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4화
한편, 태자비의 처소에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던 주묘서는 자신의 기세가 주위를 압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튿날 또다시 백여언과 전 서비 등을 불러 태자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른 아침, 주묘서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 태자비에게 예를 올렸다.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태자비는 주묘서가 앞섶이 교차하고 연뿌리에서 나는 실로 만든 수홍색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다들 앉게.”
주묘서는 작게 콧방귀를 뀌더니 아래턱을 살짝 위로 치켜든 채 하좌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태자비를 쓱 쳐다보더니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마, 어제도 산호와 대모로 장식된 머리 장신구를 하고 계셨는데 오늘도 그걸 하셨네요. 그저께는 양지옥羊脂玉으로 만든 반달 모양의 장신구를 꽂고 계셨죠. 장신구 몇 개를 계속 번갈아 가며 쓰시는데 새로운 건 없으신가요?”
태자비는 낯빛이 차갑게 변했으나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응수했다.
“자넨 정말 농담도 잘하는군. 그저 바꾸기 귀찮은 것뿐이네.”
“하긴. 마마께서는 나이가 드셨으니 저희 같은 젊은 사람들처럼 새로운 걸 좋아하지는 않으시겠네요.”
주묘서의 비아냥에 태자비는 말문이 막혔고 낯빛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원래도 엄숙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은 정색을 하니 인상이 더욱 사나워 보였다.
옆에 있던 전 서비와 백여언 등은 손수건으로 입가를 누르며 억눌린 웃음소리를 냈다. 우선 태자비가 사람들 앞에서 조롱을 당해 체면이 깎이는 모습을 보니 재미있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묘서의 뻔뻔함을 비웃는 것이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자신이 젊다고 자랑을 하는데 좋게 말하면 솔직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교양이 없는 것이었다.
태자비는 안색이 어두운 데 반해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당연히 전 서비와 백여언 등이 태자비를 조소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주묘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 위에 꽂은 머리 장식을 만졌다. 금줄 세공을 한 봉황 모양의 다채로운 빛깔이 흐르는 장신구였다. 위쪽의 보석들은 하나같이 반짝이고 있었고 수공 기술이 뛰어나 화려하고 귀해 보여 딱 봐도 평범한 장신구는 아니었다.
“이건 그저께 전하께서 제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예쁘다며 제게 치장을 많이 하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태자비는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자네는 치장을 많이 해야겠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치장을 해야만 아름다운 건 아니지. 지난번에 천산에서 진서후 부인을 봤는데 머리에 동주를 상감한 해당화 보요만 꽂았는데도 아름답기가 비할 데가 없더군.
그 모습을 보니 아무리 젊고 예쁘다 하더라도 꼭 날마다 장신구를 바꿔 꽂아야 하는 건 아니다 싶더군. 아주 아름답고 귀한 장신구도 꼭 필요 없는 게지. 제일 중요한 건 역시나 외모다, 이 말일세! 진서후 부인은 특출난 외양을 가졌으니 아무거나 꽂아도 아름다운 게지. 그런데 자네는……. 하던 대로 치장을 많이 하게나!”
주묘서는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자신은 치장을 해야만 아름답고 엽연채는 치장하지 않아도 아름답다는 말 아닌가! 자신이 엽연채에겐 비교가 안 된다고? 하지만 엽연채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태를 떠올린 주묘서 입을 다물었다.
주묘서는 안 그래도 엽연채를 미워했는데 지금 태자비가 이런 말을 꺼내자 엽연채가 더욱 미워졌고 심한 질투를 느꼈다.
“참. 진서후 부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태자비는 질투심으로 가득한 주묘서의 눈빛을 보더니 비웃음을 지었다.
“진서후가 집을 떠난 지 여러 날이 지나 진서후 부인이 혼자 외롭게 집에 있겠군. 참 적적하겠어. 평소에도 부인이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네. 그런데도 주 측비가 부인을 찾아가는 걸 못 봤단 말이지. 설마 지난번 꽃놀이 연회 일로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건가? 하하하.”
그 말에 주묘서는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지난번 꽃놀이 연회 때 엽연채가 인정사정없이 자신에게 면박을 줬던 일과 그 후 자신이 겪었던 악몽, 즉 태자에게 폐위를 당할 뻔했던 일이 떠올랐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엽연채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주묘서는 얼른 이렇게 변명했다.
“그럴 리가요. 지난번 일은 작은 오해였고 저희는 이미 화해했습니다. 제가 새언니를 보러 가지 않는 건… 요즘 도성 안에 일이 많아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는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일이란 양왕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 하지만 요 며칠 도성 안도 안정이 되었고 다들 적잖이 갑갑해하니 진서후부로 자네 새언니를 보러 가는 건 어떤가?”
태자비는 주묘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밖에 대고 소리쳤다.
“명월아. 진서후부에 가서 첩자를 전달하고 오너라. 내일 우리가 부인을 보러 놀러 가겠다고 전하거라.”
명월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주묘서의 표정이 음랭하게 변했다. 태자비가 자신이 엽연채보다 미모가 떨어진다고 말해서 속이 상한 참인데, 엽연채의 그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만큼은 아주 즐거운 척 연기해야 했다.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세.”
주묘서는 원래 태자비를 조롱하려고 왔던 건데 그녀를 괴롭히는 건 고사하고 본인의 낯이 뜨거워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이곳에 한시도 더 머물러 있을 기분이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태자비에게 예를 올리기 무섭게 탁탁탁 소리를 내며 그곳을 떠났다.
태자비는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주묘서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쓱 올려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묘언헌으로 돌아온 주묘서는 탑상 위에 털썩 앉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요씨 그 빌어먹을 년. 감히 내 체면을 구기다니!”
그 말에 춘산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네가 태자비의 체면을 깎은 적이 한두 번이니? 네가 태자비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는 건 괜찮고, 태자비는 그저 네 체면을 한번 깎은 것뿐인데 그것도 안 된다는 거니?’
“그리고 엽연채 그 빌어먹을 년도……!”
주묘서는 그리 말하며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마마, 화를 가라앉히세요.”
춘산은 눈살을 찡그리며 그녀를 달랬다.
“소인이 보기에 태자비 마마께서는 분명 마마와 진서후 부인을 비교해 마마의 마음에 증오심을 싹 틔우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을 이간질하시려는 거죠.
지난번에 마마와 진서후 내외의 사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태자 전하께서도 마마에게 손찌검을 하신 거잖아요. 지금 태자비 마마께서는 이간질을 해서 마마와 진서후 부인의 사이를 조금씩 벌어지게 하시고 싶은 것뿐입니다. 결국 두 분의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지게 되면 태자 전하께서 또 지난번처럼…….”
그러자 주묘서는 표정이 굳어졌고 온몸에 소름이 확 끼치더니 몸을 살짝 떨었다. 뒷배를 잃은 그 느낌을 주묘서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네 말이 맞구나. 악독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주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태자비를 욕했다.
“그러니 내일 마마께서는 진서후부에 가셔서 잘 지내다 오세요. 그분이 또 무슨 일을 꾸미지는 않는지 지켜보시고요.”
춘산의 당부에도 주묘서는 엽연채를 생각하자 불쑥 혐오감이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일단 엽연채 그 빌어먹을 것과 잘 지내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황후 마마가 되시면 세자야를 일으켜 세우시고 그것들을 끝장내 버리면 됩니다!”
녹지의 이 말을 듣고서야 주묘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춘산은 좀 어이가 없어서 입이 벌어졌다.
‘정말로 진서후 부부와 잘 지낼 수는 없는 건가? 왜 무슨 일만 했다 하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관심을 돌리는 거야?’
* * *
음력 섣달이 되자 날씨는 점점 더 추워졌지만 오늘은 날씨가 아주 청명했다. 그래서 엽연채는 작은 활을 들고 무도장에서 활을 쏘며 놀고 있었다.
이때, 추길이 첩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엽연채를 첩자를 열어 보더니 입꼬리를 쓱 당겼다. 그러고는 방으로 돌아가더니 혜연과 청유 등에게 내일 태자비와 주묘서가 오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이튿날 진시辰時(오전 7시~9시)쯤이 되자 추길이 태자비, 주묘서 일행을 데려왔고 함께 온 손님 중에는 노왕비도 있었다. 태자비는 노왕비과 본래 사이가 좋았고 사람이 많으면 더 즐거울 거라는 생각에 그녀도 불러온 것이었다.
엽연채는 운연거의 낭하에 서 있었는데 그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러 나갔다.
“태자비 마마와 노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몸을 세우더니 주묘서를 쳐다보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큰아가씨.”
주묘서는 엽연채가 태자비와 노왕비에게만 예를 올리고 자신에게는 몸을 세운 채 ‘큰아가씨’라고 부르자 이것이 법도에 맞는 줄 알면서도 성이 났다. 이러면 자신이 이들보다 지위가 낮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두고 보라지, 언젠가는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테니까!’
“어제 내가 농담으로 진서후 부인이 지난번 꽃놀이 연회 일로 정말로 화가 난 거 아니냐는 말을 했었네. 이리 가까운 곳에 지내는데도 왕래가 적고 친밀해 보이지 않으니 말이네.”
태자비가 웃는 낯으로 운을 뗐다.
뒤에 있던 춘산은 정색하고 있는 주묘서를 보더니 얼른 그녀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주묘서는 경직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작은새언니, 진작부터 새언니를 보러 오고 싶었는데 며칠 전에 도성 안이 어수선해져서 늦어지고 말았어요.”
엽연채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으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얼마 전에 번잡하긴 했죠. 저도 외출할 엄두를 못 냈어요. 다들 안으로 드시지요.”
그녀는 그리 말하며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일행은 운연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묘서도 운연거 안으로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집 안은 탁 트여 있고 정교하게 꾸며져 있었다. 응접실과 소청 사이에는 오색 빛깔 유리로 엮은 주렴이 반쯤 드리워져 있었고, 주렴을 걷어 보니 안에는 매화 절지 문양이 들어간 자단목 귀비탑이 자리했으며 중간쯤에 나전을 상감한 옻칠을 한 작은 탁자가 보였다.
하좌의 양쪽에는 각각 만수萬壽 문양이 들어간 옻칠을 한 권의가 세 개씩 자리했고 다층 진열장 위에는 갖가지 도자기와 분경, 옥기玉器 등이 올려져 있었다. 또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난롱暖籠(화로가 들어 있는 대바구니)이 놓여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물건은 전부 정교하며 기품이 넘쳤고, 주묘서의 처소보다 훨씬 세련되고 화려하며 부티가 흘렀다.
‘나보다 더 좋은 곳에 살다니! 나보다 더 세련된 곳에 살다니!’
주묘서는 더욱 짜증이 나고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