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5화
엽연채는 얼른 다가가 그의 적염전갑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고, 주운환은 커다란 손바닥을 그녀의 조그만 머리 위에 올려놓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럽니까?”
“정말이지 멋있어서요!”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달려들어 그를 껴안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호심경에 머리를 부딪쳐 ‘윽’ 소리를 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운환은 얼른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 줬고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군장한 모습이 제일 멋있고 위엄 있어 보여요.”
그녀의 칭찬을 들은 주운환은 싱글벙글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야 합니다.”
“네.”
엽연채는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꽉 졸라맨 그의 허리띠에 향낭을 묶었다. 주운환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세심하게 향낭을 묶어 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그는 그녀를 안고 두 번 입맞춤을 했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말에 올라 천천히 멀어졌다.
* * *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자 엽연채는 두꺼운 겨울옷을 꺼냈다. 그렇게 집안 화로에 불을 지피고 두꺼운 옷을 입었음에도 엽연채는 여전히 옆구리가 시렸고, 방 안은 크다 못해 휑하게 느껴졌다.
동짓달 초하루에 엽연채는 초닷샛날이 황후의 탄신일이라는 내용의 궁첩을 받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전쟁 및 자연재해와 인재人災로 인해 황후는 탄신일을 성대하게 치르지 않았는데, 올해도 역시 소박하게 지내기 위해 행궁에 가서 가을 경치를 구경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황제와 황후는 부부 금슬이 좋으니 당연히 함께 가고 노왕, 양왕, 용왕도 동행하며 태자는 도성에 남아 국사를 돌보기로 했다. 이 외에도 사이가 좋은 명문가 사람들을 몇몇 골라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황후가 백성들을 생각한다며 잇달아 그녀를 칭찬했다. 그에 반해 귀족들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호부戶部 사람들은 두 눈을 부릅떴다.
‘제기랄. 가만히 궁에 있으면 얼마나 좋아. 한번 움직이면 비용이 배로 드는데 말이야. 출행하게 되면 정말로 출행만 하겠어? 말과 마차, 인력은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짐을 한가득 가져가야 하고 또 가는 길목에 이것저것 잔뜩 설치해야 하니 얼마나 큰일인데.
또 행궁에 도착하면 정말 경치만 감상하겠어? 먹는 건? 노는 건?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부르다니!’
물론 호부 사람들이 눈알을 부라리든 아니든, 감히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돈이 얼마가 들든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속사정이야 어찌 됐든 엽연채가 출행에 초대하는 첩자를 받자 여종들은 아주 기뻐하며 서로 보겠다고 난리였다.
“마님, 첩자를 받으셨네요.”
백수가 대단히 들뜬 투로 말을 이었다.
“들어 보니 마마께서 탄신일을 성대하게 치르지 않으셔서 초대받은 사람들도 제한되어 있다고 하던데, 마님께서도 그 안에 드셨군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니니.”
추길은 미소를 지으며 첩자를 확 낚아채더니 요리조리 뒤집어 봤다. 그녀는 봉황 문양의 금박을 붙인 첩자를 보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우리 나리가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데. 무관들 중에는 나리를 따라올 자가 없어. 아니, 무관뿐 아니라 문신들 중에서도 나리처럼 뛰어난 글재주를 가진 사람은 몇 없잖아.”
“그런데 들어 보니 황제 폐하께서 병이 나신 것 같던데 행궁으로 가실 수 있을까요?”
“가실 수 있는 걸 보니 그렇게 심한 수준은 아닌 모양이야!”
추길이 말했다.
엽연채는 탑상에 엎드려 주운환이 그녀에게 만들어 준 조그만 활을 손에 들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종들이 정선제의 병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더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정선제의 병환은 고황苦況에 들어 치료가 어렵건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약점을 사람들에게 내보이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돌보는 의원은 나 의정이었다. 나 의정은 훌륭한 학문을 정립했는데 바로 나씨 약욕藥浴이었다. 소갈증이 완치될 가망이 없는 환자들에게 이 약욕은 병세를 늦춰 주는 효과가 있었지만, 그 확률도 고작해야 2할에서 3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정선제는 자신이 약욕을 받으려 한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황후 등을 끌고 행궁에 가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탄신일을 축하하고 경치를 감상하러 가는 거라고 하지만 실은 병을 치료하러 가는 것이리라.
* * *
동짓달 초닷샛날이 황후의 탄신일이라 출행 인원은 초사흗날에 출발해야 했다. 초나흗날은 출행하기에 좋은 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사흗날 아침이 되자 수행하는 관리들과 부녀자들은 용무문龍武門에 집합했다. 그런데 엽연채는 특별히 봉의궁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곳은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정 황후, 태자비, 주묘서, 노왕비, 신양 공주, 이영 공주, 월안 공주 그리고 정 황후의 새언니인 정 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진서후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이쪽으로 와 앉게.”
정 황후는 싱글벙글 웃으며 엽연채를 반겼다.
그녀가 자기 옆자리의, 활짝 핀 꽃문양이 들어간 수돈을 가리키자 태자비와 함께 한쪽에 서 있던 주묘서는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신조차 앉지 못하고 있는데 황후는 어찌 엽연채 따위를 앉힌단 말인가.
엽연채가 자리를 잡자 정 황후는 일상적인 일들을 물어봤다. 날씨가 많이 추워지지 않았냐, 주운환에게 옷을 충분히 준비해 줬냐는 등 사소한 이야깃거리로 한담을 나누었다.
그렇게 진시辰時(아침 7시~9시)쯤 되자 사람들은 모두 연교를 타고 봉의궁을 나섰고 용무문에 도착하자 마차에 올랐다.
엽연채는 진씨, 주묘화와 함께 마차에 탔다. 그들은 가족이니 다른 마차에 탈 이유가 없었다.
진씨는 엽연채를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이 절로 지어졌지만, 감히 그녀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진씨가 주묘화를 꼬집자 주묘화는 얼른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했고 진씨는 옆에서 거짓웃음을 지었다.
무려 백여 대의 마차로 이루어진 위풍당당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위군이 길을 내며 궁문 밖으로 나가자 마차의 행렬이 구불구불 줄을 지어 갔다.
태자는 등고루登高樓에 서서 떠나가는 대열을 쳐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옅게만 보였으며 가슴속에 있던 커다란 돌이 순식간에 치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역시 정선제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선제는 지금껏 이 일을 자신들 모자에게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선제가 그만큼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태자는 점점 멀어져 가는 마차의 행렬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찌나 기쁜지 깡충깡충 뛰어오르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도 정선제의 병세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그는 자신을 오랫동안 아끼고 사랑해 준 아버지이니 말이다.
‘하지만 부황父皇이 이대로 붕어하게 된다면…….’
좋다. 태자는 조금 흥분이 됐다.
하지만 금세 고조된 마음을 억누르고는 자성自省의 시간을 가졌다.
황후는 늘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이미 넘치도록 많으니 한 걸음씩 차근차근 확실히 해 나가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래야만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는다고, 천천히 기다리면 된다고 말이다.
괜한 모험을 하거나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고 당부했다. 그 말대로였다.
마차의 행렬은 천천히 대명가大明街를 지나 성문 밖으로 나갔다.
금위군의 경비는 삼엄했다. 그들은 장총과 큰 칼을 들고 길 양쪽에서 길을 열었다. 백성들은 두려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렬을 보고 싶어 잇달아 양쪽 길가에 무릎을 꿇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마차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선두의 마차는 이미 성문 밖으로 나갔지만 맨 끝에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궁에서 마차에 오르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드높은 기세를 보이는 이 행렬은 마치 위풍당당한 용처럼 보였다.
이게 과연 궁 안에 있는 것보다 돈이 덜 든다는 말인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란 말인가?
백성들은 모두 멍해졌다.
한편,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정 황후는 자신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해 도성을 나오자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예년처럼 궁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즐거웠다.
교외는 하늘은 높고 공기는 맑으며 구름은 옅었다. 주위의 들풀은 누렇게 시들어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지만 창망滄茫(넓고 멀어서 아득하다)하고 쓸쓸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져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규방의 여인들은 외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 도성 안에서만 생활했다. 특히 요 일 년 동안은 비적들이 활개를 쳐서 여인뿐 아니라 사내들도 감히 도성 밖으로 나갈 엄두를 쉬이 내지 못했다. 귀부인과 규수들은 모두 마차의 커다란 발을 걷어 올리고 바깥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엽연채도 발을 걷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가 탄 마차와 함께 나란히 앞으로 나아갔다.
보니 누군가가 가냘파 보이는 조그만 머리를 마차 창문에 기댄 채 시들시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훌쩍, 훌쩍…….”
그쪽에서 눈물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와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앵기니?”
조앵기는 맥 빠진 모습으로 그녀를 쳐다보고는 이렇게만 대꾸했다.
“응…….”
“무슨 일 있어?”
엽연채는 의아했다. 조앵기는 밖에서 뛰놀기를 아주 좋아했다. 도성 밖으로 나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도성 안을 활보하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뻐했는데. 지금 도성 밖으로 나가서 며칠씩이나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도 조앵기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풍경이 정말 아름답네. 좀 더 가면 붉은 단풍나무가 가득해서 한층 예쁠 거야.”
엽연채가 그녀의 기분을 띄워 주려고 이리 말을 건넸으나 조앵기는 축 처진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리더니 조그만 입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그런 후에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엽연채가 보니 조앵기의 맑은 두 눈동자는 어둡게 변해 있어 아무런 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가엾기 짝이 없었다.
이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주색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말을 타고 엽연채와 조앵기의 마차 사이로 오더니 조앵기가 탄 마차의 발을 휙 내려 버렸다. 그러고는 따그닥따그닥 소리를 내며 말을 몰고 그곳을 떠났다.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서 조앵기의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앵기야? 앵기야?”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조앵기는 창문의 발을 올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