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27화 (527/858)

제527화

“예.”

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엽연채의 머리를 빗질해 주었다.

머리가 정돈되자 엽연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우리가 열탕으로 가려고 할 때 양왕비는 따라오지 않던데 처소에서 어쩌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제가 양왕 전하께서 채 공공에게 불려가시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가서 왕비 마마를 뵈려고 했는데 대문이 단단히 잠겨 있어 뵐 수가 없었습니다.”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죄수와 뭐가 달라?’

한편, 잠자리를 정리한 추길이 엽연채를 재촉했다.

“마님, 늦었으니 어서 주무세요.”

시각은 아직 해시亥時(밤 9시~11시)밖에 안 됐지만, 하루 종일 마차를 탔기 때문에 다들 지쳐 있었다. 그리고 여종들은 엽연채 같은 상전들과는 달리 열탕에 몸을 담글 수 없었고 방 청소까지 했기 때문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살짝 원망이 섞인 듯한 추길의 말투에 혜연은 인상을 썼으나 엽연채는 그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래. 늦었으니 다들 잠자리에 들거라.”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침상에 올라 잠이 들었다.

혜연과 추길은 외간外間으로 걸어갔다. 이 행궁은 원래 황제와 그를 수행하는 귀족들이 잠시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내기에는 공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간에 반 장丈 너비의 넓은 반죽斑竹 탑상이 놓였는데, 두 여종이 자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정 황후는 사람들을 마장馬場에 모이게 해 여인들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게 했다.

마장은 무려 십여 묘畝나 되는 크기로, 가장자리에는 사람들이 바람을 쐬며 휴식할 수 있는 정자와 낭가가 자리했다.

마장은 이미 시끌벅적했고 곳곳에는 준마나 작은 말들이 있었다. 말을 탈 줄 아는 행궁의 환관과 마마嬷嬷들이 규수들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마장 안은 순식간에 젊은 여인들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울긋불긋한 옷들이 바람에 펄럭여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을 연출했다.

오늘은 정선제도 마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널찍한 정자 안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뒤론 용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문양이 수놓인 커다란 황금색 일산日傘이 두 개 보였고, 궁녀 두 명이 일월선日月扇을 교차해서 들고 있었다.

엽연채와 신양 공주 등 몇몇 귀인들은 그 옆 정자에 앉아 마장에서 뛰노는 규수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여인들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가 가까이서 울려 퍼졌다. 월안 공주와 상관운 그리고 몇몇 규수들이 무리 지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관운은 미소 띤 얼굴로 엽연채에게 말을 붙였다.

“주 부인, 왜 여기 이렇게 가만 앉아 계셔요? 함께 마장으로 가서 말을 타요.”

월안 공주는 옆에서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말을 탈 줄 모르는가? 내가 탈 줄 아니 부인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게 좋겠군.”

그녀는 황후의 소생인 가장 존귀한 공주라 여태 자발적으로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정 황후가 그녀에게 엽연채와 친해지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 마마의 호의에 황송할 따름이옵니다. 다만 제가 몸이 좋지 않아 앉아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디 아픈 거예요?”

상관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웁…….”

엽연채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어제 마차를 너무 오래 타서 그런지, 속이 조금 메스껍습니다.”

“아.”

월안 공주는 엽연채가 자신의 호의를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부인은 이곳에서 푹 쉬게. 상관 언니, 우린 마장으로 가죠.”

상관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곳에 앉아 엽연채와 친분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월안 공주가 저를 콕 짚어 부르니 공주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 부인은 여기서 푹 쉬어요. 우린 먼저 가서 놀고 있을게요.”

그녀는 월안 공주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재잘거리며 자리를 떴다.

“마님, 몸이 불편하세요?”

추길이 두 눈을 반짝이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요즘 추길은 엽연채의 임신 문제를 걱정하며 임신에 관한 여러 가지 서적을 본 참이었다. 하여 임신하면 속이 메스껍고 밥도 잘 들어가지 않으며 구토를 하고 졸음이 쏟아지거나 입맛이 변하는 등의 반응을 보인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한 변화가 나타나는지 엽연채를 주시했지만, 계속 아주 정상적인 반응만 보였기에 마음이 자꾸만 초조해졌다. 그런데 지금 엽연채가 속이 메스껍다는 이야기를 하니 추길은 기대와 흥분이 확 몰려들었다.

하지만 지난번 엽연채가 추곤증을 겪을 때 혜연에게 마님이 임신한 것 아니냐며 이야기를 꺼냈다가 싫은 소리만 들었던 터라 추길은 말을 아꼈다. 게다가 자신도 애매한 입장에 서 있는 터라 더욱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님, 몸이 불편하시니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추길이 사근사근하게 권했다.

“황제 폐하께서 출행하실 때 어의를 몇 분 데려오셨으니 마님을 진찰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의원을 모셔와 상태를 보이시죠.”

“별일 아니다.”

엽연채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주운환이 출발하기 전에 짬이 나면 말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와서 함께 말을 타러 가는 날을 기다릴 요량이었다.

단박에 거절당해 기분이 상한 추길이 입술을 오므렸다. 엽연채가 정말로 임신을 한 건지 아닌지 알고 싶어 애가 탔지만 너무 간곡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좋지 않았다. 또 달리 생각해 보니 지금 주운환이 집에 없기 때문에 임신한 걸 알게 된다고 해도 뭐 어찌할 수도 없었다.

추길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마침 오늘 날씨도 덥지 않고 선선하네요. 이곳은 햇빛도 잘 드니 여기 앉아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근처에서 탄성이 울려 펴졌다. 엽연채가 그쪽을 쳐다보니 양왕과 조앵기의 모습이 보였다.

정자에 앉아 있던 규수들은 잇달아 두 눈을 반짝이며 양왕을 쳐다봤다. 양왕은 매혹적인 얼굴에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냉철한 면도 있어 규수들의 환심을 한 몸에 샀다. 반면, 조앵기는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때, 채결이 양왕에게 달려가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전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양왕은 날카로운 눈썹을 슬쩍 추켜세우더니 성큼성큼 걸어갔고, 조앵기도 얼른 그를 따라갔다. 양왕이 정자 안으로 들어가자 조앵기는 얼른 엽연채 곁으로 뛰어가 그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을 붙였다.

“연채야.”

엽연채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올 수 있었구나.”

“황후 마마 탄신일이니까.”

엽연채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분명 그랬다. 이 또한 공식적인 자리에 속했다.

양왕은 정선제 옆으로 자리를 안내받았다.

양왕은 힘없는 모습으로 커다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정선제를 쳐다보며 날렵한 눈썹을 치켜세웠다.

“아아, 짐도 저 젊은이들처럼 밖에서 말을 타고 내달리고 싶구나. 얼마나 즐거울까!”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

양왕은 냉소를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다시피 짐은 몸이 이 모양으로 망가졌구나.”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기침을 두 번 했다.

“보거라. 네 숙부들조차 다들 저렇게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지 않느냐?”

엽연채는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어 그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눈을 들어 쳐다보니 과연 육십 대로 보이는 노인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쿨럭, 쿨럭……. 짐은 너무 고생을 해서 지금 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정선제는 그리 말하며 쓴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은 항상 저들을 부러워했다. 일국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책을 떠맡을 필요 없이 고귀한 신분으로 한가롭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양왕은 그저 냉담한 눈으로 그 두 늙은이를 쳐다봤는데, 강렬한 빛을 내뿜는 두 눈동자에 조롱기가 스쳤다.

“황제가 되어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느냐…….”

정선제는 다시 심하게 기침을 했고 기침이 어찌나 심한지 폐와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저 한평생 고생만 하며 새장 같은 황궁 안에 갇혀 지냈다. 자유도 없고 건강도 잃었지. 꼭두각시처럼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정신없이 바쁘게 살며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리 말하는 정선제의 눈빛에는 고단함이 가득했다. 몇 십 년 동안 가장 높은 자리에 서서 겪어 온 그 고통과 분주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의 말투에는 끝없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서북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해결하면 또 서남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봄에는 하천이 범람하고 홍수와 역병도 일어나니……. 콜록, 콜록……! 그러면 기를 쓰고 대책을 생각해야 하지.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짐은 ‘간신히 지나갔구나!’ 여겼지만 이듬해에… 같은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짐은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발버둥을 쳤지만 이젠 그럴 기력마저 남지 않았구나.

이런 일은 매년 발생하니 도저히 근절할 수가 없다. 마치 다 떨어진 솥처럼 여기가 깨지면 저기에 구멍이 생기지. 방금 전에 이곳을 메웠는데 또 저쪽이 깨져 틈이 벌어지지. 정말 한도 끝도 없단다.

이 자리에 하루만 앉아 있어도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가 없지. 저기 네 숙부들을 보거라. 날마다 얼마나 자유롭고 한가하게 지내는지 모른다. 짐은 정말이지 저들이 너무도 부럽구나.”

양왕의 잘생긴 얼굴은 서릿발처럼 차가워졌고 붉은 입술을 올리며 조롱 섞인 냉소를 지었다.

“계속 이야기하시지요.”

“쟁아…….”

정선제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넌 짐과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 사람이 짐에게 남긴 최고의 선물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걸 보게 되면 짐은 제일 먼저 너를 떠올렸고, 공물을 바치면 매번 네가 먼저 고르게 했다. 짐은 가장 좋은 건 전부 네게 남겨 주고 싶단다.

너는 짐이 보상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거나 다른 생각을 할지 몰라도… 짐은 네가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 너는 어렸을 때 너무 큰 고통을 겪었으니… 캑, 콜록. 짐은 네가 앞으로도 고생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래야 네 어미를 볼 낯이 서지 않겠느냐.”

정선제는 말을 하며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 순간, 자신과 그녀의 아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말씀 다 끝나셨습니까?”

양왕이 담담한 미소만 지어 보이자 정선제는 슬픈 기색을 비치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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