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1화
“천산 쪽은 재미있으셨어요?”
“재미있었네.”
진 측비는 거짓웃음을 지으며 조앵기에게 말을 건넸고, 조앵기는 무기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왕비 마마는 어제는 황후 마마의 탄신연에 참석하시고 오늘은 진 측비의… 참, 왕비 마마의 탄일 축하연은 못 본 것 같네요. 마마의 탄신일은 언제인가요?”
미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육 측비가 조앵기 대신 대답했다.
“미 부인, 자네는 모르는군. 왕비 마마의 탄신일은 팔월에 있네. 이미 지나갔지.”
“예?”
미 부인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지나갔다고요? 어째서 축하연을 여시지 않은 겁니까?”
육 측비는 호호호 교태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네. 전하께서도 열라는 말씀이 없으셔서 지금껏 마마의 축하연은 연 적이 없네.”
“그렇습니까?”
미 부인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고, 새로 양왕부에 들어온 첩실들은 소곤거리며 멸시 어린 눈빛으로 조앵기를 훑었다.
왕비는 말할 것도 없고 측비나 평범한 집안의 부인이라고 해도 생일에는 다들 축하연을 열어 아주 떠들썩하게 보내는 법인데, 조앵기는 어엿한 왕비이면서도 축하연조차 열지 못했다. 역시 허울만 좋은 왕비였다.
조앵기는 고개를 숙인 채 조그만 입을 실쭉거렸다. 그녀는 이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도망가 봤자 다시 끌려와 앉혀질 테고, 그럼 더욱 난감해질 뿐이었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여인들은 끊임없이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양왕이 자신에게 선물을 해 줬다고 이야기했고 또 누군가는 양왕이 밤에 자신과 뭔가를 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주로 자신이 얼마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쉴 새 없이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보니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안으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진 측비 등은 화들짝 놀랐지만, 뜻밖에 양왕이 나타났음을 알고 냉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하께서 오셨어요.”
“전하! 전하!”
첩실들은 양왕을 보고는 잇달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양왕 쪽으로 달려가 그를 에워쌌다.
“전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어서 이리로 오셔서 사슴고기 좀 드셔 보세요.”
조앵기는 사람들이 모두 양왕에게 달려갔는데 자신만 가지 않으면 보기에 안 좋을까 봐 마지못해 양왕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조그만 입을 삐죽 내밀고는 여인들 뒤에 섰다.
말 위에 앉아 있는 양왕은 아래에 있는 여인들을 쓱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조앵기에게서 멈췄고, 그가 몸을 낮추더니 조앵기를 위로 확 들어 올렸다.
“으악! 저, 전하! 윽, 흐윽…….”
조앵기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놀라서 눈물을 흘렸다.
육 측비 등도 깜짝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왕은 조앵기를 자신의 앞에 앉히더니 말의 배를 확 걷어찼다. 그러자 말이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고 가까이에 있던 몇몇 첩실들은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꺅!”
“가자!”
양왕이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말채찍을 힘껏 내려치자 말은 곧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진 측비 등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양왕은 왜 갑자기 달려왔으며, 또 어디로 조앵기를 데리고 간 것일까?
양왕은 조앵기를 데리고 곧장 비밀 통로를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갔다.
정선제와 태자는 양왕을 모함할 모든 준비를 마쳤기 때문에 당연히 사람을 시켜 양왕부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 통로는 알지 못했기에 이날 염탐꾼은 양왕이 평소처럼 주루에서 식사를 하며 술을 마셨고, 집으로 돌아가 머물렀다고만 보고를 올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 태자는 여전히 정선제를 대신해 임시로 조회를 주재하고 있었는데, 양왕이 휴가를 내고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채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정선제의 궁침으로 향했다.
정선제의 이번 천산 행차는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마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는 바람에 오히려 병만 더욱 위독해졌다. 침상에 누워 있는 그는 인제 숨을 쉴 때조차 명치 부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정 황후는 침상 옆에 앉아 용 문양이 들어간 담황색 손수건으로 살며시 정선제의 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황제 폐하.”
채결이 침상 앞으로 걸어왔다. 정선제는 병세가 악화돼 더욱 야위어 보였고 본래도 축 처졌던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늘어져 보였다. 낯빛 또한 점점 창백해졌고 온몸에서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특유의 기운을 잔뜩 풍기고 있었다.
정 황후는 채결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나가거나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에 채결이 떠나려는 찰나, 정선제가 눈꺼풀을 움직이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껍질이 벗겨진 창백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폐하, 물 좀 드세요.”
상황을 보던 정 황후는 얼른 한쪽에 놓인 용이 승천하는 문양이 들어간, 옻칠한 나전 탁자로 걸어가 물을 따른 다음 정선제에게 숟가락으로 조금씩 물을 먹여 줬다.
정선제는 두 숟갈을 받아먹고는 잔을 한 번 쳐다봤다. 그를 오랫동안 모셔 온 정 황후는 당연히 그의 뜻을 알아챘고 바로 잔을 들더니 그의 머리를 살며시 받치고 잔으로 물을 먹여 줬다.
정선제는 물을 반 잔 정도 비우고 나서야 길게 숨을 후우 내쉬고는 채결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그게…….”
채결은 잠시 망설였다. 아무래도 정선제의 병세가 심각하니 그를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전부 직접 관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황제의 성격을 알고 있고, 더구나 이는 양왕의 일이니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었다.
“폐하, 양왕 전하 쪽이 조금 이상하옵니다. 어제 양왕부로 돌아가신 후로 더는 외출을 하지 않으셨는데 오늘 이른 아침에 갑자기 휴가를 내시더니 조회도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에 정선제는 어둡고 탁했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더니 심하게 기침을 하고는 상황을 물었다.
“또… 다른 일은 없는 것이냐?”
“양왕 전하 쪽이 심상치 않아 보여 소인이 바로 사람을 시켜 조사를 했사옵니다. 조사 결과, 어제 양왕 전하께서 양왕부로 돌아가신 후로 양왕부 사람들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하옵니다.”
“쿨럭, 쿨럭……!”
정선제는 분노가 섞인 침통한 눈빛을 띠었다.
“그래… 양왕이… 과연 역심을 품고 있었구나…….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이리 빨리 소문을 듣고 도망을 쳤겠느냐……! 양왕의 사람이 짐의 곁에 얼마나 붙어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크흡, 쿨럭. 그래, 좋다!”
“폐하. 노여움을 가라앉히세요.”
정 황후가 그의 가슴을 두드려 줬다.
“채결아, 어서 가서 나 의정을 불러오너라.”
그런데 정선제는 손사래를 치며 태자부터 찾았다.
“서두를 것 없다. 태자를… 불러오너라…….”
“아…….”
그러나 정 황후가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반대했다.
“채결아. 나 의정을 먼저 불러오너라. 그런 다음 사람을 시켜 태자도 불러와서 폐하께 문안 인사를 드리게 하거라.”
“예.”
채결은 대답을 한 뒤 몸을 굽히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정선제는 정 황후가 자신의 몸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잠시 후,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화려하고 귀한 조복을 입은 태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침상 위의 정선제를 보더니 바로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아바마마를 뵈옵니다.”
정선제는 입술을 떼며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태자를 쳐다봤다. 이 아들은 기대를 받으며 태어났고,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태자는 어릴 때부터 듬직하고 효성스러웠다. 가끔 작은 실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살면서 실수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정선제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병세가 예전 같지 않았고 절망과 어둠이 느껴졌다. 그는 병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고 그저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왜 죽음을 빨리 맞이할수록 더없이 기쁜 일이라고 하는지 마침내 깨닫게 된 참이었다. 중환으로 인해 삶이 얼마 남지 않게 된 사람은 지독한 통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견디다 보니 죽음을 가장 고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 역시 그리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바마마, 요즘 몸은 괜찮으십니까?”
태자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정선제를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양왕의 일 말이다……. 도망을 가 버렸으니 아예 독을 쓴 게 발각됐고, 그에 형벌이 두려워 몰래 도망간 거라고 말하자꾸나.”
태자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아바마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태자는 정선제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태자……. 짐이 태자에게 황제로 사는 법을 알려 주겠다.”
그리 말하는 정선제는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이에 채결이 얼른 앞으로 나와 정선제가 계획한 양왕의 독살 사건을 들려주었고 태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아바마마… 어떻게 소자를 위해…….”
태자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가 보니 정선제는 낯빛이 더없이 창백했다.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모든 어려움과 장애물을 말끔히 제거해 주려는 부정父精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속에서 감동이 밀려왔다.
정선제도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태자를 보고는 크게 감동했다.
“양왕은… 짐이 그동안 괜히 그 아이를 아꼈다……. 내 자식들 중에 네가 가장 효성이 지극하고 또 너는 태자이다. 짐은 병이 위중하여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태자… 네가 우리 대제의 정통이고 어릴 때부터 인정이 많고 총명했으니 앞으로…….”
정선제는 태자와 부자간의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에게 감격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정선제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이 천하를 네게 주겠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이 한마디가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순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이 천하를 넘겨주는 게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자신의 나이는 겨우 환갑을 넘긴 수준에 불과하니 그렇게 나이가 든 편은 아니었다.
‘대제에는 칠팔십 대인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어째서 나는… 에휴…….’
정선제의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고 한없이 개탄스러웠으나 자신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천하는 태자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바람이기도 했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중 정선제는 또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더니 몸이 뒤로 젖혀져 빳빳이 굳은 채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바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