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6화
“맞습니다!”
추길이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묘서는 빌어먹을 인간이지만 어쨌든 그 사람이 태자부로 시집가서 태자 전하와 나리의 관계는 확실히 더 가까워졌습니다. 지금 황제 폐하는 병세가 위중하니… 태자께서…….”
추길은 태자가 곧 제위에 오른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엽연채의 눈빛을 받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일은 사실이라고 해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추길은 하던 말을 딱 멈추더니 흐름을 틀었다.
“아무튼 저희 모두 태자비가 이간질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잖습니까. 마님, 저희가 이 일을 태자 전하께 알리는 건 어떨까요? 그럼 태자 전하께서 알아서 태자비를 손보실 겁니다. 그럼 태자비도 더 이상 수작을 부리지는 못할 거예요.”
추길이 그리 말하며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엽연채는 아리따운 눈동자에 그늘을 드리우더니 이렇게 말했다.
“태자비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 않을 게다.”
태자비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마님.”
이때, 정원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쿵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청유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첩자가 들려 있었다.
“누가 마님께 첩자를 보냈습니다.”
“누가 보냈느냐?”
엽연채는 얼떨떨해하며 첩자를 건네받았다. 평범해 보이는 분홍색 첩자로 누가 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해 보더니 청유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넌 이만 나가 보거라.”
청유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엽연채는 그녀가 물러나고서야 첩자를 열어 봤는데 익숙한 필체가 눈에 담겼다. 추길과 혜연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첩자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엽연채는 단장을 마친 후 혜연과 추길을 데리고 함께 문을 나섰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정륭가를 나가 도성 중심에 위치한 회미천하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위층으로 올라갔고 점원의 안내를 받아 난초 귀빈실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창문 아래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상대가 오길 기다렸다.
시간이 좀 흐르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연이 얼른 걸어가 문을 열자 태자비가 오 마마와 명월을 데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네.”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더니 그만하라는 손짓을 했다.
“앉게.”
그러고는 천천히 걸어가 난초 문양이 들어간 녹나무 찻상을 사이에 두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엽연채도 다시 앉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마마, 저와 이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자고 부르신 걸 보니 오늘 여유가 있으셨나 봅니다.”
태자비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대꾸했다.
“우리 모두 사리에 밝은 사람들이니 대놓고 이야기하겠네. 내 오늘 자네와 약속을 잡은 건 중요한 일로 상의를 하기 위함이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옵니까?”
“어제… 주 측비가 부인을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고 노려보지 않았던가.”
태자비는 그리 말하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명월이 찻상 위에 차를 내려놓자 태자비는 말을 이었다.
“난 자네 부부와 주묘서의 관계가 사실 전부터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네.”
태자비는 냉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적서嫡庶 간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지. 또 주묘서에게는 친오라비도 있는데 어떻게 진심으로 자네 부부를 대하겠는가?”
“계속 말씀하시지요.”
엽연채가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자 태자비는 핵심으로 들어갔다.
“자네 부부가 지금 주묘서와 억지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건 그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란 걸 나도 알고 있네. 주묘서는 자네 부부라는 뒷배경이 필요한 거고 자네들은 주묘서라는 측비가 필요한 게지. 주묘서를 이용해 태자 전하와 관계를 유지하려는 건데 속으로는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있지.”
“맞습니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찻잔 뚜껑을 잡고 찻잎을 살살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사이가 안 좋으니 덜 만나면 되고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작은 일이면 그냥 두면 되옵니다.”
“방법이 왜 없겠는가?”
태자비는 두 눈을 반짝였다.
“주묘서와 마음이 맞지 않다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면 되지! 자네들이 원하는 건 그저 누군가가 태자부로 들어가는 것뿐이네.”
그에 엽연채는 코웃음을 쳤다.
“태자비 마마 말씀은 제가 마마와 힘을 합쳐 주묘서를 무너뜨리고 주묘화를 태자부로 들이라는 것이옵니까? 주묘화는 여린 아이니 마마를 업신여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신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방법은 너무 번거로울뿐더러 저희에게 이득이 될 것도 별로 없습니다.”
태자비는 냉소를 짓더니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니네. 주묘화가 아니라 엽미채지!”
엽연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자비를 쳐다봤다.
“그러니 진서후부에 이득이 얼마나 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엽연채 자네에게 이득이 얼마나 되느냐는 문제인 게지.”
엽연채의 눈에 순간 차가운 빛이 스쳤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태자비는 엽연채의 마음이 흔들린 것 같아 보이자 웃으며 말을 보탰다.
“자네는 지금 진서후 부인이고 잘나가고 있지만, 엽씨 가문은 어떤 꼴이 되었는가? 밖에서 사람들이 자네 친정을 얼마나 비웃는지 모르네! 그리됐는데 자네는 어째서 엽씨 가문을 보살피지 않는 겐가?
엽미채는 자네의 여동생이네. 비록 서출이기는 하나 전부터 자네와 사이가 좋았고 엽미채에겐 동복 형제자매도 없네. 엽승덕도 끝장이 나 버렸고 엽미채를 낳아 준 이낭이 아이를 더 낳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네.
그러니 엽미채가 유일하게 의지할 사람은 바로 자네 아닌가. 주운환이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은 어떤 말이든 전부 받아들이지만 자네 친정이 그 모양이니 자네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주묘서를 몰아내고 방법을 강구해 엽미채를 태자부로 들인다면 자네 자매는 서로를 돕게 될 거고 자네는 시집에서 체면이 설 것이네. 엽미채는 성격도 온순하니 날 존경하기만 한다면 난 그 애를 괴롭히지 않고 친자매처럼 지낼 생각일세.”
추길과 혜연도 태자비의 말을 듣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엽연채와 두 여종의 바뀐 표정을 본 태자비의 두 눈에 순간 싸늘한 빛이 스쳤다. 자신이 이렇게나 매력적인 제안을 했는데 엽연채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태자비는 서두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만 덧붙였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게!”
말을 마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오 마마는 엽연채를 쓱 보더니 명월과 함께 태자비를 따라 문을 나섰다.
복福 문양과 꽃문양이 조각된 나무문이 닫히자 난초 귀빈실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추길과 혜연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추길이 긴장된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그녀를 불렀다.
“마님…….”
그런데 엽연채는 추길이 아니라 혜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태자비의 생각이 어떤 것 같으냐?”
혜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추길은 깜짝 놀라며 엽연채를 뜯어말렸다.
“아니 됩니다! 마님, 우를 범하시면 아니 됩니다.”
“이 일은 확실히 아니 됩니다.”
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양왕의 사람이며 주묘서가 그들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가 뭣 하러 주묘서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하겠는가?
엽연채는 두 눈동자가 살짝 차갑게 식더니 갑자기 말머리를 틀었다.
“너희들도 태자비 곁에 있던 자들을 주의 깊게 봤겠지……. 한 명은 명월이었지? 또 다른 한 명은 오 마마였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오 마마라는 사람은 특히 알아보기 쉽던데요. 아래턱에 커다란 흑색점이 있고 그 점 위에 털도 한 가닥 자라나 있으니까요.”
추길이 대답했다.
“마님, 왜 계속 오 마마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혜연은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도 그 사람을 언급하시던데 오늘도 또 그 사람 이야기를 하시네요.”
“어제 그 사람이 집에 온 후로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거든.”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곱고 아리따운 얼굴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쳐다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난 그자가 날 계속 훑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님의 외모가 워낙 특별해 그런 거 아닐까요?”
혜연은 그리 말하며 웃음을 지었다.
“마님을 처음 본 사람들 중 아름다운 외모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연히 시선이 가는 거죠.”
그러나 엽연채는 그녀를 나무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단순한 느낌이 아니란 말이다. 가서 붓과 먹을 가져오렴.”
추길은 어리둥절했으나 얼른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문방사우가 올려진 쟁반 하나를 들고 왔다.
혜연은 찻상을 정리하고 선지를 펼친 다음 엽연채를 대신해 먹을 갈았다.
엽연채는 가늘고 작은 붓을 들더니 먹을 묻혀서 선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붓을 움직이자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가 사람 얼굴을 그리고 있음을 금세 알아챘다. 말할 것도 없이 대상은 그 오 마마일 터. 방금 전에 오 마마가 수상쩍다고 이야기했으니 말이다.
엽연채의 그림 솜씨는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어렸을 때 얼굴이 남달리 예쁘게 생겼다는 이유로 온씨는 권세가들이 엽연채를 낚아채 갈까 봐 그녀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날마다 금琴을 연주하고 바둑을 두며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의 금과 바둑, 서예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림 실력은 대충 알았다. 그림이 대상과 닮았는지 아닌지는 그냥 눈으로 보면 알 수 있는 문제니까. 적어도 엽연채가 그린 초상화는 제법 그럴듯한 편이었다.
추길이 말했다.
“그런데 그 오 마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나도.”
혜연도 고개를 주억이며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엽연채의 그림이 완성되기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각쯤 지나자 엽연채의 붓끝에서 그려지던 사람의 얼굴이 거의 완성되었고, 혜연과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렇게 생겼어요.”
화지畫紙 위에는 거칠고 투박하게 생긴 한 마마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 마마는 머리에 백옥을 상감한 비단 말액을 두른 채 아주 평범한 올림머리를 하고 있었다. 올림머리에는 은잠과 백옥 편방扁方을 꽂았고 나이 든 마마들이 하는 평범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네모난 얼굴에 조금 처진 사나운 눈, 납작한 코에 입술은 얇고 아래턱에는 털이 자라나 있는 흑색점이 있었다.
“아이고. 마님이 그린 그림을 보니 생각이 났어요. 바로 이렇게 생겼어요!”
추길은 놀라서 소리쳤고 혜연도 그렇다며 연신 고갯짓했다.
“방금 전에는 인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지금 이렇게 그림을 그려 놓으니 생각이 났어요. 안 그랬으면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존재감 없게 생긴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