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아가야!”
오춘은 두려워하는 눈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무, 무슨 짓을 우리 애한테 하려는 겁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웃으며 눈이 반달처럼 휘어진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넌 날 관찰하고 싶어 하지 않았더냐? 자, 실컷 보거라! 음. 차라리 내가 이곳에 계속 앉아 있을 테니 날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건 어떠냐?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으면 그때마다 고개만 들면 되니 분명 그림이 아주 잘 그려질 게다.”
오춘은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테니 제 아이를 놔주십시오!”
그는 죄를 실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미 일이 발각됐으니 태자비와의 거래는 취소할 수밖에 없고, 태자비도 이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미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았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어떻게 보고하려고 그러느냐?”
눈앞의 여인은 압도적인 미모를 뽐냈지만, 오춘은 그녀를 보며 왠지 모르게 소름이 쫙 끼쳤다.
고개를 숙여 보니 자신의 아이는 엽연채의 품에 안겨 옹알거리고 있었다. 당연히 아기는 지금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 채 아비인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춘은 마음이 더더욱 불안해져서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진서후 부인……! 저 같은 사람은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부디 살려 주십시오! 부인은 선량하고 인자하신 분이니 제 아이를 놔주십시오. 그럼 곧장 도성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부인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선량하고 인자한 사람이라고 했느냐? 그럼 너는 어떤 마음씨를 가졌느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입에 발린 말 따위는 하지도 말거라. 난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이거 하나만 묻자꾸나. 내가 네 살길을 터 주면 내 살길은 누가 터 주느냐?”
오춘은 안색이 또다시 확 변했다.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엽연채의 눈빛이 살짝 차가워지더니 웃으며 먼저 입을 뗐다.
“내게 이 일이 들킨 걸 태자비가 알게 된다면 이 일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 또 계략을 꾸미겠지. 오늘은 막아 냈지만 내일은 막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내 살길을 터 주거라!”
오춘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부인…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태자비 마마를 위해 일하고 그림을 그린 것 모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입니다. 능력이 있다면 누가 이런 더러운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전 과거에 서생이었는데 매번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집안에서는 제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가산이란 가산은 전부 다 갖다 팔아 버렸고, 결국 부모님 모두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하루도 행복하게 살지를 못하셨죠.
가까스로 절 싫어하지 않는 처자를 만났고 아내는 아이까지 낳아 줬는데…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내의 병을 고치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그런 그림을 그리게 된 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태자비 마마께서 절 찾아와 큰돈을 주셨습니다. 남은 반평생 아들을 공부시키며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이었습니다. 전 이 일만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아들을 잘 가르칠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인, 제발 절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하나 엽연채는 다시금 콧방귀를 뀔 따름이었다.
“내가 널 가엽게 생각해 줄 수야 있지. 그런데, 그럼 난 누가 가엽게 생각해 주느냐? 게다가 나를 가엽게 만들려 했던 장본인을 내가 가여워해 주어야 한다고? 네게 두 개의 선택지를 주겠다. 하나는 내 뜻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럼 네 안전을 보장해 주겠다. 다른 하나는 내 손에 너와 네 아이가 함께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오춘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령 반편이라고 해도 지금 그녀가 태자비에게 복수하려는 심산임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오춘은 낯빛이 종잇장처럼 질려 버렸다.
“부인, 그분은 태자비 마마이십니다……. 곧 국모가 되실 분입니다! 황후가 되실 분이란 말입니다!”
“하. 태자비?”
엽연채의 눈에는 조롱기가 가득했다.
“요 며칠 동안 너도 봤을 게다. 태자비가 측비에게 눌리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황후라고? 꿈 한번 야무지구나!”
오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뜻대로 하면 너희 부자의 목숨은 지켜 주마! 싫으면 이대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지.”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품 안의 아이를 혜연에게 건넸다.
“데려가거라!”
혜연은 얼른 아이를 받아 들고선 문밖으로 나갔다.
오춘은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절망에 빠져 생각해 보니 태자비는 명성만 높을 뿐 처지는 엽연채보다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이 도망가면 태자비는 당연히 이 일이 발각됐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리되면 엽연채와 태자비가 어떻게 싸우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엽연채도 벌어지지 않은 일로 태자비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태자비는 자신이 꾸몄던 일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분명 자신을 죽여 입막음을 하려 할 것이다.
이후가 그려지자 오춘은 소름이 확 끼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운 마음에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제는 똑똑히 알았다. 자신은 절대로 도망칠 수 없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엽연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혜연이 아이를 안고 나간 이후, 엽연채와 추길은 방 안에서 반 시진을 더 머물고 나서야 그곳을 떠났다.
오춘은 얌전히 엽연채를 위해 그림을 그렸고, 엽연채는 혜연과 추길을 데리고 떠나면서 경인에게 남아서 그를 감시하라고 했다.
엽연채와 여종들은 마차에 올랐다. 추길은 혜연이 안고 있는 꾀죄죄한 아기를 쏘아보더니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마님, 이 아이는 어쩌죠?”
“일단 돌보고 있거라! 내 일이 끝나면 다시 저자에게 돌려주면 된다.”
엽연채의 대꾸에 추길은 입을 약간 오므리며 말했다.
“태자비 마마는 참 음흉한 분이에요. 이런 비열한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그러니 저희는 그분보다 더 비열한 방법을 써야겠어요. 그분을 그리는 건 어떨까요? 그런 다음 온 도성에 퍼뜨리는 거죠.”
“그건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엽연채는 무덤덤하게 반대했다.
“그리되면 물론 태자비의 평판은 안 좋아지겠지만 동시에 피해자가 될 게다. 자기 자신을 춘화도에 그려 달라 의뢰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난 태자비가 내게 쓰려고 했던 방법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 * *
사흘 후, 오춘이 약속했던 그림을 건넬 시간이 되었다.
이날 저녁 무렵, 석 마마는 하늘빛이 조금 어두워지자 슬그머니 오춘의 집으로 향했다.
마침 오춘도 밖으로 걸어 나왔는데, 석 마마가 보니 그의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고 눈 주위가 거무스름하게 그늘져 있었다. 생기를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석 마마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얇은 버들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오 화공, 어쩌다가 몰골이 이리된 겐가? 그림을 너무 열심히 그려 잠을 못 잔 겐가? 너무 힘을 들인 거 아니야?”
오춘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허허 웃었다. 태자비는 5백만 냥은 떼인 사람처럼 늘 매섭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내내 그런 사람을 그리려니 정신적 소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그림은 이미 완성됐습니다. 그러니 남은 잔금을 치러 주십시오.”
오춘은 그리 말하며 작은 상자를 꺼냈다.
석 마마가 얼른 상자를 열어보자 「답춘행踏春行」이라는 제목의 화첩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석 마마는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제목은 「상연화賞蓮花」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마마, 안에 그려진 사람이 이미 충분히 그분을 닮았습니다. 그런데 ‘연蓮’ 자까지 쓰게 되면 너무 뻔해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구먼!”
석 마마는 오춘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더는 따지고 들지 않았다.
그녀는 책자를 들고 첫 장을 펼쳐봤다. 얇은 옷을 입고 있는 한 소녀가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확실히 엽연채 특유의 그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외양은 삼 할 정도 닮았고 분위기는 칠 할 정도 닮아 석 마마는 아주 흡족해했다.
그렇게 책자를 더 살펴보니 개중 몇 장에는 낯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몹시 불쾌한 얼굴로 그러한 그림을 훑어보던 석 마마가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역겨운 그림이 내 눈을 더럽혔군.”
그녀는 얼른 화첩을 덮고 배나무 상자 안에 집어넣은 뒤 품속에서 은표銀票 한 장을 꺼내 오춘에게 던져 주었고, 상자를 챙겨 들고 곧장 태자부로 돌아갔다.
석 마마가 정화원으로 들어가 보니 태자비는 탑상에 앉아 있었다. 석 마마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상자를 태자비에게 건네며 말했다.
“마마, 보십시오.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태자비는 몸을 일으키더니 혐오스럽단 표정으로 상자를 쓱 쳐다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확인했는가?”
“마마, 걱정 마십시오. 소인이 이미 확인했사옵니다. 마마께서 딱 원하시는 것이옵니다. 마마, 한번 보시지요.”
태자비는 역겨움을 참으며 몇 장을 펼쳐봤다. 자신이 원한 대로임을 확인한 그녀는 화첩을 덮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랫것들에게 제대로 하라고 일러 두게. 그럼 이만 갖고 나가시게나!”
태자비의 얼굴에서 혐오감이 넘실거렸다.
그녀는 원래부터 총애를 받지 못하던 사람이라 첩실들이 태자를 유혹하는 걸 가장 두려워했고 태자가 다른 사람을 총애하는 것도 몹시 질투했다.
그런데 지금 태자를 유혹하는 것조차 엽연채의 힘을 빌려야 하니, 그 생각만 하면 여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당연히 이런 물건에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석 마마는 대답한 뒤 작은 상자를 들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황궁 안.
정선제의 궁침 안은 약 냄새로 진동했고 정 황후는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사 마마가 깨끗한 물이 가득 담긴 놋쇠 대야를 들고 오자 정 황후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 비틀어 짠 다음 정선제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살며시 닦아 주었다.
“태자 전하 납시오.”
밖에서 어린 환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자가 안으로 걸어오더니 침상에 누워 있는 정선제의 모습을 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좀 어떠십니까?”
“그대로시네.”
정 황후는 고개를 숙인 채 대꾸했다.
“오늘 가까스로 정신이 들어 약을 반 사발 드셨는데 결국 전부 토해 내셨네. 조정 일은 태자가 잘 처리하게. 절대로 아바마마를 실망시키면 안 되네.”
“예.”
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에서 그는 지금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와 같았다. 조정 신하들 중 그를 추켜세우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 밖에서는 주운환이 그를 지켜 주고 있었으니 정말 맘 편히 지내고 있었다.
이제 정선제만 세상을 뜨면 바로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