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3화
이튿날 이른 아침, 백여언 등 열 명가량의 첩실들이 잇달아 묘언헌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녹지는 그들보고 안으로 들어와 앉으라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다들 정원에서 기다리세요. 측비 마마의 준비가 곧 끝날 겁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정원에서 서서 기다리게 했다.
백여언 등은 낯빛이 확 변했지만 감히 분통을 터트리지는 못했다. 그들은 별수 없이 모두 정원에 서 있었는데 마치 상전을 알현하려 모인 노비들처럼 보였다.
주묘서는 그제야 나른한 모습으로 일어났다. 춘산이 대야를 들고 와 세수를 한 주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고개를 들어 창밖을 쓱 쳐다봤다. 정원에 첩실들이 새까맣게 모여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치장을 하자꾸나.”
그러고는 구리 거울 앞에 앉았다.
춘산은 머리를 빗어 줬고 이어 입을 옷도 골라 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나니 이미 반 시진이 흐른 후였다.
백여언 등의 첩실들은 하나같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죠!”
주묘서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띠며 걸어나왔다.
“가서 태자비 마마께 문안 인사를 드립시다.”
말을 마친 그녀는 조그만 얼굴을 치켜들고 목을 뻣뻣이 세운 채 처소 밖으로 나갔다.
백여언과 몇몇 서비들은 서로 눈을 맞추었지만, 할 수 없이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함께 정화원으로 몰려들었다.
태자비는 화가 나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어젯밤 주묘서가 여러 처소의 첩실들에게 태자비에게 문안을 드리러 가자고 알렸으니, 이런 대대적인 움직임을 태자비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주묘서가 사람들을 모아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이를 막는다면 온종일 주묘서를 주시하고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그리되면 주묘서의 가치를 높여 주는 꼴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은 옹졸한 사람처럼 보일 터. 그래서 태자비는 그저 정화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 멀리 주묘서가 백여언 등을 이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곱게 치장을 한 많은 여인들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주묘서가 가장 앞에 서 있었는데 그녀는 수홍색 백화군百花裙을 입고 별 문양이 들어간 진홍색 소매 없는 외투를 걸쳤으며, 머리에는 붉은색 수정으로 장식된 은국화銀菊花 머리 장신구를 꽂은 차림이었다. 한마디로 귀티가 흐르는 치장이었다.
그녀는 자그마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씩씩하고 힘찬 모습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어 한 무리의 첩실들이 그녀를 따라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치 태자부의 여인들이 전부 주묘서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주묘서가 중심이, 우두머리가 된 것처럼 말이다. 태자비는 치솟는 분노를 꾹꾹 내렸다.
주묘서는 태자비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몸을 살짝 낮추며 인사했다.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태자비는 이렇게 우쭐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들 일어나게.”
주묘서는 버들잎 모양의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마마, 병이 나신 것 아니셨습니까? 괜찮아 보이시는데요.”
이는 자신이 총애를 받게 되자 태자비가 꾀병을 부리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담대하게 행동하지 않음을 은근히 비꼬는 말이었다.
태자비는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고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지만 분노를 폭발시키지는 않았다.
“얼마간 몸조리를 했으니 좀 나아진 게 당연하지.”
“며칠 전에 태의가 태자부에 와서 마마를 진찰했지요? 마침 제가 도사정度思亭 쪽에서 밖으로 나가는 태의의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마의 상태가 어떤지 물어봤죠. 그 태의가 말하길 마마께서 가슴이 아주 답답하고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이 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러셨습니까?”
주묘서는 깔보는 눈빛을 보였다.
태자비가 어디 정말로 병이 났겠는가? 그러니 태의 또한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부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둘러댔다.
“그렇네. 아마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몸이 편치 않았던 것 같네.”
“아이고……. 어디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이 나신다고 했는데, 혹 아이가 들어선 것 아닐까요?”
주묘서가 입매를 높이 당기며 묻자 태자비는 표정이 굳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에게는 적자가 없기 때문에 귀한 태자비 신분임에도 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다른 사람들이 임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고, 이는 명백한 약점이었다.
그런데 지금 주묘서가 정곡을 찌른 것이다.
자신은 엊그제 월경이 끝났는데 어떻게 아이가 들어설 수 있겠는가?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길 수만 있다면 신불에 빌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으니 태자비는 냉랭한 목소리로 단호히 대꾸했다.
“자네가 오해한 걸세. 그저 날씨가 추워져 그런 거네.”
그러자 주묘서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유, 정말 아쉽네요. 마마, 서두르세요. 아무래도 마마는 이제 삼십 대이시니까요.”
주묘서가 또다시 태자비의 가슴에 비수를 꽂자, 태자비가 싸늘한 목소리로 큰소리를 쳤다.
“방자하구나!”
“방자하다고 하셨습니까?”
주묘서는 두 눈을 부릅떴다.
“마마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어째서 방자하다는 말씀입니까? 제 말 어디가 틀렸다는 말씀입니까?”
그녀는 그리 말하며 백여언 등 몇몇 서비들과 첩실들을 쳐다봤다. 전 서비는 태자비를 한 번 보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주 측비는 결코 선을 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 서비는 호부상서 전지신의 서녀로, 가장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하며 빌붙는 유형이었다.
다만 과거 풍 측비에게는 아첨을 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풍 측비가 태자비를 누르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의 주운환만큼 세가 대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풍 측비는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어디 주묘서처럼 목을 뻣뻣이 세우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려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제멋대로 행동했겠는가? 그런데 하필 주묘서는 이런 재주가 있었다.
또 주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는 한 주묘서도 무너지지 않을 텐데, 지금 주씨 가문이 쇠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전 서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묘서 쪽으로 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요. 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주묘서는 무고하다는 얼굴로 태자비를 쳐다봤다.
“태자비 마마께서는 곧 서른이 되시지 않나요? 서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충고 좀 해 드린 것뿐이에요.”
“이……!”
태자비는 가슴이 미친 듯이 벌렁거렸지만 반박할 도리가 없었다.
“무, 무례하구나…….”
“제 어디가 무례하다는 겁니까?”
주묘서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더니 이어 입을 씰쭉거렸다.
“알겠습니다. 제가 무례하게 굴었군요.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벌을 내리십시오!”
태자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삿대질을 하며 정말로 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에 석 마마가 얼른 앞으로 나와 상황을 수습했다.
“마마께서는 그저 농을 하신 것뿐이니 측비께서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그런가?”
주묘서는 두 눈을 치뜨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제가 잘못한 것 같네요. 아무튼 마마께서 평안해 보여 마음이 놓입니다. 그럼 마마의 휴식을 방해하면 안 되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예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전 서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주묘서를 따라 예를 올린 후 그곳을 떠났다.
백여언 등은 두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하는 수 없이 그들도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우르르 정화원을 떠났다.
태자비는 그 모습을 보며 화가 나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보거라……. 이 태자부에… 아직도 내가 설 자리가 있는 것이냐?”
뒤에 있던 석 마마와 시녀들은 억울한 나머지 눈물이 다 쏟아질 지경이었다.
태자비는 주묘서가 사람들을 데리고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으니 가슴이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빌어먹을 년!”
태자비는 핏발이 설 정도로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은 당한 적이 없다.”
“분노는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주씨 가문이 무너지지 않는 한 주묘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특히 지난번 태자 전하의 손찌검으로 주묘서도 분별력이 조금은 생겼을 겁니다. 일정 범위 안에서만 행동한다면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태자 전하께서는 묵과하실 테니 분노로는 영원히 주묘서를 이길 수 없사옵니다.”
석 마마가 나서서 그녀를 다독였고, 태자비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을 보였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화근을 싹 도려내자는 거다.”
그리 말하는 태자비의 눈빛은 좀 전보다 더욱 음랭하게 변했다.
“마마, 무슨 계책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석 마마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자비는 석 마마의 귀에 대고 자신의 생각을 말해 줬고, 석 마마는 두 눈을 반짝였다.
* * *
저녁이 되자 태자는 태자부로 돌아왔고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먼저 묘언헌으로 향했다. 주묘서는 또 태자 앞에서 한바탕 울며 태자비가 자신을 업신여겼다고 하소연했다.
노기충천한 태자는 곧장 정화원으로 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태자비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서의 말이 어디가 틀렸다는 것이오? 당신은 곧 서른이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내게 적자조차 낳아 주지 못했소. 서는 좋은 마음으로 이곳에 와서 당신을 위로하며 충고를 해 준 건데 당신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성을 내고 호통을 쳤소. 이런 게 태자비로서의 기품이라는 말이오?”
말을 마친 태자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나가 버렸다.
태자비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정화원을 나온 태자는 다시 묘언헌으로 돌아갔다. 그는 여전히 주묘서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가세도 좋고 용모도 아름다우며 나이도 어렸다.
또 그녀를 측비로 들여 주운환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으니 이로움은 많고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신선하게 노는 방법도 많았다.
주묘서가 제멋대로 구는 면이 있긴 했지만 자신의 총애를 얻었으니 위세를 떠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처음부터 태자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못생긴 여인이 인제 나이가 들기까지 했으니 마음에 들 리 있는가.
전에는 요양성과의 관계 때문에 태자비를 존중해 줬다지만, 이젠 자신이 대국을 장악하게 되었고 황제의 자리까지 겨우 한 걸음 정도 남은 상태였다. 전에는 자신이 군신들을 구슬려 포섭하려 했는데 이젠 군신들이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며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상서 여섯 명과 그 위로 재상이 있고 대제 병권의 절반을 손에 쥔 주운환이 있으며 정선제의 명령을 따르는 금위군이 있는데, 모두 정선제의 뜻에 따라 자신을 추대할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요양성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태자는 이제 태자비를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태자비의 평범하고 엄숙한 얼굴을 볼 때마다 점점 더 혐오감이 들 따름이었다.
그런 데다 지금 주묘서는 태자비를 깔아뭉개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니, 태자는 주묘서를 도우며 이를 즐거움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