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1화
“폐하는… 보아하니 오늘은 깨어나기 힘드실 것 같네. 태자도 늦게 퇴청했으니 일단 돌아가게.”
정 황후는 태자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태자가 요새 제 세상을 만끽한다고는 하나 정사를 돌보랴 또 매일 이곳에 와서 병간호를 하랴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소자, 아바마마께 효도할 것입니다. 지금 효도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습니까?”
태자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이 연로한 아버지는 전부터 자신을 아꼈다. 늘 작은 산처럼 자신의 앞에 서서 비바람을 막아 줬는데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야속하게도 소멸뿐이었다.
“그래. 그럼 석반은 이곳에서 들게.”
정 황후의 말에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선제의 궁침에서 그를 보살폈다. 궁 안의 사람들과 조정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 모두 태자가 편히 쉬지도 못하고 정선제를 정성껏 병구완하는 줄 잘 알기에 효성이 지극하다고 입을 모았다.
저녁 술시戌時(오후 7시~9시)가 되고 나서야 태자는 정선제의 궁침을 떠났다.
태자부로 돌아온 태자는 주묘서의 처소에 들러 그녀와 잠깐 시간을 보낸 후 그곳을 떠났다. 그는 여전히 주묘서가 아주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의 처소에서 자주 밤을 보내니 아무래도 좀 질리는 느낌이 들었다. 집안에는 널린 게 첩실이니 이번에는 백여언의 처소로 가려고 했다.
이미 자시子時(밤 11시~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지라 태자부 안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이따금씩 야경을 도는 몇몇만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묘언헌을 나온 태자는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주변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고 호수가 펼쳐져 있어 매혹적인 야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때, 저 멀리 풀숲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형체 둘이 풀숲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재밌는 게 있었으면서 나한테도 비밀로 하다니. 우린 아직 형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사이인가 봐?”
그러자 다른 한 명이 재빨리 주의를 주었다.
“쉿. 목소리 낮춰. 방으로 돌아가서 실컷 감상하자고.”
“헤헤. 역시 넌 눈치가 빠르다니까. 가자!”
두 사람 다 아주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풀숲을 나오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전, 전하!”
태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어린 환관 둘을 노려보았다.
이곳은 황궁은 아니지만 태자부에도 환관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이 일대에 배치된 환관으로, 화초를 가꾸는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두 사람은 얼른 몸을 굽히고 예를 올렸다.
“너희 둘,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태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어린 환관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방금 전 이들이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이상야릇한 모습을 보이자 저도 모르게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두 어린 환관은 소스라치며 고개를 숙이더니 우물쭈물,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에 태자 곁의 이계가 버럭 호통을 쳤다.
“태자 전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느냐!”
어린 환관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그중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소인은 그저 서책을 보고 있었을 뿐이옵니다…….”
“서책을 봤다고?”
이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냉소를 지으며 재차 물었다.
“여기서 무슨 책을 본단 말이냐? 어째서 방에서 보지 않고?”
“처소로 돌아가려는 참이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는 건 무슨 서책이냐?”
태자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묻자 어린 환관들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몸을 살짝 떨었고, 태자는 그 모습을 보니 더욱 호기심이 동했다.
두 환관 중 한 명이 조심스레 답했다.
“그저 잡다한 것들인데 심심풀이로 보는 것이옵니다.”
“잡다한 것들?”
이계는 태자가 흥미를 보이자 어린 환관들을 한층 몰아붙였다.
“어째서 그리 비밀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냐? 혹시 금서禁書인 것이냐?”
“아, 아닙니다!”
답하던 환관은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저… 화첩들에 불과하옵니다…….”
어름어름한 대답만 이어지자 태자와 이계는 뭔가 수상쩍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계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어서 전하께 바치지 않고 뭐 하느냐! 설마 태자 전하께서 너희들에게 서책을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 것이냐?”
두 환관은 깜짝 놀라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태자 전하, 살려 주십시오! 소인들은 그저 한순간의 호기심 때문에…….”
줄곧 대답을 해 오던 쪽이 품속에서 소책자 한 권을 꺼내더니 두 손을 떨며 태자에게 바쳤다.
이계는 얼른 등롱을 위로 들어 비추었는데, 분홍색 표지로 덮여 있는 이 소책자 위에는 「답춘행」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계는 이 책자를 보더니 표정이 조금 이상해졌다. 제목도 그렇고, 색기 있는 여인이 그려진 겉표지도 그렇고, 이 책자가 어떤 것인지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
태자가 책자를 건네받아 보니 겉표지에 그려진 여인은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여인은 회랑처럼 보이는 곳에 앉아 있었는데 얇은 옷을 입고 손에는 비단부채를 들고 있었다.
태자도 어릴 땐 이런 책들을 접해 본 적이 있지만, 이젠 나이도 들었고 곁에 온갖 아양을 떠는 여인들이 넘쳐나는데 어디 이런 책자 따위에 흥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눈앞에 갑작스레 떡 나타나니 아무래도 지난날의 추억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는 손이 가는 대로 한 장을 펼치더니 이내 안색이 홱 변했다. 이 책자는 그의 상상대로 춘화도가 맞았다.
하지만 안에 그려진 사람은 흔히 보던 귀염성과 미모를 둘 다 갖춘 소녀도, 농염한 첩실도 아니었다. 그림 속 여인은 매섭고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더없이 익숙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다름 아닌 태자비였다.
태자비는 그림 속에서 교태를 부려 댔고, 낯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온갖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 위는 전혀 몸짓과 어울리지 않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여느 때처럼 잔뜩 굳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은가. 태자는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했고 동시에 토기가 다 느껴졌다.
방금 전 환관들이 태자비의 모습을 한 여인이 그려진 이 책자를 펼쳐보며 재미있다는 말을 입에 올렸는데, 이야기인즉슨 역겨워서 우습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태자는 체면을 구겼다는 생각에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계는 태자 쪽으로 다가가 책자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굳어졌고 얼른 시선을 거두며 자신은 아무것도 못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자는 분노로 목소리까지 살짝 떨며 욕을 해 댔다.
“이런 해괴망측한 것을 봤나! 그 천박한 여편네! 정말이지 역겨워 죽겠구나!”
두 어린 환관은 앞으로 엎어지다시피 부복하더니 몸을 덜덜 떨며 간청했다.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그들은 식은땀을 주룩주룩 흘렸는데, 날이 추웠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입고 있던 옷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였다.
태자비의 심복인 그들은 그녀의 분부를 받고 이곳에서 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곤 때맞춰 재미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는데 당연히 단지 태자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태자비는 아무런 숨김 없이 그들에게 이 일을 지시했는데, 태자가 책자를 손에 넣으면 분명 흥분해 책자를 챙기고 그들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환관들은 자신에 찬 태자비를 보더니 그녀가 사전 작업을 끝마쳐 놓았겠거니, 하고 그녀의 지시를 철석같이 믿고 따랐다. 그러니 태자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너희는 이런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느냐?”
태자의 살벌한 표정에 어린 환관은 사시나무처럼 덜덜대며 겨우 입을 뗐다.
“아니옵니다……. 소인들은…….”
“이놈들을 결박하거라!”
태자가 싸늘한 목소리로 외치자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당장에 앞으로 뛰어나와서 밧줄로 두 환관을 결박했다.
태자는 냉소를 짓더니 들고 있던 책자를 이계에게 던지며 혐오감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 천박한 여편네가 총애를 다투느라 온갖 극단적인 방법을 다 쓰는구나. 이런 파렴치하고 상스러운 방법마저 쓰다니! 하하. 정말이지 비할 데 없이 역겹구나!”
태자는 낯빛이 극도로 어두워지더니 얼굴에 독살스러운 웃음을 가득 실었다.
“하하. 우리 태자부에서 이런 지저분한 물건이 발견됐으니 집안의 안주인인 태자비가 내게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태자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할 것이야! 가서 주 측비와 백여언을 비롯해 전원을 불러오너라. 도대체 누가 이런 물건을 태자부로 들인 건지 심문할 것이다.”
말을 마친 태자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걸어갔다.
* * *
그 시각, 정화원.
태자비는 두 어린 환관이 돌아와 보고를 올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것이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태자비는 한층 더 엄숙한 표정으로 탑상 위에 삐뚤게 앉아 있었다.
“마마, 시간이 늦었으니 우선 주무십시오! 소인이 기다리면 되옵니다.”
석 마마가 앞으로 나와 달랬으나 태자비는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마음속에 큰일이 있는데 어디 잠이 오겠는가?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낫네!”
“그럼 지금 명월이를 보내 보고 오라고 하겠습니다.”
석 마마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부르지도 않았는데 명월이 알아서 황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이상하단 표정으로 이렇게 고했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뭐라고 했느냐?”
태자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석 마마와 눈을 마주쳤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태자비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늘 밤에 계획을 실행했는데 하필 이때 태자가 이곳에 온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마마, 걱정 마십시오. 분명, 분명 태자 전하께서는 우연히 마마를 보러 오신 걸 겁니다.”
석 마마는 그리 말하며 주인과 저 자신을 함께 위로했다. 그녀의 마음 또한 불안함에 요동치고 있었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건장한 체격의 태자가 걸어 들어왔다. 어찌나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지, 순식간에 방 안의 온도가 몇 도나 낮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태자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태자 전하께서 어인 일로 행차하셨습니까?”
태자는 냉소를 흘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왜? 오면 안 되오?”
태자비는 깜짝 놀랐다.
‘정말로 내가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단 말인가?’
태자비는 속으로 반색하며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놨다.
“그럴 리가요. 이곳 또한 전하의 처소이옵니다. 소첩은 늘 전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자는 이 말을 들으니 태자비가 그려져 있던 춘화가 또 떠올라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기다란 탑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