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32화 (532/858)

제532화

“나 의정이 오셨습니다!”

채결이 다급한 목소리로 고했다.

소스라친 태자와 정 황후는 얼른 자리를 내줬고 나 의정은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정선제에게 예를 올린 후 바로 진맥을 짚었다.

태자와 정 황후는 초조해하며 앞으로 다가왔다.

“어떤가?”

나 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이런…….”

그는 의식 불명인 정선제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기적이 없는 한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지금은 일단 몸조리를 하도록 하시지요. 아, 이것 참…….”

“아바마마…….”

태자는 탑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로 연로한 아버지가 염려됐다.

자신이 아주 어릴 때, 아버지는 자신을 태자로 책봉했고 온 마음을 다해 가르치고 키워 왔다. 아무리 잘못을 해도 아버지는 항상 자신을 보호해 줬고 자신이 제위에 오르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지금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마지막 큰 선물을 주려고 했다. 바로 양왕이라는 화근을 제거하는 것 말이다.

태자는 정말로 감동했고 아버지를 떠나보내려 하니 몹시도 아쉬웠다. 하지만 자신이 황제가 된다는 생각이 뒤이어 들자 금세 가슴이 부풀었다.

나 의정은 정선제에게 침을 놓았고, 잠시 후 채결이 약을 들고 돌아오자 태자는 직접 정선제에게 약을 먹이고 나서야 그곳을 떠났다.

* * *

양왕이 떠난 그날, 육 측비 등은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양왕이 갑자기 조앵기를 데리고 달려 나갔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끊임없이 추측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육 측비가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집안의 사동이 그녀를 막아서며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안사람들은 분위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런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무사하고 벅적벅적한 도성에 갑자기 말을 탄 금위군들이 궁문에서 쏜살같이 달려 나오더니 황방을 붙이는 곳에 멈춰 서서 현상금이 걸린 체포 공고문을 붙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어제 누군가가 태자의 음식에 독을 탔다. 범인은 현장에서 붙잡혔고 모진 고문 끝에 음식에 넣은 약은 오랫동안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독약이며 이를 사주한 자가 양왕임을 자백했다. 역심을 품고 있던 양왕은 큰 화가 미치기 전에 도망쳤다.」

이는 순식간에 온 도성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풍당당한 금위군들이 양왕부로 들이닥치더니 양왕부 전체를 겹겹이 포위했다. 그들은 식솔들과 시종들을 전부 잡아가 감옥에 넣은 다음 심문했다.

육 측비 등은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 금위군들이 들이닥쳐 이유를 설명하자 그들은 놀라서 낯빛이 하나같이 하얗게 질렸다.

이 여인들은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 됐다. 무섭고 슬펐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절망 속을 허우적거렸다.

“이런 일이 있었다니…….”

육 측비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조앵기만 데리고 도망을 가다니!”

금위군들은 앞으로 다가가 한 사람씩 결박한 다음 그들을 감옥으로 압송했다.

도성은 이 일로 아주 소란스러웠고, 백성들은 한가한 시간에 다들 이 이야기를 했다. 모두 입을 모아 양왕이 대역무도하다고 비난했다. 황제가 죽으면 태자가 제위에 오를 테니 그 전에 태자를 먼저 죽이려 했다며 그를 헐뜯었다. 태자가 죽으면 적자인 양왕이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던가.

한편, 오후에 정신이 든 정선제는 삼천영三千營을 태자에게 내주고는 삼천영을 이끌고 양왕을 추격할 사람을 파견하라고 했다.

이 일이 밖으로 퍼지자 태자와 정 황후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제위가 목전에 다가온 것이다.

정선제는 자신에겐 이미 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길면 보름 짧으면 사나흘일 것이며 자신이 죽고 나면 태자는 바로 제위에 오를 수 있다.

양왕은 타지로 도망쳤지만, 태자가 제위에 오르기 전에 이 일이 벌어졌으니 백성들은 태자가 제위에 오른 후 형제를 포용할 수 없어 의도적으로 양왕을 해친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천하는 이미 태자가 꽉 쥐고 있으니, 양왕은 그저 가을 추수 후의 메뚜기처럼 잠깐 날뛰고 말 것이다.

양왕의 첩실들은 감옥에 갇혀 얼마간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심문을 해도 무엇도 나오지 않았고, 정선제는 결국 가족 간의 일말의 정을 생각해 그들을 양왕부로 돌려보냈다.

양왕부도 원래대로 내버려 뒀고 재산을 몰수하지도 않았다. 그저 금위군들을 시켜 양왕부를 철통같이 감시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정선제가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아직도 양왕을 편애한다고 탄식했다. 또 태자가 대의명분을 잘 헤아려 일을 극단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고 칭찬했다.

하늘에서는 또다시 눈이 내려 온 도성을 하얗게 뒤덮었지만, 양왕에 관한 이야기와 그로 인해 떠들썩한 도성의 분위기는 덮이지 않았다.

* * *

엽연채는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창틀에 엎드린 채 멍하니 설경雪景을 바라보고 있었고, 조그만 손난로를 들고 있는 혜연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님, 걱정 마세요.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혜연이 작은 손난로를 엽연채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리께서 돌아오시면 모든 일이 좋아질 거예요.”

혜연이 재차 위로하는 차에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는 작은 그릇이 놓여 있었다.

“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나리가 돌아오시면 다 괜찮아질 거라니?”

혜연은 감히 양왕의 일을 언급할 수가 없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님이 요 며칠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셔.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너무 걱정이 되셔서 그런 것 같아 내가 위로해 드리고 있었어.”

“잠을 잘 못 주무신다고?”

추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임신한 거 아냐? 들어 보니 임신한 사람들 중에는 갑자기 불면증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고 하던데.’

하지만 속으로 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물어보기가 곤란했다. 괜한 소리를 했다가 자신이 엽연채의 배만 쳐다보고 있고 흑심을 품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지도 몰랐다.

추길은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 그릇을 올려놓고 그저 이렇게 말했다.

“혈연血燕을 가져왔습니다. 마님, 어서 와서 드세요.”

엽연채는 무덤덤한 눈빛으로 탁자를 힐끗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눈은 왜 이렇게 많이 오는 걸까?”

“금방 멈출 겁니다. 벌써 한나절이나 내렸으니까요.”

혜연이 말했다.

“하인들에게 무도장을 청소하라고 하거라. 내일 그곳에 가서 좀 움직여야겠구나.”

엽연채의 분부에 혜연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 * *

양왕에게 문제가 생기자 가장 기뻐한 사람들은 당연히 태자와 그 무리들이었다.

대세는 이미 판가름 났기 때문에 조정 안은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했고, 조정 신하들은 국정을 운영하는 태자에게 더욱 깍듯하게 대했다.

태자는 오직 양왕을 따랐던 사람들을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철저히 제거해 버렸다.

한편, 태자부의 묘언헌.

주묘서는 진씨와 함께 탑상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모녀는 심복을 제외한 하인들을 모두 내보낸 뒤 속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전하께서 곧 제위에 오르실 것 같아요.”

주묘서는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곧…….”

말을 잇던 주묘서는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그녀는 늘 태자가 제위에 오르면 자신이 응당 황후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태자비를 제거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라고 여겼는데,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그곳에서 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진씨도 짜증이 잔뜩 치밀어 올랐다.

귀비의 지위도 높기는 하나 어쨌든 황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제 여식은 황후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어째서 억울하게 귀비 자리에 머물러야 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더 이상 주운환에게 기대지 않아도 되며, 조금씩 주운환을 압박해 끌어내리고 주비양을 밀어 올릴 수 있었다.

“사실 마마께서는 아무것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총애를 받고 계시니 조금씩 지속적으로 태자비를 압박하면 고통에 못 견뎌 할 겁니다. 마마께서 대를 이을 아들만 낳으시면 태자비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정 마마의 말에 주묘서는 득의양양한 눈빛을 보였다.

진씨는 주묘서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눈 후 집으로 돌아갔다.

주묘서는 진씨와 정 마마를 문밖으로 배웅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태자비를 떠올렸다. 순간 눈에 조롱기가 스쳤다. 향비장탑香妃長榻 위에 삐뚤게 앉은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태자비에게 문안 인사를 한 지 오래됐구나. 내일 백여언을 비롯한 그 빌어먹을 것들을 불러 함께 태자비를 보러 가야겠다.”

춘산은 주묘서가 말끝마다 백여언을 비롯한 첩실들을 ‘그 빌어먹을 것들’이라고 부르자 입꼬리를 실룩였다.

녹지가 말했다.

“태자비 마마께서 병이 나셔서 문안 인사는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묘서는 하하 냉소를 흘렸다. 지난번 꽃놀이 연회 때 자신이 태자에게 뺨을 맞자 태자비와 백여언 그 빌어먹을 것들이 대뜸 찾아와 한바탕 비웃어댔다. 그러나 그 후 자신은 태자에게 사과했고 다시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당연히 태자비와 백여언 등은 낯빛이 새파래졌다. 태자비는 주묘서의 기고만장한 꼴을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어 꾀병을 부렸고 문안 인사를 일절 사절했다. 주묘서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날 테니 말이다.

주묘서 역시 시중을 드는 게 제일 짜증 났고 태자비 앞에서 굽실거리고 싶지도 않았으니 기꺼이 이 자유를 누리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첩실이고 지위가 태자비보다 낮기는 하나, 총애를 받고 있고 가세도 좋으니 여러 부분에서 태자비보다 낫잖아. 보러 가지 않을 이유가 뭐 있담?’

“병이 났다고 하니 더욱더 문안을 가야지.”

주묘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녹지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금세 백여언 등 지위가 있는 열 명가량의 첩실들에게 내일 아침이 밝으면 태자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말을 전달했다.

태자부 여인들은 주묘서가 눈에 거슬렸지만, 그녀의 가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그리하겠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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