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셋째야. 네 시누이가 어제는 순간 판단이 흐려진 게다. 그래서 지금 네게 사과하고 있잖니.”
진씨는 새파란 얼굴로 한 발짝 앞으로 나오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주 백야를 쳐다보며 채근했다.
“나리, 그냥 그렇게 서 계시기만 할 겁니까?”
주 백야는 얼굴을 찡그리더니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운을 뗐다.
“셋째야… 어쨌든 한 가족이다. 형제자매 간에는 본래 마찰도 생기기 마련 아니냐. 그렇다 해도 남매다……. 묘서도 잘못한 것을 뉘우치지 않았니. 그러니 용서해 주거라.
게다가 운환이는 이제 조정 관리이고, 태자 전하는… 어쨌든 태자 전하이시지. 묘서가 전하께 시집을 갔으니 운환이에게도 도움이 될 거다! 아니면 운환이는 조정에서 홀로 지내야 하는데 그럼 괴롭힘을 당하기 십상일 게다.”
진씨가 엽연채를 가만 살피니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 백야의 말에 흔들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진씨가 쾌재를 부르기도 전에 엽연채의 입에서는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전 아가씨가 저희에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저희를 업신여기지만 않아도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을 거예요, 새언니… 흑흑……!”
주묘서는 아예 통곡을 했다.
“전 어제, 그때 뭘 어떻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어요. 단지… 측비로서 지켜야 할 규율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품계를 잊었던 것뿐이에요……. 전 지금껏 황실로 들어가면 군君이 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새언니가 예를 올리지 않으면 황실에 불경한 행동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전 새언니가 그렇게 행동하면 집안에 화를 불러올까 봐 걱정이 돼서 새언니에게 예를 올리라고 했던 것뿐이에요…….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규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거였어요. 새언니의 태도 또한 강경해서 이런 오해가 생긴 거고요.”
“그래, 그렇고말고.”
진씨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편을 들었으나 엽연채는 도리어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그럼 제가 잘못했다는 거네요?”
그리 묻는 그녀의 눈빛은 좀 전보다 더욱 싸늘했다. 그 눈빛에서 냉랭한 분노를 읽은 주묘서는 몸을 떨며 당황해하더니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에요, 제 말은 그 뜻이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건 저예요…….”
“아가씨가 잘못한 거라고요? 방금 전에 그저 오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오해요? 아가씨는 잘못을 인정할 때 그리 말하나 보죠?”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더 심하게 빈정거렸다.
주묘서는 입술을 하도 세게 깨물어 피가 다 나올 지경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또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니에요. 일단 제가 규율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고요… 또… 제가 조금 우쭐했어요……. 새언니는 이렇게 예쁜 데다가 후 부인이기까지 하니 질투가 났어요. 그런데 전 측비가 되었고 또 규율을 잘못 기억해서 새언니보고 제게 예를 올리라고 했던 거예요……. 제 잘못이에요, 흑흑…….”
진씨는 주묘서가 이렇게 연신 사과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가.
주 백야도 조금 슬픈 표정을 짓더니 옅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끼어들었다.
“셋째야… 묘서 이 어린 게 제멋대로 생각하고 잘못을 저지른 거다. 게다가 작은 잘못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래도 묘서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나도 묘서를 대신해 무릎을 꿇고 네게 용서를 구하마.”
진씨는 그리 말하며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혜연과 추길은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그녀를 잡아끌었다.
“마님, 저희 마님에게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우시려는 겁니까?”
“그러려는 게 아니다. 난 그저 묘서를 대신해 사과하고 싶은 것뿐이다.”
진씨는 그리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이 눈물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주묘서가 이렇게 억울하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흑… 대체 어떻게 해야 묘서를 용서해 줄 거니? 가여운 우리 묘서…….”
“어머니…….”
주묘서는 진씨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통곡했다. 이보다 더 처량하고 비참할 수 없게 말이다.
주 백야도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속이 쓰렸다. 그에 혀를 끌끌 차며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묘서는 그저 한순간의 치기로 네게 예를 올리라고 한 것뿐이다. 지금 사과를 하고 있고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 이쯤에서 받아 주거라!”
진씨는 주묘서를 안고 눈물을 쏟으며 슬며시 엽연채를 힐끗했다.
엽연채는 입술을 약간 오므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체면을 봐서 이 일은 이렇게 넘어가죠. 하지만 다음엔 절대 봐주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일은 절대 다시 없을 거예요!”
주묘서는 울면서 얼른 이렇게 약속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새언니.”
엽연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에휴!”
주 백야는 일이 해결되자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더니 주묘서한테 당부했다.
“앞으로 셋째 부부와 우애 좋게 잘 지내거라. 다시는 공연히 소란 피우지 말고.”
말을 마친 그는 황급히 돌아서서 그곳을 떠났다. 잠시도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씨는 주묘서를 부축하며 일어섰고 모녀는 마차에 올랐다. 주묘서는 발을 올리고 엽연채가 떠난 방향을 노려봤는데, 울어서 새빨개진 두 눈에 음랭한 기운을 가득 담았고 입술은 꽉 깨물고 있었다.
“이 주묘서가 지금 맹세한다. 내 반드시 저년과 그 빌어먹을 종자를 내 발아래 두고 짓밟을 것이다!”
주묘서는 증오심이 철철 끓는 목소리로 한 글자씩 내뱉었다.
“측비라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어디 내가 황후가 되어서도 네가 무릎을 안 꿇는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그녀는 지금까지 측비가 되어 황실에 들어가면 더없이 존귀한 존재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측비로서 태자의 총애를 얻으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전날의 손찌검으로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측비가 아무리 고귀하다 해도 결국 첩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더 이상 측비 자리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태자비가 되더라도 부족했다. 태자는 아직 황제가 아니니 여전히 주운환을 포섭해야 하잖는가.
그러니 자신은 황후가 되어야 했다. 황후가 되어야만 주운환과 엽연채를 제거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급해진 주묘서는 아주 안달이 나서 입술을 짓깨물며 말했다.
“왜 태자 전하께서는 아직도 황제가 아닌 걸까요?”
진씨는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들 모녀 둘뿐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일을 겪고 나니 자신 또한 딸이 가능한 한 빨리 자애로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보살피는 황후가 되길 바라게 됐다.
“왜… 태자 전하께서는 여전히 태자인 겁니까?”
“곧 황위에 오르실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거라.”
주묘서가 방금 말을 반복하자 진씨가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우선 인내하며 셋째의 세를 이용해 한 걸음씩 위로 오르자꾸나. 네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꿇기 싫어도 꿇어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린 네 큰오라비를 일으켜 세워서 그 빌어먹을 놈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드는 거지. 그리되고 나면 그것들을 능지처참하는 거다.”
“그럼 몇 년이나 더 견뎌야 하는 거네요?”
주묘서는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도 더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묘서는 두 눈이 새빨개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더는 이런 억울한 일을 조금도 더 겪고 싶지 않았다. 당장 엽연채를 마구 짓밟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에휴…….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아직 정정하시잖니.”
무의식중에 본심을 흘린 진씨는 자신의 입을 확 틀어막았다.
“됐으니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꾸나. 안 그러면 목이 잘릴 대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태자부로 돌아가서도 별다른 말은 하지 말거라. 돌아가면 그저 태자 전하께 제대로 사과를 드리거라. 그럼 된다.”
주묘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정선제였다.
지난번에 정선제를 만나고 그가 자신과 태자의 혼사를 맺어 주자 주묘서는 정선제가 자애롭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죽지도 않는 늙은이가 역겨울 따름이었다.
‘그렇게나 나이를 먹어 놓고도 어째서 아직도 살아 있는 걸까?’
황위에 눌러앉아 자리를 내주지 않으니 태자가 황제가 될 수 없고, 자신도 황후가 될 수 없었다.
태자도 참 뜨뜻미지근한 사람이다. 이제 곧 있으면 서른이 되는데 어째서 아직도 조급해하지 않는단 말인가. 황위에 오르려면 설마 앞으로 몇십 년을 더 견뎌야 한다는 말인가?
주묘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노여운 마음이 일었고 가슴속에서 뭔가가 솟구쳐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엽연채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추길과 청유 등 몇몇 여종은 방금 전 있었던 주묘서 일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 꼴을 보니 딱 봐도 분수에 만족하며 살 사람은 아니겠더라.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잘못을 인정하는 것뿐이지. 속으론 아니꼬워서 견딜 수가 없을걸.”
“그래, 정말 요란이더라. 앞으로도 또 음흉한 수를 쓰고 소란을 피우려고 할걸.”
청유의 말에 백수 역시 작게 ‘흥’ 소리를 내며 그들을 욕했다.
“방금 전에 상대하면 안 되는 거였어. 설령 주인마님이 정말로 무릎을 꿇으셨다고 해도 그 전에 이미 태자 전하께서 손찌검을 하셨고 전에도 오명을 쓰고 있었잖아. 그러니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사람들도 눈 감고도 맞출걸.
그리고 저 사람들이 백야까지 불러와 통사정을 했다지만, 우리에게도 노마님이 계시잖아. 정말로 무릎을 꿇었다면 노마님께 그 모녀를 잡아가 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거였어. 그럼 저 사람들이 어떻게 무릎을 꿇고 우리 마님을 모함할 수 있겠어! 오히려 재차 소란을 피웠으니 태자 전하께서 측비 마마를 폐위하셨겠지!”
“맞아. 그러면 후환이 싹 사라졌을 텐데.”
백수는 청유의 이야기에 동조한 다음, 엽연채를 쳐다보며 이리 제안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태자부로 가서 측비 마마와 관계를 끊겠다고 말하는 게 어떨까요?”
그런데 엽연채는 뜻밖에도 옅은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됐다.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해 줘야지. 아버님의 체면을 살려 드리는 것이기도 하고.”
추길과 청유 등은 깜짝 놀랐으나 혜연은 얼른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방금 전 나리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셋째 나리께서 조정에서 홀로 지내시는 게 쉽지 않을 텐데 큰아가씨가 지금 태자 측비이니 남매끼리 상부상조해야죠. 이번에 태자 전하께 손찌검을 당해 큰아가씨도 정신이 드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