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9화
고씨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많은 분들이 중매 이야기를 나눈 후에 소인에게 그런 서책을 구해 달라고 하시기도 합니다. 출가하는 소저들의 비기祕器로 쓰시려는 거죠. 물론 시집가는 소저들은 당연히 단정히 보이는 게 좋기 때문에 소인이 구하는 건 전부 얌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자와는 왕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일 년 내내 그쪽과 접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자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기녀들이나 방탕한 공자들이 즐겨 찾는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찾아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는데 꽤 비싼 값을 치른다더군요.
소인이 아는 건 이게 다입니다. 그런데 부인… 다른 사람들에겐 소인이 부인께 이 이야기를 해 드렸다고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엽연채가 어쩌다가 그 오춘이라는 자와 엮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아마 귀족 간의 원한이 얽혀 있으리라. 좋은 마음으로 귀띔을 해 주었을 뿐, 결코 이런 일에 연루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맙네. 걱정 마시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을 거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이쯤에서 헤어지세.”
“예.”
엽연채는 고씨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는 골목을 나와 바로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경인을 불러 무려 은화 50냥을 넣은 홍포紅包를 건네며 조용히 매파 고씨의 집으로 전달하라고 했다.
사례금을 받은 고씨는 당연히 아주 기뻐했다.
물론 좋은 마음으로 엽연채에게 귀띔을 해 준 것이지 결코 돈 때문에 그리한 건 아니었다. 사람을 도울 수 있어서 마음이 뿌듯하던 차였다.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챙겨 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엽연채가 사례를 하니 그녀도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씨의 호의로 오 마마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행방을 찾는 일은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한나절도 되지 않아 경인은 그를 찾아냈다.
* * *
그 시각, 태자부의 정화원.
명월은 몇몇 시녀들과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안으로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태자비는 석 마마와 침실에 앉아 있었다. 조그만 배나무 상자를 들고 있던 석 마마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태자비에게 그 상자를 건넸다.
“이게 바로 오춘이 그린 그림이옵니다. 마마께서 먼저 보십시오.”
태자비가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화지畫紙 한 장이 들어 있었고, 그 화지에는 난간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한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안의 소녀는 귀엽고 아리땁게 생겼고 아주 얇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둥글부채를 들고선 옅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닮았는가?”
태자비는 고개를 들어 석 마마를 쳐다봤다. 석 마마는 축 처진 눈을 가늘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그렇게 닮은 건 아니지만 눈썹과 눈에서 고상한 분위기가 느껴져 아주 비슷하옵니다. 분위기 때문에 꼭 엽연채가 그림 속에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과연 오춘이 그쪽 분야에서는 고수로군요!”
태자비도 만족스럽단 듯 하하 웃었다.
“참. 엽연채와 며칠 전에 엽미채 일을 이야기했으니 요 며칠 동안 잘 생각해 봤을 겁니다. 언제 마마를 뵙고자 약속을 잡으려 할까요?”
석 마마의 물음에 태자비는 매서운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냉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실컷 만날 것이다!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엽연채가 한 발짝씩 자신이 쳐 놓은 함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떠올리며 태자비는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였다.
주묘서가 기고만장하게 굴며 공연히 소란을 피우고 자신을 짓밟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주운환을 등에 업고 있기 때문이다. 엽미채가 태자부로 시집온다면 그녀 역시 주운환을 등에 업는 셈인데 그럼 주묘서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자신은 이미 당할 만큼 당했다. 풍 측비에게 당했고 주묘서에게 당했는데, 어떻게 제 손으로 엽미채를 들어앉힐 수 있겠는가. 자신은 바보가 아니었다.
태자비는 영원히 후환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힌 후였다. 그러려면 당연히 주운환을 제거해야 했다. 주운환만 무너뜨린다면 근심이 싹 사라지게 될 것이다.
태자비는 작년 일로 묘책을 하나 떠올렸다.
태자는 줄곧 엽연채에게 사념邪念을 품고 있었으나 주운환의 세력이 커지면서 감히 그녀를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황제의 병이 위중해졌기에 효심을 보이기 위해 매일 퇴청한 뒤 위문을 가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서 엽연채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은 상태였다.
그래서 태자비는 사람을 구해 엽연채의 외양과 분위기를 담은 춘화를 그리게 했고 태자에게 이 그림을 보낼 방법을 강구했다. 태자가 이 그림을 보면 분명 엽연채에게 품었던 그 추잡한 마음이 다시 꿈틀댈 것이다.
다만 그림을 본인과 너무 똑같이 그리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기교를 부려 외적인 모습은 삼 할 정도, 분위기는 칠 할 정도 닮게 그려야 했다. 춘화로 이름을 떨치는 오춘에게 일을 맡겼으니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디 태자가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그래서 핑계를 대어 그날 오춘을 데리고 진서후부에 간 것이었다. 주묘서를 열 받게 하는 건 부차적인 목적이었고, 실은 오춘이 가까운 거리에서 엽연채의 고상한 분위기를 관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엽연채가 감이 어찌나 예리한지, 오춘에게서 수상쩍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튿날 엽미채 이야기를 꺼내 자신이 엽미채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엽연채가 오해하게 만들어 의심을 피하려고 했다.
이 방법이면 엽연채와 주묘서를 함께 끝장낼 수 있고, 또 엽연채가 의문을 품지 않고 태자부에 드나들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태자가 오춘의 그림을 얻게 된 다음 엽연채가 곁에서 왔다 갔다 하게 되면, 갈망하던 미인이 눈앞에 있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자연히 엽연채를 취할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어쩌면 아예 엽연채에게 약을 먹여서 부적절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일이 그리되고 나면 엽연채는 당연히 태자와의 지저분한 관계를 주운환에게 알릴 수 없을 것이고, 태자는 그녀를 취해 약점을 잡았으니 어디 쉽게 놓아주려고 하겠는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태자비는 기회를 봐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부정한 일을 주운환에게 알릴 계획이었다.
아내를 빼앗긴 일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 그러니 주운환과 태자의 사이는 분명 틀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 태자는 이미 황제가 되어 있을 터. 주운환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일개 신하에 불과하니 뭐라고 하소연도 못 할 것이다.
엽연채의 말로는 주운환의 손에 죽는 것뿐이다. 주묘서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태자에게 크나큰 앙심을 품었을 주운환이 군신의 관계를 돈독히 해 주는 역할인 주묘서를 신경이나 쓰겠는가? 그럴 리가 만무했다.
자신의 설계도를 다시금 들여다본 태자비는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곁을 지키던 석 마마가 눈치껏 그녀를 추어올렸다.
“마마, 정말이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완벽한 계책이옵니다.”
“이 그림이 아주 마음에 드네. 이대로 그리라고 하게!”
태자비는 입꼬리를 올리며 들고 있던 그림을 다시 배나무 상자 안으로 넣었다.
“서두르게. 성심성의껏 그리라 당부하고.”
“예.”
석 마마는 대답한 뒤 돌아서서 방을 빠져나갔다.
석 마마는 그길로 마차를 타고 태자부를 나섰고 잠시 후 도성 중심에 있는 진귀루에 도착했다. 그녀는 2층의 한 객실로 올라갔고 안에서 반 시진이나 머문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석 마마가 자리를 떠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무명옷을 입은 한 사내가 그 객실에서 나왔다. 서른 가까이 되어 보이는 그는 얼굴은 네모지고 큰 반면 눈은 작고 입술은 얇았다.
사내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고 걸어가는 내내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그는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향하더니 좋은 술과 음식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시켰고,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식당 주인에게 통닭구이 등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그는 요깃거리가 든 상자를 들고선 마차를 타고 그곳을 떠났다.
마차는 도성 서쪽에 위치한 지저분하고 허름한 작은 골목에 멈춰 섰다. 이미 해가 저문 후라 골목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가난했기에 해가 저물면 딱히 할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일찍 휴식을 취하면서 겸사겸사 등잔의 기름값을 아꼈다.
오춘은 손에 통닭구이와 간식거리를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그렇게 어둠이 깔린 골목의 고요함을 깨뜨리며 작은 골목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자기 집으로 들어섰다.
그의 집 또한 낡고 너절했지만 안에는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오춘은 안으로 들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귀여운 내 새끼. 이 아비가 돌아왔다. 너 주려고 맛있는 것도 가져왔단다.”
헤헤 웃던 오춘은 다음 순간 그만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비좁은 집 안에 웬 사람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여종으로 보이는 두 소녀가 그곳에 서 있었는데, 한 사람은 둥근 얼굴에 온순한 느낌을 풍겼고 또 한 사람은 아래턱이 뾰족하고 허리가 가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예쁘장하게 생겼다. 두 사람 외에도 늘씬하고 아리따운 한 소저가 창가 의자에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오춘은 이 두 여종을 마주하는 찰나, 머리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렸다. 바로 며칠 전에도 본 얼굴들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진서후 부인 곁에 있던 신변 여종들!’
두 여종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는데, 눈빛이 얼마나 살벌한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사람을 물어 죽일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은…….”
오춘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에 온 것이냐? 아니. 너, 너희들은 누구냐?”
“하. 계속 그렇게 연기해 보시든가!”
추길은 냉소를 짓더니 노기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태자비와 무슨 모략을 꾸미는 것이냐?”
매서운 추궁에 오춘은 머리가 다 어지러워졌으나 창백한 얼굴로 잡아뗐다.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난 너희가 누군지 모른다…….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하하.”
추길은 차갑게 웃었다.
“우리 나리가 진서후이신데 네가 감히 우릴 건드리려고 하다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이 순간, 오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오로지 이 말뿐이었다.
‘들켰구나! 태자비와 꾸민 음모가 들키고 말았어!’
오춘은 본능적으로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아기가 큰 소리로 울어 대기 시작했다. 오춘은 낯빛이 싹 변해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앉아 있던 사람이 천천히 몸을 돌렸고, 그러자 전날과 다름없이 요염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춘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엽연채였는데, 그녀의 품에는 한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