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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23화 (523/858)

제523화

그 시각 봉의궁.

정 황후는 상서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용과 봉황 문양이 들어간 기다란 탑상에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은 어린 궁녀가 그녀 옆에 서서 바깥의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정 황후는 이야기를 들으며 관자놀이를 문지르더니 손사래를 쳤다. 이에 그 궁녀는 몸을 낮추고 밖으로 물러났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사 마마가 걱정스러워하며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괜찮네…….”

그러나 말과 달리 정 황후의 동그스름한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나 싶더니 결국 그녀는 화를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소리쳤다.

“그 주묘서 말이다! 정말 사람 괴롭히는 걸 밥 먹듯이 하는 물건이구나. 내 지금껏 이렇게 뻔뻔한 인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내쉬더니 한쪽에 놓인 탁자를 손으로 두드렸다.

“어찌 됐든 간에 이미 진서후 쪽과는 화해를 했다고 하옵니다. 이번 일을 겪었으니 더는 공연히 소란을 피우지는 못할 것입니다.”

사 마마가 이렇게 달랬으나 정 황후는 당장이라도 주묘서를 잡아와 따끔하게 혼쭐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일은 주묘서의 규율 문제로 이야기되고 있으니 황궁 내명부 일에 속하는 것이었고, 즉 황후인 자신이 관리했어야 하는 일이 된 셈이었다.

그러니 만약 지금 주묘서를 불러와 벌을 내리게 된다면 이는 본인의 체면을 스스로 깎는 것과 다름없었다.

* * *

그날 밤 태자는 주묘서의 방에서 잤다.

이 일을 알게 된 태자비는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풍 측비와 오랫동안 다퉜기 때문에 주운환이 무너지지 않고 주묘서가 언행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금세 다시 총애를 받게 될 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튿날 이른 아침, 태자는 일정대로 조정에 나갔다.

금화전金華殿 안, 관리들은 이미 도착해 있었고 태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예를 올렸다.

주운환도 태자를 보더니 잘생긴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앞으로 나가 공수하며 사죄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그저께 꽃놀이 연회에서 벌어진 일은… 정말 면목 없습니다.”

태자는 하하 웃더니 주운환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진서후, 무슨 그런 말을 하는가? 여인들은 다 그렇네.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늘 소란을 피우지.”

며칠 전 자신이 어째서 주운환을 쫓아가지 않았는가? 바로 자신이 태자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묘서는 태자 측비이기 전에 우선 주씨 가문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오라버니인 주운환이 당연히 태자인 제게 먼저 머리를 숙여야 했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주위에 있던 조정 신하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들 모두 태자와 주운환의 관계가 다시 회복됐음을 알아차렸다.

그 일은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주묘서가 어리석어서 그랬다 하더라도 이젠 분명히 알게 됐을 것이다. 남매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면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이치를 말이다.

다만 한쪽에 있던 요양성은 저도 모르게 눈빛이 어두워졌다.

조정 신하들은 황제가 나타나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진시辰時(오전 7시~9시)의 절반이 지나가는데도 정선제가 여전히 나타나지 않자 다들 자연스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어찌 된 걸까요?”

장찬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사람을 시켜 보고 오라고…….”

“황제 폐하 납시오!”

태자가 사람을 정선제의 궁침宮寢으로 보내려는데 마침 그의 도착을 알리는 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정 신하들은 얼른 몸을 곧추세우고 두 줄로 나란히 섰다.

잠시 후,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정선제가 자리에 앉았다.

하좌의 조정 신하들이 만세삼창을 하자 그만하라는 채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들어 보니 정선제는 착 가라앉은 어두운 얼굴로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낯빛이 창백했고 두 눈은 힘없이 축 처져 있어 활기가 전연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정 신하들은 그 모습에 하나같이 놀랐고 유 재상은 얼른 공수하고 말했다.

“폐하, 요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옥체가 편치 않으시옵니까?”

조정 신하들은 다들 걱정스러워하며 정선제를 쳐다봤다. 그가 지병을 앓아 온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선제는 손사래를 치며 별일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으나 몸 상태가 워낙 좋지 못해 손을 들 기력조차 없었다. 옆에 있던 채결이 얼른 눈치껏 나섰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환절기라 고뿔에 걸리셨을 뿐이니 조금 쉬시면 금세 괜찮으실 겁니다.”

“소신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부디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조정 신하들이 서둘러 이런저런 안부의 말을 건넸지만, 정선제는 그저 냉담하게 손을 가로저을 뿐이었다.

“짐은 괜찮다.”

그런데 이때, 어린 환관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경위영 유헌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상석의 정선제는 희끗희끗한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더니 냉담한 목소리로 허했다.

“들이거라.”

잠시 후, 사십 대로 보이는 무관 복장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소신 유헌,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하좌의 조정 신하들은 유헌을 보더니 일부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고 또 일부는 눈을 끔벅였다. 다들 유헌과 오일의가 함께 비적을 쫓으러 간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유헌만 홀로 돌아왔으니, 분명 일이 생겼음을 어느 정도 눈치챈 것이다.

“오일의는?”

정선제의 나이 든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폐하…….”

유헌은 고개를 더 푹 떨구었다.

“소신 등이 폐하의 명에 따라 비적들을 추격했고 합주에 도착했는데… 교산喬山에 매복해 있던 비적들에게 오 장군이… 여러 발의 화살을 맞았고 또 오른쪽 다리도 잘려… 지금 위독한 상태입니다. 이미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이며 아마 모레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조정 신하들은 소스라치며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오일의가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불구가 된 것이었다.

옆에 있던 양왕은 긴 속눈썹을 살짝 아래로 드리우며 차가운 눈빛을 감추었다.

정선제는 처진 얼굴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성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오일의가 보인 무능함에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경위영 것들은 하나같이 쓸모없는 식충이들이라 오합지졸조차 상대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진작에 이 무능한 놈들에게 희망을 접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정선제의 시선이 주운환에게 향했다. 이제 능력 있는 사람이라곤 주운환밖에 없었다.

정선제가 주운환을 쓱 훑어봤다. 그동안 주운환을 도성에 놔두면서 전근 명령도 임무도 일절 주지 않은 건 오일의 이 머저리가 만에 하나라도 패하게 되면 주운환을 보내 그 비적들을 일망타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경위영과 금위군은 모두 자신의 군사이니 쉽게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딴마음이 조금도 없고 죽어라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사람이어야만 받을 수 있으니, 태자조차도 넘겨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 주운환은 지금 태자 측으로 넘어간 후였다. 평판 또한 아주 훌륭하며 서남쪽은 그의 세력이 되었으니, 주운환에게 경위영을 맡기면서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간 관찰한 결과, 주운환은 정말로 자신을 향한 충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특히 요 이틀간 태자와 주운환은 사소한 일로 갈등이 생겼는데, 주운환은 문제를 무마하기는커녕 아예 주묘서와의 관계를 끊어 버리려 했다.

정선제는 조금 위안이 됐다. 설령 주운환이 태자 쪽에 섰더라도 이는 자신이 정해 준 혼사 때문일 뿐, 사실 그는 자신에게 더욱 충성하고 있는 신하였다.

“콜록, 콜록……!”

정선제는 힘없게 기침을 두 번 하더니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진서후.”

“소신, 여기 있사옵니다!”

주운환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진서후는 3만 명의 병사를 소집하여 합주로 가서 비적들을 섬멸하거라.”

정선제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려 펴졌다.

“소신, 명 받잡겠사옵니다.”

“내일 출발하거라!”

정선제의 명이 떨어지자 태자는 더욱 열렬한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봤고 조정 신하들 중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오로지 요양성만이 표정이 어두웠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태자비에겐 적자도 없으니 향후 태자가 제위에 오르게 되면 황후의 자리가 꼭 태자비의 것이리라고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설령 태자비가 황후가 된다더라도 주묘서가 아들을 낳으면 황태자는 틀림없이 그 아들일 것이다.

또 요즘 들어 태자는 자신을 포함한 노신들을 점점 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때, 상석의 정선제가 손을 가로젓자 옆에 있던 채결이 목청을 높였다.

“퇴청하시오!”

다른 정사에 관해서는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던 정선제가 갑자기 몸을 휘청이더니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태자와 조정 신하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폐하!”

다행히 채결과 어린 환관 몇 명이 넘어지는 정선제를 제때 받았으나 조정 신하들은 아연실색했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정선제는 채결 등 몇몇 환관들에 의지해 겨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손을 가로젓고는 채결 등에게 저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가자고 명했다.

정선제가 걱정이 된 대신들은 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궁침으로 달려갔다. 하나 정선제는 유 재상과 상관수, 주운환을 제외한 다른 대신들은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태자가 궁침에 들어 문안을 드렸다.

* * *

진서후부로 돌아온 주운환은 어제 샀던 활시위를 들더니 엽연채의 작은 활에 걸어 준 다음 활 위에 꽃문양을 새겨 넣었다.

혜연과 추길을 데리고 밖에서 돌아온 엽연채는 정원의 낭가 아래에 앉아 꽃문양을 새겨 넣고 있는 주운환을 보더니 얼른 그에게 달려갔다.

“오늘은 무척 빨리 돌아왔네요.”

“나는 내일 합주로 떠납니다. 그러니 집에서 얌전히 있어야 합니다.”

주운환은 출정을 알려 주며 들고 있던 작은 활을 내려놓았고, 엽연채는 그의 말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조심해야 돼요.”

“옥안관의 천군만마도 다 무찌른 내가 그 보잘것없는 비적들이 무섭겠습니까?”

주운환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이 일이… 평정되고 나면 우리 일도 마무리될 겁니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온몸을 떨었다. 그가 양왕의 일을 말하는 줄 알아챈 것이다.

“정말요?”

“네.”

주운환은 그리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긴 추우니까 방으로 가서 이야기합시다.”

어떤 일들은 그녀가 반드시 정확히 알아야 했으며 그녀도 참여하게 해야 했다. 보호한답시고 뺐다간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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