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24화 (524/858)

제524화

“알겠어요.”

엽연채는 앞으로 걸어가다가 몸을 돌려 추길 등에게 일렀다.

“너희 모두 밖에서 놀고 있으렴. 우리는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부부는 손을 잡고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고 이어 쾅 소리가 나더니 문이 굳게 잠겼다.

청유와 다른 여종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추길은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보고 있으니 마음이 우울해졌다.

부부는 이미 충분히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었다. 주운환은 조정에 나가 있는 시간이나 가끔씩 밖에 나가 사람들을 접대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내내 엽연채와 찰싹 붙어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이젠 사람들을 전부 내보내고 단둘이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부부 사이의 그런 일 말고 사람들을 들이지 않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아직 정오도 안 된 이른 아침이었다.

“가자. 우리 밖으로 나가 연 날리고 놀자.”

그때 혜연이 웃는 낯으로 추길과 청유 등에게 손짓을 하며 제일 먼저 밖으로 걸어갔다.

부부는 문을 닫은 후 서차간의 탑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주운환은 양왕 쪽의 상황을 세세하게 설명해 줬다. 자신이 비적들을 토벌하고 돌아와 경위영을 손에 넣고 도성을 장악하는 동안, 사람을 시켜 태자와 정선제의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가 다 갖추어지면 곧바로 거병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군이 돌아올 때면 이미 전반적인 틀은 거의 다 마련되어 있겠네요.”

“네. 그런데 여기에 비스듬히 앉아 있으려니 피곤하네요. 침상으로 가서 마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엽연채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톡 쏘았다.

“안 피곤해요!”

“여기서도 괜찮기는 합니다만.”

주운환은 태연한 미소와 함께 이렇게 대꾸했고, 엽연채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대낮에 뭐 하는 거예요? 여종들이 비웃을 거예요.”

“부부간의 일인데 비웃을 게 뭐가 있습니까?”

주운환은 작게 흥 소리를 내더니 엽연채를 확 끌어와 자신의 무릎에 앉혔고, 그녀를 끌어안은 채 귀를 자근자근 깨물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긴 내 집이니, 비웃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내쫓으면 됩니다.”

귀가 빨개진 엽연채는 피식 웃더니 주운환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한다니 섭섭해요. 빨리 돌아와야 돼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그녀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방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고 미시未時(오후 1시~3시)가 되어서야 밥상을 차리라고 명을 내렸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주운환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정에 나갔지만 정선제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채결은 정선제가 감기가 심해져 와병 중이니 태자에게 대신 정사를 돌보라 했다고 전했다.

주운환은 작별 인사를 건네러 곧장 정선제의 궁침으로 갔다. 그가 채결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방은 온통 누른빛이었고 천운금天雲錦으로 만든 용 문양이 들어간 황금색 발이 겹쳐진 상태로 걷혀 있었다.

정선제는 쇠약한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 문양이 들어간 황금색 휘장 속에 얼굴 전체를 묻고 있었다. 그가 인기척에 얼핏 고개를 들어 보니 맹렬한 기세를 내뿜는 소년이 한 걸음씩 제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선제는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쿵거리며 빠르게 뛰었는데, 낯익은 잘생긴 얼굴이 또렷이 보이자 다시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주운환은 커다란 침상 앞으로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왔구나…….”

정선제는 병약한 모습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예.”

주운환은 고개를 들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신, 떠나기 전에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러 왔사옵니다.”

정선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쿨럭! 짐이 저번에 네게 적염전갑을 하사하지 않았느냐? 그건 어디 있느냐?”

“집에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라 고이 모셔 두고 있사옵니다.”

“쿨럭쿨럭……! 입어 보거라. 먼지나 쌓이게 놔두라고 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분명 그 전갑이… 다시 전장을 누비며 전투에서 사용되기를 바랄 것이다.”

주운환은 어리둥절해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지금 사람을 시켜 전갑을 가져오게 하겠습니다.”

“소인이 가 보겠사옵니다.”

밖에 있던 채결이 그리 말하고는 빠르게 동화문으로 가더니 여양을 불러 집에서 전갑을 가져오라고 했다.

진서후부는 황궁과 가깝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여양이 전갑을 들고 궁으로 돌아왔다.

채결은 주운환을 한쪽에 딸린 방으로 데려갔고, 주운환은 거기서 검붉은색 조복을 벗고 적염전갑으로 갈아입었다.

차르랑차르랑하는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주운환이 다시 걸어왔다.

정선제가 흐릿한 눈을 굴려 바라보니 미끈한 몸매를 가진 한 사내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황색을 띤 붉은색 쇳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귀한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용 문양이 들어간 황금색 허리띠를 묶은 차림이었다.

또 앞뒤로는 강철로 만든 호심경護心鏡(전투복의 가슴과 등 부위에 끼워 넣은 호신용 구리 조각)을 달고 있으며, 어깨에는 단화포團花袍(둥근 모양으로 꽃 자수가 들어간 포) 한 벌이 덮여 있었다.

검은 장발을 머리 뒤쪽으로 높이 올려 묶은 그에게서는 씩씩하고 늠름하며 굳센 기개가 느껴졌다. 마치 양미간에 온 천하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오금이 저릴 만큼 맹렬한 기세를 뿜으며 한 발짝씩 다가왔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그 모습에 정선제는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소 황후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눈앞에 보이는 그의 모습과 천천히 겹쳐졌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화려하게 작열하는 불꽃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지금 그녀가 꼭 눈앞에 살아 돌아온 느낌이었다.

역시 이 적염전갑을 주운환에게 선물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그녀가 되살아난 것만 같지 않은가.

다만 눈앞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덩달아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른 후 그녀가 보내던 그 싸늘한 시선을 느꼈을 때처럼 심중이 답답하고 언짢았다.

이때, 차르랑차르랑 쇳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주운환이 정선제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소신, 옷을 전부 갖춰 입었사옵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정선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몸을 낮추고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주운환을 보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좋구나. 앞으로… 적을 베러 전장에 나갈 때 이걸 입도록 하거라.”

“예.”

정선제의 미소에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늦었으니 이만 가 보거라.”

정선제는 보내기 아쉽다는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목이 너무 불편해서 기침을 하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꾹 참고 있었다. 주운환에게 쇠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운환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그의 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정선제의 고통스러운 기침소리가 궁침에 울려 퍼졌다.

“콜록콜록, 캑캑!”

“폐하. 이런……!”

채결은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정선제는 몸을 구부릴 정도로 심하게 기침을 했다. 채결은 누워 있기조차 힘들어하는 그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고 부드러운 베개를 그의 등 뒤에 받쳐 주었다.

시립해 있던 어린 환관이 황급히 금동金銅 타구唾具(가래나 침을 뱉는 그릇)를 가져오자 정선제는 거기에 대고 기침을 했다. 금세 새빨간 피가 타구 곳곳에 묻었고, 채결은 깜짝 놀라 어린 환관에게 당장 나 의정醫正을 불러오라고 했다.

나 의정은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센 칠순 노인으로, 황실에서 50년 넘게 근무할 만큼 의술이 아주 뛰어났다. 대제에서 의술로는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또한 정선제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다.

나 의정이 맥을 짚자 채결이 다급히 물었다.

“어떻습니까?”

나 의정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의 소갈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네……. 또한 오래전에 반월화半月花에 중독된 적이 있으시니……. 하지만 황제 폐하는 크나큰 복을 누리실 거고, 훌륭한 분이시니 하늘이 도우실 거네.”

정선제는 그의 온갖 덕담에도 그저 고통스럽게 연신 기침했다.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온천물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소신이 배합한 약제를 넣은 목욕물에 몸을 담그시옵소서.”

정선제는 눈을 꽉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을 가로젓자 나 의정은 몸을 굽히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정선제가 이렇듯 침묵을 유지해도 채결은 그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채결은 당연히 그의 병세가 전과는 다르며 상태가 몹시 위중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정선제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기운이 계속해서 빠져나가면 아무리 기를 써도 다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이 큰 고비였다. 어쩌면 여기가 한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정선제는 황제이니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단 하루라도 더 살고자 몸부림 칠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쇠약한 모습을 신하 앞에 드러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상태가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더 그럴 것이다.

채결은 머리를 굴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참, 폐하. 며칠 뒤면 황후 마마의 탄신일이옵니다. 근 몇 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자연재해와 비적들 때문에 황후 마마께서는 탄신일을 성대하게 치르지 않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 한 끼 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황후 마마는 일국의 국모이십니다. 어찌 그리 초라하게 치를 수 있겠사옵니까.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황자 전하들을 부르셔서 함께 천산泉山의 행궁行宮에서 가을 경치를 즐기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천산의 온천은 도성 일대에서 가장 좋은 온천이었다. 즉, 채결의 제안은 황후를 데리고 가을 산수를 감상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가 약물 목욕을 하라는 뜻이었다.

정선제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자꾸나.”

채결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한편, 궁에서 나온 주운환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수화문 밖 대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구름 문양이 들어간 황록색 윗옷 차림의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추길, 혜연 등의 여종들과 향낭을 만들고 있었다.

차르랑거리는 쇳소리를 들은 엽엽채는 얼른 고개를 들었고 주운환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그는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적염전갑을 입고, 긴 머리를 머리 뒤로 높이 올려 묶은 상태였다. 날카로운 눈썹에서는 영웅의 기개가 느껴졌고 예리한 칼이 칼집에서 나온 것처럼 거침없는 기세를 풍겼다.

물론 그의 눈빛은 엽연채에게 닿자마자 금세 부드러워졌다.

추길도 위풍당당한 주운환의 모습에 두 눈을 반짝였고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군장軍裝을 한 주운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청유 등도 마음이 아주 설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