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8화
“저는 이만 말을 타러 가 보겠습니다.”
양왕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엽연채와 조앵기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조앵기를 확 끌어 올렸다. 조앵기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지만 결국 눈물을 글썽거리며 끌려가더니 마장 쪽으로 향했다.
시종들이 이미 양왕의 말을 끌어다 놨고, 양왕은 몸을 돌려 말 위에 오르더니 조앵기를 자신의 앞에 앉힌 다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선제는 마장의 양왕을 쳐다보며 미간을 잔뜩 째푸렸고 작은 목소리로 채결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에 쟁이가 짐의 말을 이해한 것 같으냐?”
정선제의 생각을 읽은 채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전하는 원래부터 성격이 까다롭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러운 분이십니다. 잘못됐음을 똑똑히 아신다 해도 기어이 들이받으실 겁니다.”
그러자 정선제의 눈빛이 복잡해졌고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알고 있다……. 아무리 선의를 베풀어도 그 아이는 받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정선제와 양왕의 목소리가 그렇게 작지 않아 엽연채는 그들의 대화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여인들이었다면 아마 그들의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엽연채는 완벽히 알아들었다.
보아하니 정선제는 자신이 얼마 못 살 것 같고 황위를 태자에게 넘겨주고 싶은 마음뿐이니 지금 양왕에게 순순히 포기하라고 타이르려는 것이었다.
좀 더 진솔하게 이야기하자면 바로 이런 소리였다.
‘난 곧 있으면 세상을 떠나니 내 자리는 네 형에게 줄 것이다. 다 널 위해서 네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넌 이 아비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며 허튼수작 부리지 말거라.’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마장 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들어 그곳을 쳐다보니 함께 말을 타고 마장을 돌고 있던 양왕과 조앵기 중 조앵기가 보이지 않았다.
뒤에 있던 사람이 크게 소리쳤다.
“전하, 전하. 왕비 마마께서 떨어지셨습니다!”
양왕의 잘생긴 얼굴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정말로 조앵기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양왕은 이 순간 창피한 마음뿐이었다.
‘이 어리석은 여인은 말에 앉아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단 말인가.’
양왕은 얼른 말고삐를 잡고 왔던 길을 돌아가더니 몸을 굽혀 조앵기를 확 잡아 올린 다음 자신의 앞에 앉히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엽연채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
멀리서 보니 마장 쪽은 여전히 시끌벅적했고 싸늘한 추풍이 불어왔다. 엽연채는 방금 전 정선제가 했던 말을 곱씹다가 뭔가 아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십일월 초닷샛날에 행궁에서 정 황후를 위한 연회를 연 뒤 이튿날인 십일월 초엿샛날 사람들은 모두 서둘러 마차를 타고 도성으로 돌아갔다.
정선제는 이번 출행에서 나 의정이 권한 약물 목욕을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나아지기는커녕 여정이 무리를 줬는지 돌아오는 길에서는 혼자 몸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엽연채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진씨, 주묘화와 같은 마차를 탔다.
주묘화는 재잘거리며 엽연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언니. 어제 왜 말을 타지 않았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올 때 좀 지쳐서 가만히 있고 싶었거든요. 아가씨는 말 타는 법을 배웠어요?”
진씨의 눈에 조롱기가 스쳤다.
‘어디서 귀하게 자란 척이야!’
하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조금은 익혔어요.”
주묘화는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벌써 돌아가야 한다니, 참 아쉬워요. 이번 출행은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제가 듣기론 전에 황제 폐하가 건강하실 땐 매년 가을에 사냥을 하러 오셨고 한번 오시면 보름은 있다가 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희는 사냥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 출행을 왔는데 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열흘쯤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요. 겨우 사흘만 있다가 돌아가네요.”
그러자 진씨가 마른기침을 하더니 이렇게 끼어들었다.
“황후 마마의 탄신일 때문에 온 것이니 빨리 가는 게 맞다. 십일월이기도 하고.”
“십일월인 게 왜요? 무슨 상관이 있나요?”
주묘화는 이해가 가지 않는단 목소리로 물었다.
“십일월 열사흗날이 선황후의 기일이니 그날 궁 안에서 법사法事를 행해야 한다. 황제 폐하는 원래부터 선황후에 대한 정이 깊으셨으니 규모가 작지 않겠지.”
엽연채는 진씨의 대답을 듣더니 순간 멍해졌다. 요 며칠 동안 계속 뭔가를 잊은 것 같아 찝찝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황후의 기일!’
맞다. 이날이었다. 전생에서 기일에 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전생에서 이맘때쯤 자신은 이미 별채로 보내진 상태였지만 추길과 혜연은 여전히 곁에 있었다.
십일월 중순쯤 별채 밖의 감나무에 감이 몇 개 열려 추길이 제게 따다 줬던 기억이 났다. 그러면서 추길은 자신이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게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며칠 전 선황후의 기일에 태자 전하께서 중독되셨다고 해요. 그 일로 엄청 시끄러웠다죠. 온 도성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해요. 결국 범인을 색출해 냈는데…….”
그때 밖에 있던 관리인이 추길을 불러내어 일을 시켰다.
당시 자신은 병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인지라 이런 흥미로운 사건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을 해 보니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이런 때에 누가 태자에게 독을 썼을까? 태자가 중독되면 누가 가장 큰 이익을 보는가? 장자인 노왕? 아니면 양왕?’
노왕은 병약하고 또 서자이니 장자라고 해도 결국 명분이 서지 않는다. 그러니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정비의 적자인 양왕일 것이다.
고로 화살은 양왕에게 향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종합해 보면 양왕과 주운환의 계획은 결코 태자를 독살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계획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었다. 태자를 독살해 버리면 정선제는 결코 양왕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그저 태자가 죽으면 양왕이 이익을 보게 된다고 여길 것이었다.
그렇다면 추측하건대 당시 추길의 뒷말은…….
‘범인은 양왕이었어요!’
이는 양왕을 모함하려는 흉계였을 것이다.
그러자 어제 정선제가 양왕에게 했던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말은 분명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포기하거라! 포기하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그리돼도 날 탓하지는 말거라!’
일단 부드럽게 설득해 보고 그 말을 듣지 않으면 강경한 수단을 사용하겠다는 엄포였다.
엽연채는 표정이 싹 굳어졌고 등을 꼿꼿이 피더니 얼른 창문의 발을 확 열어젖히고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혜연아! 혜연아!”
그런데 밖을 내다보니 주변에는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행렬과 양쪽으로 총을 들고 서 있는 금위군들뿐으로, 마차를 모는 사람들조차 모두 황실에서 보낸 마부들이었다.
“새언니, 뭐 하세요?”
주묘화는 놀라서 물었고 진씨는 이때다 하고 조롱하는 기색을 보였다.
“셋째야. 넌 이번 출행을 가문의 행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지금 후 부인이 되었다고 해도 네 위로는 여전히 황후 마마와 공주 마마 등의 귀인들이 계신다. 집에서 하는 것처럼 멋대로 행동하지 말거라.”
진씨는 엄숙한 모습으로 나무랐지만, 엽연채는 양왕 일로 마음이 조급해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진씨가 한 말에서 어떠한 트집도 찾아낼 수가 없었고 문제라고는 듣기 거슬리는 말투뿐이었다.
엽연채는 발을 내리고 몸을 돌려 자리에 앉더니 진씨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잠시 잊은 것뿐입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입을 닫고는 잔뜩 굳은 표정만 지었다.
진씨는 표정이 좋지 못한 엽연채를 보니 기분이 언짢았다.
‘뭐야? 엽씨 저게 내가 몇 마디 했다고 지금 화를 내는 거야?’
진씨는 엽연채가 시어머니의 체면을 깎은 것에 화가 났다. 하지만 지난번에 주묘서가 엽연채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오르려 하자 엽연채가 인정사정없이 주묘서에게 면박을 준 일이 떠올랐다.
더욱이 주운환은 현재 주묘서의 든든한 뒷배가 되었으니 엽연채에게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꾹 참고 찍소리도 하지 않았다.
주묘화가 두 사람을 쳐다보니 한 사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얼굴을 굳히고 있었고 또 한 사람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분위기에 주묘화도 짜증이 났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마차는 대부대를 따라 덜덜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살을 에는 듯한 추풍이 불자 교외의 풍경은 황금빛으로 변했고 숲은 붉게 물들었으며 바람이 쏴쏴 소리를 내며 불어오니 조금 씁쓸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바깥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엽연채는 출발할 때는 행궁으로 가는 내내 밖을 쳐다보느라 두 시진가량의 노정도 길지 않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해 당장이라도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연채는 그렇게 도성까지 가까스로 견디며 왔고 마차는 궁문으로 들어서더니 용무문에 멈춰 섰다. 엽연채는 황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렸고 주위를 둘러보며 양왕을 찾았다.
저 멀리 말을 탄 양왕이 조앵기가 탄 마차를 끌고 천천히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그를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신은 가뜩이나 조앵기와 친한 사이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양왕을 불러 그와 말을 섞게 되면 사람들의 구설에 오를 것이었다.
‘다행히 선황후의 기일까지 아직 며칠이 더 남아 있으니 당장 알려 주지 않아도 되겠지.’
“마님.”
이때, 혜연과 추길이 그녀 앞으로 걸어왔다.
“마님. 마차에서 빨리 내리시던데 많이 피곤하세요?”
추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래. 가슴이 답답해서 바람을 좀 쐬려고 그랬어. 가자. 우리 마차를 타고 집으로 가자꾸나.”
주묘화와 진씨도 이미 마차에서 내린 상태였다. 엽연채는 그들에게 다가가 작별 인사를 건넨 후 혜연, 추길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그들은 동화문으로 걸어가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