머지않아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을 것이오!”
태자는 그리 말하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태자비에게 보냈고, 태자비는 머리가 다 어지러워졌다.
“그저… 그 아랫것들이 한순간의 색욕에 사로잡혔던 것뿐입니다. 흠씬 두들겨 패서 쫓아내 버리면 그만입니다.”
“아!”
이때, 주묘서가 갑자기 깜짝 놀라 소리를 치자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쳐다봤다.
주묘서는 화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그것을 집어 들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 화첩에 그려져 있는 사람이 어째 태자비 마마를 닮은 것 같은데요!”
주묘서의 말이 방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라고요?”
백여언과 전 서비 등도 화들짝 놀랐다.
“이리 와서 봐요!”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화첩을 펼치더니 다가온 백여언 등에게 그림을 보여 줬다.
“봐요. 태자비 마마가 아닌가요?”
“와. 정말 닮았네요!”
전 서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정말 닮기는 무슨. 태자비 마마이시지! 마마예요!”
주묘서는 잔뜩 흥분하더니 또다시 비웃는 눈으로 태자비를 쓱 쳐다봤다.
“하하하. 이렇게 우스울 데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저 춘화도에 불과한데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일부러 태자 전하의 주의를 끌 필요가 뭐가 있냐고 말이에요.
알고 보니 태자비 마마께서 꾸민 계책이었군요! 마마 덕분에 정말 견식이 다 넓어졌습니다. 전하를 유혹하기 위해 스스로를 춘화도 속 인물로 그린 다음 전하 앞에 그 춘화도를 가져다 놓다니.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전하의… 흥미를 끌 수 있겠습니까? 매일 마마를 찾아와 총애하신다고 합니까? 쯧쯧쯧!”
그 말에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헉하고 숨을 들이켰고 약속이나 한 듯 태자비를 쳐다봤다. 그들은 불쾌함이 섞인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또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는 모습을 보였다.
태자부의 여인들은 총애를 다투느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태자의 총애만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자비는 정말 대단했다.
여종 출신들이나 침실에서 교태를 부려 총애를 얻는 이낭들도 태자비의 이런 수법은 미처 생각해 내지 못했다. 이런 수법은 질 떨어지는 기루의 기생 어미들이나 생각해 낼 방법이었다.
태자비는 주묘서의 말에 더없이 큰 충격을 받고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첩자에 내가 그려져 있단 말인가? 아니다. 어떻게 나일 수가 있단 말인가? 분명 그림 속 여인은 엽연채일 것이다! 절대로 나일 리가 없다!’
“허튼소리 말거라!”
태자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며 주묘서를 가리켰다.
“악독한 말로 날 중상모략하지 말거라! 어떻게 나일 수가 있느냐……! 난 어엿한 태자비다!”
“쯧쯧쯧. 태자비 마마가 아니라고요? 여기 마마가 그려져 있는데요! 마마께서 보세요. 이 얼굴은 마마의 얼굴이 아닙니까? 이 표정이 마마의 표정이 아니라고요? 쯧쯧.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요! 이 그림 말이에요!”
주묘서는 앞으로 몇 걸음 나서더니 두 손가락으로 화첩의 귀퉁이를 잡아 태자비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과연 그림 속 여인은 태자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표정 또한 그녀가 평소에 짓고 있는 그 엄숙하고 경직된 표정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여인은 속이 비치는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있었고 사내와 무언가를 하는 중인 춘화도였다. 거기다 드러내야 할 건 다 드러냈으니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있는 셈이었다.
춘화도를 본 첩실들은 하나같이 얼굴과 귀가 새빨개졌고 비명과 함께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가렸다.
물론 그녀들도 이미 남녀 간의 정사를 치른 어른이지만, 어쨌든 깨끗하고 순수하며 잘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 다들 놀라며 소리를 지름으로써 자신은 아주 단정하고 순결한 사람임을 강조했다.
태자는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저 역겨움만 느껴질 뿐이었고 싸늘한 눈으로 태자비를 노려보며 힐난했다.
“수치심도 모르다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태자비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고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 나일 수가 있어? 정말 나란 말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난 이제 어떻게 살라는 거야!’
“이런 고얀!”
석 마마는 써늘한 목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주묘서에게 달려들어 화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나 주묘서의 두 눈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석 마마를 확 밀치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비천한 것이 감히 측비에게 달려드는 것이냐! 그리고 이게 무슨 짓이냐! 증거를 인멸하려는 것이냐?”
석 마마는 그만 중심을 잃고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
태자비는 탑상 위로 엎어지더니 고개를 들어 태자를 올려다보며 흐느꼈다.
“전하, 전하……. 소첩은… 소첩은 억울하옵니다……. 소첩은 저런 일을 한 적이 없사옵니다. 분명 누군가가 소첩을 모함하는 겁니다! 아, 분명 주묘서 이 빌어먹을 것이 절 모함하는 겁니다! 엽연채와 함께 소첩을 모함하는 겁니다… 흑흑…….”
“억울하다고 했소?”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냉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럼 당신이 억울한지 아닌지 내가 제대로 조사해 보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