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7화
엽연채는 잔금 무늬가 들어간 옥으로 만든 작은 붓걸이에 붓을 걸어 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자가 너무 평범하고 존재감 없게 생긴 얼굴이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그자의 얼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거나 점에만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말에 혜연과 추길은 놀랐고 혜연은 이렇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 사람을 처음 보자마자 시선이 아래턱에 있는 점으로 향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의 점을 본 거죠. 그야말로 시선을 확 사로잡는 점이었으니까요.”
“사람은 다 그렇단다. 한 사람의 얼굴에 어떤 특징이 보이면 그 특징에 집중력을 쏟게 되지. 그러면 그 사람 얼굴의 다른 부분은 흐릿해지고 만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영롱한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나도 오 마마를 처음 봤을 때는 절로 그자의 아래턱에 있는 점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자가 계속해서 날 슬며시 훑어보지 않았다면 나도 그자에게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을 거다. 게다가…….”
그녀는 거볍게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그자의 점을 보지 않고 이목구비를 기억했지.”
엽연채는 그 그림을 들어 혜연에게 건네주었다.
“탁자 위에 올려놓아라.”
혜연이 바로 탁자 위에 그 그림을 올려놓자 엽연채는 붓을 들더니 그림을 한 장 더 그렸다. 이번에는 오 마마의 얼굴만 그렸고 아래턱에 있는 점은 그리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카락조차 그리지 않았다.
혜연과 추길은 그림을 보더니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사내 같아요!”
엽연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래, 오색잡놈처럼 보이는구나. 어서 이 그림을 가져가 경인이에게 주거라. 그리고 경인이더러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태자부를 주시하다가 오 마마가 나오면 그자의 뒤를 쫓으라고 하거라.”
추길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엽연채가 초상화를 경인에게 보내고 나니 시간은 이미 정오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엽연채는 회미천하에서 혜연과 식사를 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태자부의 정화원.
태자비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오 마마는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분명히 기억해 두었느냐?”
태자비의 물음에 오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제 기억력으로 어떻게 잘못 기억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녀가 입을 열자 뜻밖에도 사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자비는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거라! 반드시 내가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한다!”
“반드시 마마께서 만족하실 만한 작품을 만들어 내겠사옵니다.”
오 마마는 냉소를 지으며 자신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그래. 명월아, 네가 배웅해 주거라.”
명월은 대답을 하고선 오 마마의 뒤를 따라갔고 둘은 함께 정화원을 떠났다.
석 마마는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더 멀어지자 고개를 돌려 태자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마, 정말 좋은 계책이옵니다.”
“하하.”
태자비는 매서운 눈빛을 뿜어냈다.
“난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하길 원치 않는다.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지!”
“지금 진서후 부인은 주묘서를 남겨 둘지 아니면 그 엽미채로 주묘서를 대신할지 고민하며 짙은 안개 속을 헤매고 있을 겁니다! 마마께서 성동격서聲東擊西(적을 유인하여 이쪽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그 반대쪽을 치는 전술을 이르는 말)의 전술을 쓰고 계신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죠!”
태자비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 백배했다.
“그자는 내가 깔아 놓은 판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전에는 그저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내 손에 떨어지지 않았던 것뿐이다.”
작년에 그녀가 엽연채를 자주 태자부로 들여 차를 우리고 말린 꽃을 만들게 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마께서는 이제 차분히 좋은 소식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래, 그자가 그것만 만들어 내면 우린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석 마마의 말에 태자비도 기대를 드러냈다.
* * *
경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엽연채에게서 받은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
하지만 태자부는 평범한 곳이 아니기에 경비가 삼엄했다. 아무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이다 보니 경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태자부에서 백 장丈가량 떨어진 곳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태자부의 마차 몇 대가 문밖으로 나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밖에 보지 못했다.
경인은 할 수 없이 사람들에게 흩어져 각 마차를 따라가라고 지시했다. 마차 한 대는 도성 서쪽으로 갔고 다른 한 대는 도성 동쪽으로 갔으며 또 다른 한 대는 곧장 도성 밖으로 향했다. 경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태자비는 정말로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구나.’
이리되면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경인은 고민을 하다가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 엽연채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사람들을 시켜 마구잡이로 찾고 다니면 태자비 마마께서 눈치챌지도 모릅니다.”
엽연채는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자신들이 뒤를 쫓고 있는 걸 알아채서 오 마마가 숨어 버리게 되면 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더욱 알아내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이때, 매화가 신이 나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님, 어머님께서 오셨습니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했다. 근심거리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온씨가 왔다는 소리를 듣자 그래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 어머니께서 오셨다고?”
그녀는 대번에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보니 온씨는 이미 매화를 따라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연채야.”
“어머니.”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달려가더니 온씨의 팔짱을 끼며 그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안부를 물었다.
“잘 있었느냐. 이 어미는 사위가 떠난 뒤로 계속 널 보러 오고 싶었단다. 하지만 운환이가 가자마자 내가 네 시어머니보다도 먼저 오면 네 시어머니에게 빈축을 살 것 같았지. 그래서 때를 보고 있는데 넌 천산에 갔고. 또 돌아오자마자 도성이… 갑자기 어수선해져 감히 밖으로 나다닐 수가 없어 이제야 오게 됐구나.”
“어머니, 이렇게 오셨으니 오래 있다가 가세요! 요즘 너무 외로워요.”
온씨는 이리 대꾸하는 엽연채를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주운환이 가까스로 도성에 돌아왔는데 겨우 두 달 머무르고 다시 먼 길을 떠났으니 말이다. 헤어짐은 언제쯤 끝이 나는 걸까.
엽연채는 온씨의 팔짱을 낀 채 서차간으로 걸어갔다. 온씨는 경인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유, 경인이가 여기 있었구나.”
“마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전 우선 나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꾸한 경인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온씨를 끌고 탑상으로 가서 앉았다. 방 한편의 은사탄銀絲炭이 실내를 훈훈하게 만들어 한기를 쫓아내 주었다.
“난 이곳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단다. 너무 외로우면 네가 이 어미 집으로 오거라.”
온씨는 말을 이으며 까닭을 알려 주었다.
“요즘 네 오라비의 혼처를 찾느라 바쁘단다. 매파도 자주 집을 방문하고 있고.”
“아, 그렇군요.”
엽연채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하긴. 엽균 그 빌어먹을 놈도 이제 열아홉 살이니 혼인해서 자식을 봐야겠지. 손자를 낳아서 어머니 품에 안겨 드려야 하니까. 그런데 잠깐… 매파라고?’
엽연채의 두 눈이 빛났다. 그 오 마마는 오색잡놈처럼 보였고, 게다가 태자비의 눈에 들어 일을 하는 걸 보면 분명 뛰어난 재주나 특별한 점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남 앞에 내놓을 만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평범한 소인배는 아닐 것이다.
인맥이 넓고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는 매파라면 어쩌면 오 마마를 알아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엽연채는 흥분해 온씨를 확 껴안았다.
“어머니는 정말 제 행운의 신이에요.”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온씨는 엽연채가 어린아이처럼 자신에게 달라붙자 조금 우스웠다.
“참. 어머니와 약속한 매파는 언제 집에 와요?”
“내일 이른 아침에 온단다.”
“저도 가서 볼래요.”
“그럼 정말 좋지.”
온씨는 그리 대꾸하며 엽연채의 코를 톡톡 쳤다.
“너도 날 도와 신붓감을 봐 주렴. 어떤 소저들이 좋을지 말이다. 참, 알고 지내는 좋은 소저가 있으면 소개해 주렴.”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정말 없어요.”
이때, 추길이 차를 들고 앞으로 다가섰다.
“제민은 어떠세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찻잔 두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제민과 엽균?’
자신은 제민을 아주 좋아했다. 더욱이 제민은 시원시원하고 똑똑한 사람이다 보니 그녀와 엽균을 함께 묶어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좋긴 한데… 음…….”
온씨는 말을 이으면서 난처해했다.
“전에 그 아이가 우리 집에서 지낼 때, 균이가 혼처가 없긴 해도 그 아이는 그저 평범한 농가 소녀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때는 그 아이를 신붓감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이제 현주가 되었다고 내가 가서 혼담을 꺼낸다면 비 이낭과 주종과 같은 사람이 될 뿐 아니겠느냐?”
비 이낭과 주종과의 파렴치한 짓거리는 주씨 가문에서 밖으로 퍼진 지 오래였다. 그 일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 당시 온씨는 제민의 외모와 몸매, 성격이 모두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농가 출신이라는 점과 유씨 가문 사위와 그런 관계였다는 점이 걸렸다.
그러니 그녀를 거두고 가엽게 여기는 건 가능하지만 자신의 며느리로 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제민을 며느리로 맞이해서 체면을 구기느니 차라리 가난한 집안의 고운 딸을 며느리로 들이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이제 제민은 현주의 봉호를 가졌으니 그녀를 며느리로 맞이하면 아주 체면이 서게 된다. 지켜보니 그녀의 신분과 더불어 장점들이 두드러졌다.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우며 인간관계도 좋고 살림도 잘하며 고생을 견딜 줄도 알고 똑똑하다는 점 말이다.
하지만 온씨는 주종과와 비 이낭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전에 자신도 제민을 좀 깔봤으니 이제 와서 들러붙는 건 온씨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내일 매파 고씨가 오니 그 사람이 가져올 화첩에 어떤 소저들이 있는지 보자꾸나.”
온씨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머니, 오늘 저녁에는 이곳에서 주무세요. 내일 일찍 저와 함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요.”
“그래, 좋구나.”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참, 얼마 전에 황후 마마께서 제게 좋은 옷감 몇 필을 하사하셨어요. 어머니께 잘 어울릴 것 같으니 전부 어머니께 드릴게요! 창고에 보관하고 있으니 지금 나가서 찾아볼게요.”
엽연채는 그리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운연거를 나온 엽연채는 소월에게 경인을 불러오라고 했고 그녀는 그에게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다.
“매파들을 찾아가 물어보며 그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거라.”
경인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