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화
진서후부에 도착하자 청유와 백수 등이 얼른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여종들은 그들이 피로를 풀고 씻을 수 있도록 물을 들고 왔다.
저녁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텅 비어 쓸쓸해 보이는 방 안을 쳐다보고 있으니 너무도 외로워져 혜연에게 외간外間에 있으라고 했다.
엽연채는 전에는 혜연, 추길과 함께 자는 걸 좋아했었다. 하지만 이 침상은 주운환이 잤던 곳이라 다른 여인이 이곳에서 자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혜연을 침상으로 부르지는 않고 대신 외간의 기다란 탑상에서 자라고 했다.
추길과 청유 등의 다른 여종들은 밖으로 나간 후 초수유랑을 따라 뒤에 있는 후조방으로 걸어갔다. 다들 즐거이 재깔거리는데 추길만은 우울한 표정을 지은 채 근심에 잠겨 있었다.
엽연채가 야경夜警을 설 사람으로 자신이 아닌 혜연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엽연채는 주운환과 한 이불을 덮은 후론 더는 여종들을 불러 외간에서 야경을 서게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추길 언니, 왜 그래요?”
매화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어제 등씨 아주머니가 설리고雪梨糕(흰 배인 설리雪梨를 주재료로 하여 익혔다 굳힌 간식)를 꽤 많이 만들었는데 마님은 좋아하지 않으셔서 언니 주려고 내가 남겨 놨어요.”
추길은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봤다.
“너 먹어. 난 입맛이 없다.”
두 사람이 반월공문半月拱門을 지나자 무려 작은 방이 열 개나 딸린 후조방이 눈에 들어왔다.
추길과 혜연 그리고 청유 등 네 명의 이등 하녀들은 한 사람이 방 하나를 썼고 나머지 네 칸은 어린 여종들이 함께 쓰도록 했다.
추길이 가장자리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가자 매화가 얼른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방은 크지는 않았지만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매화는 추길의 방 창문 아래에 놓인 의자에 앉더니 이렇게 말했다.
“언니가 말 안 해도 전 언니에게 고민거리가 있다는 걸 알아요.”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네가 뭘 알아?”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매화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언니와 혜연 언니 모두 마님을 곁에서 모시는 가장 능력 있는 여종이잖아요. 그런데 지금 마님께서 언니는 부르지 않고 혜연 언니를 부르셨고요.”
추길은 침상에 앉더니 그녀를 쏘아보며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부르시면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안 부르시는 거지. 공교롭게도 이번에 날 안 부르신 것뿐이야. 만약 날 부르시고 혜연이를 안 부르셨다면 사람들은 또 어째서 혜연이를 부르지 않았냐고 말할걸!”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 품고 있는 일이 있으니 문득 엽연채가 자신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 언니 말이 일리가 있네요. 전 그냥 언니를 위로하고 싶었어요.”
“위로할 게 뭐가 있어?”
추길은 비웃음을 지었다.
“어서 돌아가렴. 요 며칠 행궁에서 머무르는 동안 귀인과 상전들은 한가롭게 노셨지만 우리는 일을 해서 나도 너무 피곤하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하품을 했다.
매화는 입을 약간 오므리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전 그저 언니가 걱정되는 것뿐이에요. 어쨌든… 별장에서 다들 불려왔는데 노주만 부름을 받지 못해 그곳에 남았잖아요.”
그녀가 또 노주를 언급하자 추길의 마음도 다시 들썩였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신변 여종들 중에 추길과 노주의 외모가 가장 예뻤고 몸매도 제일 좋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청유 등 별장에 있던 네 명의 여종들 중 세 명만 불려 왔다. 심지어는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몇몇 어린 여종들과 마마조차도 모두 불려왔는데 노주만 그곳에 남겨진 것이다.
“알겠으니 가서 자!”
추길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매화의 입을 막았다. 매화는 하는 수 없이 방을 떠났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여종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히 움직였고 추길은 나가서 물을 떠 왔다. 그런 후에 엽연채의 머리카락을 빗어 영사계靈蛇髻 머리를 만들고, 장신구함 안을 들여다봤다.
안에는 새로 산 장신구들이 꽤 많았는데, 부부가 가끔씩 거리 구경을 나갈 때 주운환이 엽연채를 위해 금은방에 가서 맞춰 준 것이었다. 그중 상당수의 잠자와 보요들이 주운환이 직접 모양을 그려 금은방에 가져가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특히 동해산 진주로 상감하고 구름무늬 장식을 단 해당화 모양의 순금 보요는 겉보기에는 평범했지만 모두 엽연채와 주운환을 상징하는 장신구였다.
추길은 장신구함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 엽연채가 가져온 홍옥을 상감한 나비 모양 순금 머리꽂이를 꺼냈다.
엽연채는 거울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거 말고 저걸 꽂거라.”
엽연채가 가리킨 건 바로 그 동주를 상감한 해당화 모양의 순금 보요였다. 이 보요에는 가느다란 술이 늘어져 있는데 술 아래에는 상서로운 구름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마님께서는 전부터 홍옥을 좋아하셔서 홍옥을 상감한 나비 모양 머리꽂이를 고른 겁니다.”
추길은 희미하게 웃으며 이리 말했으나 엽연채는 손을 뻗어 그 보요를 집어 들더니 살며시 머리 위에 꽂았다.
“이게 더 예쁘다. 부군이 날 위해 만들어 준 거라 특히 마음에 들거든.”
그러자 추길은 표정이 굳어졌고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그녀는 저쪽에 있던 혜연이 흐릿한 꽃문양이 들어간 앞섶이 교차하는 진홍색 비단 유군을 꺼낸 걸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혜연이가 화려한 의복을 찾아냈네요.”
“그럼 장신구를 몇 개를 더 꽂아야 좋겠구나.”
혜연은 들고 있던 의복을 침상 위에 펼쳐 놓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개만 꽂아야 한다는 규정도 없으니까요.”
엽연채도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구리 거울을 통해 추길이 들고 있는 나비 모양 순금 머리꽂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도 꽂아야겠다.”
추길이 그 머리꽂이를 엽연채의 머리에 꽂아 주었지만, 엽연채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동주東珠가 한 개만 달린 채자釵子(머리 장신구의 일종)들을 잇달아 집어 들어 머리에 꽂았다. 그리하니 한층 산뜻하고 화려하며 귀티가 흘러 보였다.
혜연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름다우세요. 마님은 그동안 너무 간소하게 하고 다니셨어요. 이젠 귀부인이시니 장신구를 많이 꽂아야 격식을 갖춘 것처럼 보일 겁니다.”
엽연채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섰고 옷을 입으며 고개를 들어 추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추길아, 너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어제 너무 피곤했던 거니?”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너무 오랫동안 타서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허리가 쑤시고 등이 아팠어요.”
“그럼 더 쉬거라. 난 혜연이와 밖으로 나가 면포 상점들을 돌아볼 것이니 넌 집에서 푹 쉬렴. 자질구레한 일은 청유와 다른 여종들에게 맡기면 돼.”
엽연채는 화려하고 고운 색깔의 옷을 입었다. 그녀는 해초 문양이 들어간 대금對襟으로 되어 있는 담황색 비단 상의와 흐릿한 꽃문양이 들어간 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가느다란 허리와 아름다운 자태, 빼어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추길은 그 모습을 보며 질투심을 느꼈다. 전에는 엽연채가 경국지색의 미모를 가졌다고 생각해 큰 자부심을 느꼈고 이런 상전과 함께할 수 있어 늘 체면이 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보고 있으니 괜히 시샘이 났다.
“가자.”
엽연채가 혜연에게 말했고 두 사람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추길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어젯밤에 엽연채가 자신보고 야경을 서라고 하지 않았고 지금도 혜연만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고 하니 그녀는 가슴이 쿵쿵 뛰었고 몹시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그들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침 식사는 안 하셔도 돼요?”
“괜찮다. 밖에서 먹으면 돼. 여의재如意齋에서 파는 간식거리가 눈에 밟히는구나.”
엽연채는 미소와 함께 이리 대꾸했다.
두 사람은 이미 문밖으로 나가 계단을 내려갔고 추길은 계단 위에 서서 엽연채와 혜연이 정원을 지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공허함을 느꼈다.
* * *
엽연채와 혜연은 문을 나선 후 여의재에 가서 먼저 끼니부터 해결했다. 그런 다음, 면포 상점들을 둘러보았고 서점에 가서 화본도 찾아봤다. 둘은 쏘다니다가 도성 중심에 위치한 동대가東大街 쪽으로 오게 되었고,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 되자 무심결에 어계루로 들어가는 척했다.
어제 엽연채는 혜연에게 일이 있어 양왕을 만나야 한다고 미리 귀띔해 두었다. 그래서 어제 혜연은 슬그머니 외출을 했고 어계루로 가서 서신 한 장을 전달했다. 서신에는 오늘 정오에 양왕을 만났으면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엽연채가 어계루로 들어가 보니 사람들은 자리의 절반을 채우고 있었고 장사는 전과 마찬가지로 딱히 잘되는 것도 또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부인, 어디에 앉으시겠습니까? 예약은 하셨는지요?”
점원 한 명이 얼른 그들을 맞이했다.
“3층 끝에서 두 번째 방이네.”
엽연채의 무덤덤한 대꾸에 점원은 놀라더니 얼른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맙네.”
엽연채는 익숙하게 3층으로 향했고 긴 복도를 지나 마침내 끝에서 두 번째 방에 도착했다. 점원은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 줬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강태공이 그려진 커다란 병풍을 돌아 들어가 보니 양왕은 음침한 모습으로 탑상에 삐뚤게 앉아 있었고, 그의 옆에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전부 하얗게 센 노인이 서 있었다.
“전하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예를 올렸다.
“그래.”
양왕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고 날카로운 눈으로 옆에 있는 노인을 쓱 쳐다봤다.
“여기 주 선생은 내 참모이자 운환이의 학업과 과거 시험을 도운 스승이다.”
엽연채는 주 선생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갑자기 날 찾아왔는데 뭐라도 발견한 것이냐?”
“예.”
양왕의 물음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나… 태자 전하께서 선황후 마마의 기일에 전하께서 태자 전하를 독살하려 했다고 전하를 모함하실 겁니다.”
그 말에 양왕의 고혹적인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했다. 차분해 보였으나 그 속에서 거친 격랑이 일더니 그는 하하 냉소를 지었다.
주 선생은 차갑고 어두운 얼굴로 엽연채에게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쪽은 이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그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자 엽연채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렇게 둘러댔다.
“온천에서 열탕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황후 마마와 사 마마가 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엿들었습니다.”
양왕은 뒤에 있던 언서를 쓱 쳐다보더니 이렇게 명했다.
“조사해 보거라!”
언서는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옆에 있는 비밀 통로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