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35화 (535/858)

제535화

“앉으세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태자비 마마, 노왕비 마마. 탑상에 앉으시지요.”

상석은 일반적으로 주인이 앉는데 태자비와 노왕비는 황실의 귀인이니 엽연채는 그들에게 상석을 내주었다. 노왕비는 잠시 망설이다가 태자비가 자단목 귀비탑에 앉는 걸 보더니 할 수 없이 자신도 귀비탑의 한쪽에 자리했다.

“큰아가씨도 앉아요.”

엽연채는 하좌의 권의를 가리켰다.

그러자 주묘서는 또 표정이 굳어졌다. 엽연채가 이미 앞에 있는 권의에 앉았으니 자신은 그 뒤에 있는 권의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주묘서는 태자비와 노왕비는 상석에 앉은 반면 자신은 하좌에 앉았으니 이보다 더 억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제 춘산이 했던 충고와 태자의 손찌검이 떠오르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추길이 쟁반을 들고 와 차를 올렸다.

태자비가 엽연채를 보니 그녀는 오늘 집에서 입는 바탕이 오글쪼글한 견직물로 만든, 구름 문양이 들어간 적삼과 은실로 짠 월화군을 입어 단아하고 우아해 보였다. 또 머리에는 동주를 상감한 술이 달린 연꽃 보요만 꽂고 있었는데, 금빛 보요가 살짝 흔들리자 그녀의 전신에 마치 환한 불이 켜진 것처럼 보였다.

어디 그뿐이랴. 그녀는 일빈일소一嚬一笑(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는다는 뜻으로, 감정이나 표정의 변화를 뜻함)에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광채가 담겨 있었다.

태자비는 눈을 깜빡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추어올렸다.

“진서후 부인은 정말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는군. 지금 차림만 봐도 우리가 이렇게 입었다면 분명 큰길에서 사람 구경도 못 했을 거네.

그런데 진서후 부인은 다르군. 청아한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누더기를 걸쳐 놔도 당대 최고의 미모를 뽐낼 것이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꾸며 놔도 따라잡지 못할 걸세. 하하하. 주 측비, 안 그런가?”

주묘서는 선웃음조차 지어내지 못했다. 어제 태자비가 자신은 나이가 젊고 화려하고 부귀하게 꾸며 놔서 예쁠 뿐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뺨을 찰싹찰싹 얻어맞는 기분마저 들었다.

주묘서는 속으로 태자비를 수백 번도 넘게 욕했지만, 태자비보다도 엽연채가 더욱 미웠고 당장이라도 엽연채에게 달려가 그녀의 얼굴을 할퀴어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연채는 두 눈을 끔뻑이더니 붉은 입술을 당겼다. 그녀도 태자비가 지금 자신들 두 사람을 이간질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주묘서의 성격상 분명 태자부에서 난리를 치며 이런저런 소란을 피웠을 것이다. 백여언 같은 첩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상대가 태자비라 할지라도 분명 머리 꼭대기에 올라 온갖 방법으로 괴롭혔을 것이다.

이제 태자비가 반격을 하는 셈인데, 이걸 근본적인 해결법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주 측비, 내가 묻고 있지 않은가?”

태자비는 환하게 웃으며 주묘서를 쳐다봤다.

“진서후 부인은 아무렇게나 꾸며도 그 미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않는가?”

주묘서의 얼굴은 그야말로 석상이 따로 없었다. 정말이지 이 사실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인정하지 않으면 엽연채 이 빌어먹을 여인은 분명 자신을 미워할 것이 분명했다. 주묘서는 겨우겨우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작은새언니는 원래부터 아주 아름다웠지요.”

주묘서 그 자신조차 어떻게 역겨운 마음을 참고 이 말을 꺼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린 어떻게 꾸며 놔도 진서후 부인을 따라잡지 못할 거네.”

태자비는 아주 유쾌한 미소를 지었고 농담을 하는 척 본심을 흘렸다.

“주 측비는 하루에 한 번씩 머리 장신구를 바꾸는데 말이지. 하하하.”

주묘서는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뺨이 얼얼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을 뿐으로, 당장이라도 쥐구멍에 숨어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빌어먹을 년, 또 내 체면을 깎다니!’

엽연채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태자비 옆을 쳐다보고는 이렇게 화제를 바꿨다.

“아, 마마를 곁에서 모시던 사람이 바뀌었군요.”

태자비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렇네.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내보냈지.”

엽연채 곁에 서 있던 혜연과 추길이 태자비 옆을 보니 열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검은 옷의 시녀가 있었는데 단정하고 아름답게 생긴 편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우락부락한 모습의 마마였는데 그녀는 엽연채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가 자신을 언급하자 그녀는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저도 그 일을 알고 있습니다. 들어 보니 금슬이가 잘못을 저질러 태자부에서 나가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당연히 다른 사람을 뽑으셔야 했겠죠.”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시선을 그 우락부락한 마마에게 향했다.

“그런데 제 기억으로는 전에 태자비 마마를 모시던 사람은 석 마마였고 지난번에 천산에 갈 때도 그 사람이 태자비 마마를 따라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군요.”

태자비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곁에는 마마들이 많네. 석 마마가 내 심복이지만 매번 날 따라다닐 수는 없지. 가끔은 휴가를 주기도 하고. 부인도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외출할 때도 같은 사람만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닐 거고.”

“그저 궁금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주억이며 그 마마의 아래턱에 난 커다란 흑색점을 쳐다봤다. 그 점 위에는 털도 한 가닥 자라나 있었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봐도 좀 옹졸한 인상을 주었다.

태자비는 헛기침을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 마마의 자수를 제일 좋아하네. 솜씨가 아주 일품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 집 난롱 안에는 지금 무슨 목탄을 태우고 있는가? 연기도 전혀 안 나고 은은한 향기도 좀 나는군.”

엽연채는 잔잔한 미소를 짓더니 어떤 목탄을 태우고 있는지 말해 준 다음 조금 있다가 선물로 좀 드리겠다고 덧붙였다.

그 후 노왕비가 지난번 출행 이야기를 꺼냈고, 공통된 이야깃거리가 있어 그런대로 꽤 즐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오직 주묘서만이 정색한 채 대화에 끼지 않았다.

엽연채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태자비 역시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경국지색인 엽연채를 보고만 있어도 혐오감과 질투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주묘서는 지금 단 일각조차도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정오가 되었고 엽연채는 식사를 하고 가라고 그들을 붙잡았다. 태자비와 주묘서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깐 더 앉아 있다가 진서후부를 떠났다.

묘언헌으로 돌아온 주묘서는 화가 잔뜩 나 탑상에 털썩 앉았고, 춘산은 그런 주묘서의 모습을 보더니 눈살을 모으며 설득했다.

“마마, 절대로 태자비의 간계에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마마께서 화를 내실수록 태자비의 생각대로 움직이시게 되는 겁니다.”

주묘서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통 터져 했다.

“그 빌어먹을 늙은 계집이……!”

주묘서는 태자비의 행동이 자신과 엽연채를 이간질하려는 간책이라는 걸 똑똑히 알면서도 여전히 화가 치밀었고 증오심이 타올랐다!

‘빌어먹을 년! 세상에는 빌어먹을 것들이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걸까!’

그래도 그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엽연채였다.

이때 녹지가 냉차를 가져오며 권했다.

“마마, 일단 차를 드시고 화를 좀 가라앉히세요!”

열이 뻗쳐 입과 혀가 마른 주묘서는 찻잔을 확 낚아채더니 차를 두 모금 들이켰다. 하나 그럼에도 가슴속의 불길은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녹지와 춘산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는데 상대의 눈에서 조금 어이없다는 눈빛을 읽었다.

녹지가 말했다.

“앞으로 태자비 쪽은 되도록 가지 마세요.”

“가지 말라니?”

그 말에 주묘서는 가슴속의 화가 다시 화르륵 타올랐다.

“내가 가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

녹지와 춘산은 계속해서 그녀를 타이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밖에서 청소를 하던 어린 시녀는 잠시 동안 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는 별로 가치 있는 내용은 들리지 않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 시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살금살금 정화원으로 뛰어 들어가 주묘서 쪽의 상황을 보고했다. 탑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태자비는 이야기를 듣더니 시원하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런 계집은 살짝만 놀려 줘도 바로 성을 내는 법이지. 감히 내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다니. 정말이지 제 명을 단축하는구나.”

이때, 석 마마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붓과 먹 그리고 첩자 한 장이 올려져 있었고 그녀는 쟁반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태자비는 붓을 집어 들더니 첩자에 글을 빼곡히 적은 다음 명월을 통해 첩자를 보냈다.

* * *

그 시각 진서후부.

오늘 태자비와 주묘서가 방문하고 나니 엽연채는 활을 쏠 기분이 나지 않아 방 안에서 추길, 혜연과 함께 창화窓花를 오리고 있었다. 청유 등은 밖에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분주했다.

추길은 가위를 들고 원앙 모양을 오리며 입을 뗐다.

“그런데… 오늘 태자비 마마 일행이 오신 건 좀 이상했어. 주 측비나 태자비 마마 모두 우리 마님과는 겉으로나 웃었지 속으로는 편치 않은 사이였잖아. 그래서 평소에는 가급적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했고. 다툼 없이 평화롭게 지내면 그만인 사이인데, 오늘은 왜 일부러 찾아온 걸까?”

“태자비 마마는 이간질하려고 오신 거야. 어찌나 노골적이시던지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겠더라.”

혜연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들고 있던 아름다운 꽃 모양 전지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펼쳐서 보니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추길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을 받았다.

“우리 마님과 주묘서가 싸우게 만들려는 거 아냐? 그럼 칼날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주묘서의 뒷배를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되면 마님과 나리는 아마도 태자 전하와 사이가 벌어질 거야.”

전에 추길은 엽연채가 태자비와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장차 황후가 될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나니 주운환이 아주 대단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설령 태자라고 해도 주운환의 체면을 살려 줘야 했다. 주묘서가 주운환에게 밉보이자 태자는 주묘서에게 손찌검을 했고, 지난번 천산 행차 때는 황후마저도 갖은 방법으로 엽연채와 친해지려고 했다.

주운환은 그야말로 근신近臣(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던 신하)에 필적하는 존재였다. 그에 반해 지금 태자비는 태자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엽연채도 자신을 낮춰 가며 그녀에게 아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살포시 인상을 쓰며 이렇게 말했다.

“태자비의 계략은 너무 티가 난다. 주묘서조차도 넘어가지 않으니 나는 더 말할 것도 없지.”

“주 측비의 성격을 볼 때 계략인 걸 알면서도 속에서 증오심이 싹틀 겁니다. 그러니 태자비의 계략은 정말 음흉하다고 볼 수 있죠. 이건 음모陰謀가 아니라 양모陽謀(공공연한 꾀)입니다! 지금 주 측비는 겨우 참고 있을 테니 이런 상황이 장기화된다면 결국 폭발할 겁니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꽃놀이 연회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태자비의 이 계략이 먹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일로 진서후부와 태자부의 관계가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되었잖니. 주묘서는 그저 두 집안을 묶어 주는 끈에 불과하지. 주묘서는 어리석게 굴어도 우리는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태자는 둘째치고 우리 모두 이미 눈치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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