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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20화 (520/858)

제520화

주묘서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자리에 앉았는데 정 마마의 말에 반박을 가하진 않았다.

진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길이 없었다.

진씨는 더없이 억울했다. 비천한 서자가 지금 자신들을 이런 꼴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진씨는 주묘서를 어떻게 위로할지, 또 어떻게 일단은 굽혀야 한다고 설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묘서가 눈물을 닦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씨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묘서야…….”

“가요!”

주묘서는 이를 악물며 매서운 눈빛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아리따운 얼굴로 어둡고 싸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이 길밖에 없잖아요. 가시밭길이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해도 전 갈 거예요.”

진씨는 자리에 당당히 선 주묘서를 쳐다보며 온몸을 떨었다. 그녀는 지금 의연한 모습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진씨는 자신의 딸이 어느새 다 컸다는 생각에 감격해 마지않았다.

진씨는 고개를 힘껏 끄덕이며 자리를 떨쳤다.

“그래! 가자꾸나.”

진씨는 주묘서를 데리고 문을 나서면서 녹엽을 불렀다.

“가서 나리를 불러오너라! 수화문 쪽으로 모셔오거라.”

이런 일에 주 백야의 도움을 받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두리뭉술하게 일을 수습하는 건 그가 최고이니, 당연히 그를 빼놓아서는 안 되었다.

녹엽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고, 진씨 모녀가 수화문에 도착할 무렵 황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살짝 하얘진 얼굴로 이렇게 고했다.

“나리는 지금 집에 계시지 않습니다. 서재의 사동이 말하길 나리는 육 나리와 진귀루에서 술을 마시기로 약속하셨다고 합니다.”

진씨의 낯빛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집안에 이런 큰일이 생겼고 묘서가 위기에 당면했는데, 나리는 술이나 마시러 나가셨다는 말이냐!”

진씨는 화가 나 가슴이 뛰었고 매서운 눈으로 녹엽을 쳐다봤다.

“어서 가서 나리를 불러오지 않고 뭐 하느냐! 나리를 찾으면 집으로 돌아올 것 없이 곧장 진서후부로 오거라.”

그녀는 그리 분부하며 주묘서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녹엽의 조그만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고 그녀는 감히 지체할 수 없어 주 백야를 찾으러 당장에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크고 화려한 마차는 진씨 모녀를 싣고 흔들흔들 거리를 지나갔고, 이각 후 진서후부에 도착했다. 마부가 주씨 가문 첩자를 건넸으며 마차 또한 주씨 가문 것이 분명했으니, 문을 지키던 하인은 그들을 안으로 바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수화문에 멈춰 선 마차에서 내리자 어멈 한 명이 곧장 달려와 그들을 맞이했고 또 어린 여종은 안으로 뛰어 들어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주묘서와 진씨가 수화문 안으로 들어서자 혜연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그들을 보더니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어머, 전 또 누구신가 했는데 태자 측비 마마셨군요!”

주묘서는 조롱으로 가득한 혜연의 말을 듣더니 일순 사나운 눈빛을 보였으나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혜연아, 작은새언니는…….”

“측비 마마, 저희 셋째 마님께 보자마자 무릎을 꿇으라 하셨다지요? 그러한데 저희 마님께서 감히 어찌 측비 마마의 새언니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혜연은 조롱기가 그득 서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측비 마마,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 나리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리는 더 이상 마마와 남매가 아니라고 말이죠. 그러니 마마, 돌아가십시오!”

주묘서는 입술을 꽉 물더니 이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새언니가 나와서 만나 주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난 진심으로 사과를 하러 왔다.”

혜연의 낯빛이 확 변했다.

“무엇 하러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 저희 나리가 분명히 말씀하셨잖습니까. 이제부터 더는 남매 관계가 아니라고요.”

말을 마친 혜연은 그곳을 떠났고, 주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주묘서의 눈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웠지만, 단정히 무릎 꿇은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등도 더 꼿꼿이 세웠다.

“묘서야…….”

진씨는 주묘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당연히 속으로 엽연채와 주운환에게 수백 번도 넘게 악담을 퍼부었다.

그녀는 주묘서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주묘서는 눈빛으로 그녀를 제지했고 입술을 문 채 고개를 숙이고 진심 어린 모습을 보였다.

진씨는 억장이 무너졌지만 그녀 역시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엽연채와 주운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설령 그들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해도 주묘서가 이곳에서 무릎을 꿇었으니 성의는 충분히 보인 셈이 된다.

주묘서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며 진심으로 뉘우쳤음이 밖으로 전해지면 주묘서를 향한 백성들의 악의도 줄어들 것이고, 그녀를 약자라고 생각하며 동정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엽연채와 주운환의 평판은 나빠질 터였다.

이것저것 재 보던 진씨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이를 악물고는 자신도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서후부의 여종들이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진씨를 붙잡았다.

“마님, 뭐 하시려는 겁니까?”

“뭐 하다니? 난 그저 묘서를 위해 사과하려는 것뿐이다.”

진씨의 대꾸에 여종들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진씨는 이 집안 상전의 어머니가 아닌가? 그리고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에게 무릎을 꿇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일이 밖으로 전해지면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후야와 후 부인은 사람들에게 불효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었다.

게다가 주운환은 어린 나이에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았으며 후작이라는 높은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조정엔 그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이 같은 상황에 불효라는 죄를 뒤집어쓰게 되면 입장이 무척 곤란해질 것이다.

“제가 잘못했어요… 흑, 흐윽…….”

주묘서는 이때다 싶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던 두 여종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그중 하나가 이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그 시각 운연거.

방금 막 무도장에서 돌아온 엽연채는 목욕을 한 뒤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후 작은 요리상 앞에 앉아 매괴고玫瑰糕를 먹으며 향나음香糯飮을 마시고 있었다.

백수와 매화 등 몇몇 여종은 명자나무 아래에 앉아 한담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어멈이 뛰어 들어와 뭐라고 이야기하자 백수는 깜짝 놀라더니 얼른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님. 주 측비 마마가 수화문 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방금 전에는 주인마님도 무릎을 꿇으려고 하셨습니다!”

“뭐? 이거 큰일 났네!”

추길은 깜짝 놀라더니 엽연채를 쳐다봤다.

“마님. 저희…….”

그러나 엽연채는 들고 있던 매괴고를 천천히 먹더니 또 반쯤 남은 향나음도 마저 마셨다. 그러고 나서야 자리에서 느긋하게 일어섰다.

“가자.”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녀를 쫓아갔고 혜연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뒤를 따라나섰다.

엽연채는 금세 수화문에 도착했다.

주묘서와 진씨는 엽연채가 나오는 걸 보더니 순간 의기양양한 눈빛을 보였다. 엽연채가 감히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무릎을 꿇으면 고달파지는 건 엽연채일 테니 말이다.

정말로 나오지 않았다면 대문 밖으로 나가서 무릎을 꿇고 그녀가 오는지 안 오는지 지켜봤을 것이다.

두 모녀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는 화려하고 부티 나는 옷을 입고 있었고 그녀 뒤로 네다섯 명의 여종과 어멈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비천한 서자 며느리 주제에 저리 기세등등한 모습이라니, 진씨 모녀는 또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때, 대문 쪽에서 놀라 고함을 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고! 뭐 하려고 날 이곳으로 끌고 온 것이냐?”

주 백야가 녹엽에게 끌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주묘서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낯빛이 확 변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그는 입으로는 그렇게 물어봤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외쳤다.

‘또 성가신 일이 일어났구나!’

주운환이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린 후로 당연히 주 백야도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환영을 받게 되었다. 조정 사람들과는 왕래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가한 귀족들은 그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다. 주 백야는 틈만 나면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아주 안락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주 백야는 더 이상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요릿집과 주루들에는 넘쳐나는 게 소문과 새로운 소식들인데, 그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하니 날마다 그런 곳을 찾아가 머물렀다.

어제 주묘서가 태자부에서 꽃놀이 연회를 열었단 소식 역시 당연히 퍼져 있었고, 주 백야의 벗은 그에게 어째서 참석하지 않았냐고 놀려 댔다.

주 백야는 딸이 이런 연회를 여는 게 아주 체면이 서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미소를 지으며 여인들만 초대했는데 사내인 자신이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그때만 해도 아주 득의양양해했다. 그런데 점심밥을 반도 채 먹기 전에 태자부에서 전해진 망신스러운 이야기를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묘서가 집안싸움을 벌여 자신의 든든한 배경을 스스로 차 버리고 태자에게 뺨까지 맞은 것이었다.

주루의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리며 주묘서가 아둔하고 배은망덕하다고 이야기했다. 주 백야는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았고 화가 나고 딸이 미웠다. 도저히 자리에 더 머무를 수 없었던 그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진씨와 주묘서를 꾸짖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분명 이 모녀는 또다시 울고불고할 테고 주운환 부부와 이 모녀 사이엔 너무 많은 것들이 얼키설키 뒤얽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괜히 벌집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이내 집에 돌아온 걸 후회했다. 그나마 모녀가 아직 태자부에 있다는 걸 알게 되고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오늘 아침 주 백야는 그들이 돌아올 것에 대비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피해 있었는데도 진씨가 끝내 사람을 잡아와 이런 골치 아픈 일에 끌어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주 백야는 무릎을 꿇고 있는 주묘서를 보고 있자니 낯빛이 어두워졌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무능해 보일까 봐 차마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이때, 엽연채가 수화문을 넘어왔다. 엽연채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주묘서를 빤히 보며 물었다.

“무슨 낯으로 이곳에 온 거예요?”

진씨와 주묘서는 엽연채가 무례한 말투로 이야기하자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꾹꾹 눌렀다.

“새언니,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저도 순간적으로 생각을 잘못한 것뿐이에요… 흑…….”

주묘서는 표정을 바꿔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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