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26화 (526/858)

제526화

마차는 두 시진 가까이 흐르고 나서야 마침내 천산의 행궁에 도착했다.

천산의 행궁은 황실이 소유한 것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엽연채가 발을 들어 밖을 내다보니 행궁은 산허리에 세워져 있었다. 큰길이 행궁에서부터 구불구불 아래로 이어져 있었으며, 군대와 마필은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행궁에 가까이 다가가자 다섯 개의 커다란 주홍색 궁문이 눈에 들어왔고 양쪽으로는 높고 두꺼운 성벽이 두 팔로 감싸 안듯이 행궁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면적이 아주 넓어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였다.

행렬이 가까워지자 거대한 궁문이 천천히 열렸고 마차들은 안으로 들어가 널찍한 정원에 멈춰 섰다. 그러자 나이 든 공공이 궁녀와 어린 환관들을 데리고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정 황후 등을 청전廳殿으로 모셔서 식사를 하도록 도왔다.

정선제는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온지라 다 죽어 가는 모습이었다. 그가 마차에서 내리자 채결 등 몇몇 환관들이 그 모습을 가렸고 그를 들것에 태운 채 정전으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를 할 때도 황후 혼자서 자리를 주관했고 황제는 피로하여 침전에서 휴식을 취한다고 알렸다.

여인들은 대부분 대체 어찌 된 일인지 알지 못하니 세세하게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함께 온 대신들은 그 말에 놀라더니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정선제의 병이 고황에 든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선제가 숨기려고 하니 모르는 척해 왔을 뿐이었다.

정 황후는 주석主席에 앉아 대신들과 귀부인들 그리고 규수들을 훑어보자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하지만 자리를 떨치지 못한 정선제를 의식한 것인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억지웃음을 짓는 척했다.

식사를 마친 후, 정 황후가 이렇게 권했다.

“이곳 천산 행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따뜻한 온천이네.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데 최고이니 가서 시험해 보세나.”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했다.

주묘화가 엽연채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여기 온천이… 원래부터 따뜻하다고 해요.”

“맞아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잡서雜書들을 좀 본 적이 있는데, 그 따뜻한 물은 지면 아래에서부터 분출되는 것이라 몸에 이롭다고 해요.”

주묘화는 그 말을 들으며 두 눈을 반짝였고 옆에 있는 진씨 또한 아주 기대하고 있었다.

“노왕.”

정 황후는 미소를 지으며 노왕을 쳐다봤다.

“신하들과 공자들을 데리고 동원東園 쪽으로 가 보게.”

“예.”

노왕은 얼른 대답했다.

“부인들과 소저들은 나와 함께 남원南園 쪽으로 가 보세.”

정 황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엽연채는 맞은편의 조앵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도 가자.”

조앵기는 쭈뼛거리면서도 기대감 섞인 얼굴로 양왕을 쳐다봤다. 그러나 양왕은 날카로운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불허했다.

“어서 돌아가서 잠이나 자거라!”

조앵기의 얼굴이 살짝 하얘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엽연채는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하지만 양왕은 이미 돌아서서 자리를 떴고 조앵기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함께 걸어갔다.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고개를 돌려 혜연에게 물었다.

“전보다 양왕을 더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니?”

“그런 것 같아요.”

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작은새언니. 우리도 어서 가요. 황후 마마 쪽도 모두 나가셨어요.”

주묘화가 뒤에서 재촉하자 엽연채는 고개를 까닥이고는 그녀와 함께 황후 일행을 따라갔다.

조앵기는 양왕을 따라 대전을 나온 뒤 서쪽 방향의, 두 사람에게 배정된 처소로 향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채결이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전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부르십니다.”

양왕은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가늘고 긴 눈으로 실눈을 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조앵기를 쓱 쳐다본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조앵기는 하는 수 없이 본채의 낭하에 앉았다. 지난번에 납치당했던 일이 떠오르자 감히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 그녀는 그곳에서 혼자 실뜨기를 했다.

양왕은 채결을 따라 은근한 냉기가 느껴지는 백옥석白玉石이 깔린 오솔길을 걸어갔다. 단풍잎은 와싹와싹하는 소리를 냈고 붉은 구름은 꿈틀거렸으며, 석양이 기울어지며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자 더없이 아름답고 화려한 정경이었다.

지나가면서 보니 온통 짙푸른 풍경이 펼쳐져 있고 높은 대臺 위에는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마침내 양왕은 한 화려한 전당 앞에 멈춰 섰다. 바로 행궁의 주전主殿이었다.

양왕은 채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후전後殿의 한쪽에 자리한 백옥을 쌓아 만든 목간통으로 걸어갔다. 이 목간통은 천산의 열탕들 중 가장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황제의 주전 안에 만들어져 있었다.

양왕이 담황색 망사 휘장이 겹겹이 드리워진 실내로 들어가자 짙은 약 냄새가 섞인 자욱한 습기가 확 풍겨 왔다.

양왕이 미간을 구긴 채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정선제는 열탕 안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런데 이 뜨거운 물은 일반적인 투명한 색이 아닌 진흙 색깔이었고 끈적끈적하기까지 했다. 과연 나 의정이 한쪽에 시립하고 있었다.

“아바마마.”

양왕이 걸어오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정선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양왕은 이맛살에 주름을 잡으며 다시 그를 불렀다.

“아바마마.”

정선제는 그제야 흐릿한 눈을 뜨고서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잠시 애를 쓰는 듯하더니 가까스로 입을 열고 생기 없는 쉰 목소리를 냈다.

“왔느냐?”

“예.”

양왕은 냉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선제는 쌀쌀맞은 그의 모습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짐은 오늘 황후의 탄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양왕은 순간 조롱기 섞인 눈빛을 번득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선제는 부연 시야에 양왕의 매력적이고 멋스러운 얼굴을 담았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또 소 황후가 떠올랐고 절로 죄책감이 들었다.

“짐의 마음속에는 오직 네 어머니뿐이다.”

양왕은 피식 냉소를 터뜨리며 되물었다.

“그래서요?”

정선제는 입술을 움찍댔지만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우리 부자가 오랫동안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짐의 몸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쿨럭, 쿨럭. 그저 쟁이 너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이다. 채결아, 크흠… 가서 의자를 가져오너라.”

“예.”

채결은 대답하고서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고 잠시 후 옻칠을 한 녹나무 의자를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 그는 의자를 목간통 옆에 내려놓은 후 앉으라는 자세를 취했다.

“전하, 앉으십시오.”

양왕의 매력적인 얼굴에 조롱 섞인 표정이 어리나 싶더니 그는 자리에 앉았다.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한번 들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물론 이 늙은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미 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양왕이 착석한 후, 정선제는 천천히 양왕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용은 일상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양왕의 어릴 적 이야기나 그들 부자간의 이야기가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대략 반 시진쯤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정선제는 약물 목욕을 거의 다 마치게 되었고 그제야 양왕을 돌려보냈다.

정선제는 떠나가는 양왕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저 아이가… 짐의 마음을 이해할까?”

채결은 미간에 잔주름을 잡으며 답했다.

“황제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양왕 전하는 성격이 까다롭고 전부터 행동이 별나서 소인은 전하의 생각을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사옵니다.”

“됐다. 네가 보기에 양왕이 짐의 병이 위중한 사실을 외부에 발설할 것 같으냐?”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채결은 이번에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정선제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양왕에게 정선제가 죽기를 바라는지 아닌지 물어보는 편이 나으리라.

하지만 양왕은 지금 황제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 분명했다.

양왕은 정말로 정선제가 죽기를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았다. 지금 정선제가 살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을 꼽으라 한다면 그 사람은 바로 양왕일 것이다.

정선제가 죽으면 지금 조정의 대국을 주무르고 있는 태자가 바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선제는 살아야만 했다. 열심히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양왕에게 천시, 지리, 인화가 모두 갖춰졌을 때 그때가 바로 이 늙은 황제가 죽는 날이 되어야 했다.

대전을 나온 양왕은 어두운 얼굴로 성큼성큼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문으로 들어가 보니 조앵기가 낭하에 앉아 혼자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양왕의 눈에 차가운 빛이 어리었다. 그는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고약한 웃음을 짓더니 저벅저벅 그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 소리에 깜짝 놀란 조앵기가 고개를 홱 들어 보니 음산한 얼굴을 한 양왕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녀린 그녀의 조그만 얼굴은 놀라서 허옇게 질렸고 그녀가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그녀의 옷깃을 잡고 위로 들어 올리더니 끌고 걸어갔다.

“윽…….”

조앵기는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그녀의 발버둥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갔고 ‘복福’ 자가 새겨진 최고급 대문은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엽연채 등도 이미 열탕에서 목욕을 마친 후였다.

다들 하루 종일 마차를 탔으니 어디 더 놀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그들은 목욕을 마친 후 각자 배정된 처소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진씨, 주묘화와 한 처소에 배정됐다. 엽연채는 진씨에게 본채에서 묵으라고 했고 자신은 곁채에서 묵었다.

지난번 주묘서 일로 진씨는 감히 소란을 피우지 못했고 또 주묘화도 함께하고 있어 그들은 모처럼 다툼 없이 평화로이 지냈다.

엽연채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보니 혜연이 이미 침상을 정리해 둔 후였다.

이번 출행에 엽연채는 혜연과 추길을 데려왔고, 두 여종은 엽연채가 열탕에 간 사이에 이곳에 남아 방을 청소했다.

엽연채가 화장대 앞에 앉자 혜연이 엽연채의 머리를 풀어 줬다. 엽연채는 구리 거울 안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혜연에게 물었다.

“참, 양왕 전하의 처소가 이곳에서 멀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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