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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22화 (522/858)

제522화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

청유 등도 혜연의 말을 듣더니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더는 가타부타 떠들지 않았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렸고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눈동자엔 조롱기가 스쳤다.

주묘서의 혼사는 황제가 정해 준 것이니 이런 사소한 일로 그녀를 폐위할 수 없었다. 황제의 체면이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주묘서의 혼사는 원래부터 태자를 위해 주운환을 끌어들이려고 치른 것이니, 더더욱 그녀를 폐위할 수는 없었다. 주묘서를 폐위하고 다시 주묘화를 측비로 들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간 황실의 체통은 어찌 되겠는가.

신하가 말 한마디 던졌다고 황실이 굽신거리며 신하가 싫어하는 자를 폐위하고 다시 그 신하의 또 다른 누이동생을 측비로 들이려고 하겠는가. 신하를 포섭하려는 의도가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니 황실도 체면이 깎일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은 유야무야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주운환은 양왕을 도와 반역을 꾀하려 하고 있으니 태자부로 시집간 주묘서가 주운환과 ‘우애롭게’ 지내야 황제와 태자가 그를 신임할 것이다.

더구나 주묘서는 아주 흥미로운 사람 아닌가. 태자와 황제의 견고한 관계를 무너뜨리는 건 그녀에게 맡기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니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나왔다.

청유의 말대로였다. 주묘서가 어디 기꺼이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려 하겠는가.

측비가 된 것도 이젠 달갑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분명 자신들을 이용해 지고지상한 황후가 된 다음 복수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하, 누가 누굴 이용하고 있는지 아직도 모른단 말인지.’

“나리!”

그때 갑자기 뒤에서 추길의 기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검붉은색 조복을 입은 주운환이 걸어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바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반겼다.

“오늘은 빨리 퇴청했네요?”

“요 며칠 날씨가 점점 더 추워져 황제 폐하께서 지병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일찍 퇴청했지요.”

주운환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더니 그녀의 허리를 살포시 끌어안고 말했다.

“문으로 들어설 때 경인이 주묘서와 어머니가 오셨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엽연채는 방금 전 주묘서와 진씨가 와서 했던 모든 행동을 그에게 이야기해 줬다.

“생각해 보니 어쨌든 부군의 어머니이고 누이동생이니 한 번 용서해 주기로 했어요.”

주운환은 수묵으로 그린 것 같은 두 눈동자를 거볍게 깜빡였다. 그는 부부의 마음이 통한 게 기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습니다. 갑시다. 식사부터 한 뒤에 같이 밖으로 나가 활시위를 둘러보는 게 좋겠군요. 활시위를 구하면 내일 안으로 작은 활을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팔을 끌어안고는 아리따운 얼굴을 들어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방으로 향해 식사를 마친 뒤 함께 거리로 나갔다. 두 사람은 활만 전문적으로 파는 상점에 가서 활시위를 구입한 뒤 문밖으로 나섰는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백성들이 술렁거리다가 양쪽으로 비켜섰다.

엽연채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곳을 쳐다봤다. 한 무리의 군인들이 산발한 채로 말을 타고 황급히 대명가大明街를 지나갔다.

엽연채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은…….”

“경위영京衛營(도성을 수호하는 병영) 군사들입니다.”

주운환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

“이변이 없다면, 저들은 떠돌이 비적들을 추격하기 위해 오일의가 데리고 나간 군인들일 겁니다.”

요 몇 년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우선 서북에서 3년 동안 전쟁을 치렀고 서남에서는 1년 가까이 전쟁을 치렀다. 그러는 동안 백성들을 혹사했고 물자를 낭비했으며, 전쟁 때문에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비적 떼를 조직해 곳곳에서 사람들을 해치고 다녔다.

변방의 전쟁은 종식됐지만, 떠돌이 비적들은 어렵게 세력을 모으고 나니 역심이 들었고 이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봄 가뭄이 들고 누리 충해가 일어났으며, 하반기에는 남쪽 지역에서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 수만 명의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이 떠돌이 비적들은 이재민들을 흡수해 점점 더 세력을 확장했고 ‘평등’을 외치며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정선제는 경위영 대장군 오일의를 보내 비적들을 토벌하게 했지만, 그는 비적들을 일 년이나 쫓아다녔는데도 아직도 그들을 섬멸하지 못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들어 주운환을 쳐다보며 물었다.

“갈 거예요?”

주운환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고 싶습니다.”

당연히 가고 싶었다. 누가 가고 싶지 않겠는가? 이건 경위영이었다. 경위영을 손에 넣게 되면 도성의 군대를 거의 다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자신은 서남에서 불세지공을 세워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있고, 지금 서남을 지키고 있는 부장副將도 자신이 직접 발탁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경위영을 장악하게 된다면 분기奮起하여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럼 바로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다음 양왕을 추대할 수 있었다.

서남쪽은 자신의 심복이 관할하니 당연히 군대를 일으켜 황실을 구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만약 서북의 강왕이 황실을 구하려 나서면 서남쪽은 군대를 이끌고 강왕을 제지할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본인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에게만 경위영과 금위군을 넘길 것이다.

게다가 경위영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황제에게 문제 되는 부분이 없으면 단시간 안에 거병하긴 어려웠다. 황제와 태자가 백성들로부터 외면당할 만큼 그들이 무슨 대역무도한 일이라도 저질러야 정벌에 정당한 사유가 생기게 될 터였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죠.”

주운환은 그리 말하며 엽연채를 데리고 상점을 떠났다.

* * *

주묘서는 진서후부를 나온 후 집으로 가는 내내 어머니와 상의를 했다. 그런 뒤 사람을 시켜 진씨를 주씨 가문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곧장 태자부로 돌아갔다.

주묘서는 묘언헌으로 향해 태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았다. 태자가 서재에 있다고 하자 그녀는 얼른 삼을 곤 탕과 간식거리를 준비하라고 한 다음 태자의 서재 밖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그 시각, 태자는 송초와 함께 근래의 조정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송초가 말했다.

“밀보祕報에 따르면 오 장군은 이미 비적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합주合州에서 2만 명의 경위영 군인들이 투구와 갑옷을 벗어 던지고 줄행랑을 쳤고, 오 장군도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태자는 커다란 녹나무 탁자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다가 냉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그자로서는 불가능한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비적 떼를 무려 일 년이나 쫓아다니고도 섬멸하지 못했지. 아바마마께서는 앞으로 어찌하실 것 같으냐?”

“달리 방도가 있으시겠습니까?”

송초는 그리 말하며 태자와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주운환을 쓰실 겁니다. 개선凱旋한 뒤 다시 응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성에 머물러 뭘 하겠습니까? 전근 명령조차 내리지 않고 계시는데 정말로 그자가 집에서 새해를 맞게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몇 년 동안 잘도 내빼는 이 비적들을 조정에선 억누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세는 오히려 확장되고 있었다. 정선제도 처음엔 이들을 얕봤지만 이젠 진지한 태도로 토벌에 임하고 있었다.

오일의가 실패했으니 다른 사람을 보낼 수밖에 없는데 현재 주운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아바마마는 참으로 그자를 높이 평가하시는구나.”

“그건 당연한 일이옵니다. 대외적으로는 나라를 안정시키고 굳건하게 만들었으며 대내적으로는 치국평천하를 이뤄 냈습니다. 이제 전하의 사람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그자를 중용하셔야 하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 주 측비가 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태자는 두 눈을 슬쩍 깜박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으니 넌 일단 이곳에 서 있거라.”

“예.”

이계는 대답하고 한쪽에 시립했다.

태자는 송초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눴고 바둑도 한 판 두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서재 입구로 나가 보니 과연 백옥이 깔린 길에 주묘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묘서는 태자를 보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전하. 제가 잘못했어요……. 흑… 오늘 셋째 오라버니 집에 가서 사과를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규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그런 것이옵니다.”

태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로 네가 잘못했음을 알았느냐?”

“예!”

주묘서는 태자의 말투가 부드러워지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그의 포복을 붙들었다.

“전하… 신첩은 그때 황실로 시집을 오면… 황실을 대표하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새언니가 예를 올리지 않으면 집안에 화를 불러올까 봐 너무 걱정이 되어 예를 올리라고 한 겁니다……. 제가 규율을 잘못 알았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흑흑… 그래도 저는 셋째 오라버니의 집에 가서 해명을 했고, 오라버니와 새언니에게 용서를 받았습니다.”

태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옅은 한숨을 쉬더니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서야… 그래, 널 용서하마. 너도 알겠지만 어제 네 뺨을 때렸을 때 내 마음도 아팠다. 하나 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데 내가 널 혼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날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전하…….”

주묘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그의 품으로 냅다 달려들어 얼굴을 묻었다.

“전하, 소첩이 앞으로는 규율을 제대로 익히겠습니다. 다시는 전하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흐윽…….”

“그래, 그래. 어서 돌아가자꾸나!”

태자는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예.”

주묘서는 눈물을 거두고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와 주묘서는 함께 묘언헌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마치 며칠 전의 달콤했던 분위기로 다시 돌아간 듯했다.

하지만 주묘서는 이제 주운환이 있기 때문에 자신도 총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았다. 주운환이 자신의 배후이자 실세였다.

현실을 직시하게 된 주묘서의 마음속엔 깊은 증오심만 남았다. 자신이 황후가 되면 그 역겨운 두 인간을 반드시 날려 버릴 것이다.

주묘서는 태자와 화해를 하고 나니 다시 의욕이 생겼다. 그녀는 얼른 시녀들에게 밖으로 나가 무뢰배를 매수해 공연장과 요릿집에서 소문을 퍼뜨리라고 했다.

어제 일은 전부 오해였고 자신이 너무 급하게 시집을 가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이다. 짧은 시간 내 자수도 놓아야 하며 궁중 예법도 익혀야 했기에 규율의 일부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런 우스운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이 믿든 말든 간에 어쨌든 자신은 정말로 엽연채 부부와 앙금을 해소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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