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0화
“전하, 신속히 대책을 세워야 하옵니다.”
주 선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왕의 두 눈동자에 살기가 차올랐다.
“난 죽지도 않는 그 늙은이가 내게 손을 쓰려고 한다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저 그 늙은이가 어느 쪽으로 치고 들어올지 모르는 것뿐이었지.”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다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정선제가 했던 그 말 때문이었다.
정선제는 자신이 곧 죽을 거라 여겨 태자를 위해 장애물을 말끔히 치워 버리고 영원히 후환을 제거하려고 했다. 만약 태자가 제위에 오른 뒤 양왕을 처리하게 되면 태자는 형제를 포용하지 못했다는 안 좋은 평판을 듣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러니 정선제는 그전에 양왕에게 손을 쓰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태자를 끔찍이도 보호하는 정선제였다.
이런 생각을 하니 엽연채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정선제가 이미 이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부분이 가장 소름 끼쳤다. 정선제는 행궁에서 양왕에게 타이르는 말을 하기 전부터 이미 계획을 세워 놨던 것이다.
그러니 양왕이 어떻게 대답하든 간에 전부 틀린 답이 되는 것이었다. 어제 양왕이 명확한 태도를 보였을 때 정선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그렇구나. 짐은 알고 있다.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받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만약 양왕이 문득 깨달음을 얻어 정선제 앞에 무릎을 꿇고 다투지 않고 황위를 태자에게 넘기겠다 맹세를 했다면? 그럼 정선제는 또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거짓으로 대답하고 있구나. 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발 물러나는 것일 뿐.’
양왕이 어떻게 반응했든 간에 결국 양왕을 기다리고 있는 건 ‘그 일’인 것이다. 정선제는 기어코 이 일을 실행해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제 일단 온화하게 종용한 그 연극은 양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정선제 본인의 양심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소 황후에 대한 죄책감이나 소 황후 자식에 대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엽연채가 가져온 소식 덕에 방 안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옆에 있던 언동은 눈이 새빨개질 정도로 두 눈을 부릅떴고 어두운 표정으로 냉랭하게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중독되는 사건을 알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는 소인이 태자 전하를 주시하도록 명을 내려 주십시오. 우선 태자 전하의 약점을 잡은 다음 태자 전하께서 손을 쓰시려고 하면 저희가 그 계략을 역이용해 공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태자 전하께서 모함하는 거라고 밝히고 그 내막을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러나 엽연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반대했다.
“그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주 선생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조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더냐? 작년 정산의 제터와 올해 풍씨 가문 형제 일 모두 태자 전하를 가리키고 있지 않았느냐? 모두 자신만만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중요한 건 황제 폐하께서 태자 전하 쪽에 서 계신다는 거다! 지금 우리의 계책은 운환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손에 넣는 것이다.”
“그럼 일단 반격하시죠.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의 일을 폭로하고 저항하며 주 후야께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언동의 의견에 주 선생이 재차 반대를 표했다.
“그리되면 우리의 계획은 전부 엎어질 거다. 전하께서 계속해서 반항하시면 태자 전하와 황제 폐하의 결속만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럼 대업을 대체 언제 이룰 수 있겠느냐?”
언동의 치뜬 두 눈이 더욱 붉은 기를 띠었다.
“그럼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모함당하고 황제 폐하에게 유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되지. 유폐를 당하면 독 안에 든 쥐와 다름없게 된다. 그리되면 황제 폐하께서는 전하께서 재기하는 걸 막기 위해 반드시 전하의 팔이나 다리를 못 쓰게 만들 것이다. 그럼 전하께서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다.”
주 선생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절절 저었다.
대제에서는 형제를 살해하려 한 황자에겐 팔이나 다리를 잘라 버리는 처벌을 내린다. 그리되면 제위에 오를 희망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장애가 있는 황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차라리 후야께 이 일을 알려 속히 도성으로 돌아오시게 한 다음 곧바로 군대를 일으키시죠.”
“지금 군대를 일으키게 되면 힘들게 쌓아 온 평판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신逆臣의 오명을 쓰게 된다. 그리되면 거병의 명분을 잃게 되고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들고일어나 공격해 올 것이다. 사람들과 화합할 수 없게 되니 9할이었던 승산이 4할 내지 5할로 떨어지게 된다.”
주 선생은 계속해서 언동을 설득했다.
“우린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이 일에만 전념했으니 일격에 끝내야 한다! 지금 계획대로 계속 진행해 천시, 지리, 인화가 다 갖추어지면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가 결정될 것이다.
전하, 전하께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단 뒤로 물러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일단 도성을 떠나시옵소서.”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 선생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이곳에 머물러 저항한다면 뜻밖의 지엽적인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태자와 정선제는 부자가 한마음이니 이전의 계획이 언제까지 미뤄질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곳에 남아 큰일을 위해 치욕을 참으려 한다면 그는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태자와 정선제가 손을 쓰기 전에 도성을 벗어나 한동안 피해 있고 도성 쪽의 준비가 끝나면 바로 돌아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양왕은 매력적인 두 눈동자에 어둡고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더니 비웃음을 흘렸다.
“나 의정에게 계획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일러 두거라.”
“예.”
언동이 대답했다.
양왕은 담비 털로 만든 검은색 소매 없는 외투를 여미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엽연채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전하…….”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느냐?”
양왕이 몸을 살짝 옆으로 기울이자 검은색 외투의 옷깃에 얼굴이 반쯤 묻혀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미려한 두 눈만 보이게 됐다. 그 두 눈에는 세찬 기세가 담겨 있었다.
“앵기는… 좋은 아이예요. 전하께서 좀 잘 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엽연채가 살짝 애걸하는 말투로 말했건만, 양왕의 얼굴은 한층 더 싸늘하게 변할 뿐이었다.
“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니 넌 네가 할 일이나 잘하면 된다.”
양왕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문을 나서다 말고 다시 한번 차갑고 무정한 말을 내뱉었다.
“난… 단 한 번도 그 여인을 좋아한 적이 없다.”
엽연채는 깜짝 놀랐고 정신이 돌아와 보니 그의 검은색 화려한 외투의 한 부분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이내 문 입구에서 사라져 버렸다.
엽연채는 조앵기를 떠올렸다. 특히 천산에 가던 길에 봤던 조앵기의 의기소침한 모습이 떠오르자 무척 걱정이 되었다.
“마님. 늦었으니 어서 돌아가시죠.”
“그래.”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계루를 나온 엽연채는 문밖에 서더니 순간 멈칫,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눈송이 하나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어 두 송이, 세 송이가 내리자 무거웠던 엽연채의 마음에 올겨울 첫눈을 본 기쁨이 조금 섞여 들어갔다.
“봐, 눈이 내리네.”
“예.”
혜연도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나리도 이곳에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마님과 함께 눈 구경을 하실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엽연채는 또 주운환이 생각나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좀 있으면 길이 미끄러워져 걷기 힘들 게다. 어서 돌아가자꾸나.”
* * *
눈이 펄펄 흩날렸지만, 도성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번화한 모습이었다. 소상인들은 노점을 펴고 있었고 행인들은 걸어가다가 서기를 반복했다.
이런 날씨에는 찐 만두나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들이 가장 북적거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자 만두를 팔던 소상인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좀 전보다 더 힘차게 소리쳤다.
“만두들이 방금 막 솥에서 나왔습니다. 없는 게 없어요!”
이때, 갑자기 뒤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성들은 소스라치더니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피하기 시작했다. 보니 커다란 준마 세 마리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고, 날렵한 몸매를 가진 한 사내가 그 선두에 있었다.
그가 입은 담비 털로 만든 검은색 외투는 눈발 속에서 펄럭여 장엄하면서도 호쾌한 분위기를 풍겼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압도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준미한 모습에 놀라워했다.
양왕은 수하 두 명을 데리고 대로를 휙 스쳐 지나갔고 마침내 커다란 용이 정륭가에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의 양왕부가 눈에 들어왔다.
준마가 큰 소리로 울자 양왕은 말고삐를 확 잡아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말은 고삐가 당겨지자 앞발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다시 ‘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발을 내렸다.
“하.”
양왕이 비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보니 눈발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고 주위에는 새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 적막하고 황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손을 뻗자 조그만 눈송이가 그의 손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눈은 얼음처럼 차가워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금세 녹아서 물기만 남아 버렸다.
양왕은 주먹을 꽉 쥐더니 말고삐를 힘껏 흔들며 소리쳤다.
“이랴!”
그러자 준마는 큰 소리로 울더니 다시 앞을 향해 내달렸다.
문을 지키던 호위병은 진작에 양왕의 모습을 봤기에 황금과 동으로 만든 장식용 못이 가득 달린 붉은 대문을 활짝 열어 두었다. 양왕은 준마를 타고 그대로 안으로 돌진했다.
오늘 양왕부는 꽤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진 측비의 탄일이었기 때문이다.
측비의 탄일에는 여러 가문의 부인들을 초대해 조그맣게 축하연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 측비의 탄일은 십일월인 데다 선황후의 기일과 며칠 차이가 나지 않아서 본격적으로 축하할 수 없었다. 집안의 여식구들과 함께 모여 식사 한 끼 하는 게 다였다.
조앵기도 이 자리에 끌려와 있었다.
합의거合宜居는 진 측비의 처소로, 겨울인데도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었다.
정원의 낭가 아래, 진 측비는 사람들을 시켜 화로 두 개를 세워 놨고 사슴고기와 양고기를 거기서 구워 먹고 있었다.
조앵기는 화로 앞에 앉혀졌고 그녀의 눈앞에는 육 측비, 진 측비, 미 부인, 교 부인 등이 있었다. 다 해서 무려 스무 명이 넘는 부인들이 참석했는데, 조앵기가 커다란 눈을 굴려 보니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라 금세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