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9화
태자비와 백여언은 난처하고 곤란한 주묘서의 모습을 보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묘서에게 무엇도 캐묻지 않았다. 그녀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다. 태자비와 백여언 등의 처첩들은 그저 꽃놀이 연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사실, 오늘 있던 꽃놀이 연회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전의 꽃놀이 연회를 회상하며 이따금씩 조롱하는 눈빛으로 주묘서를 쓱 쳐다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주묘서가 부끄럽고 화가 나 죽고 싶게 만들 수 있었다.
주묘서는 차마 그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다. 어쨌든 태자비가 직접 온 데다 태자가 날린 손찌검의 위력이 아직 남아 있었기에 감히 하극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태자비 등은 저녁 식사를 할 때쯤이 되어서야 그곳을 떠났다. 주묘서는 그들이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대문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흐느꼈다.
“문을 닫아라! 흑흑… 콱 죽어 버리고 싶구나!”
주묘서는 또 쿵 소리를 내며 탑상 위로 쓰러졌다.
녹지는 이미 밖으로 뛰어나갔고 쾅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 버렸다.
“저것들이 감히…….”
주묘서는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더니 진씨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오늘 겪은 수모를 반드시 저것들에게 배로 갚아 줄 거예요.”
* * *
저녁이 되자 엽연채의 작은 활은 절반 정도 만들어졌다.
이튿날 주운환이 조정에 나간 후, 어제 활을 갖고 놀았던 일이 떠오른 엽연채는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소매가 좁은 옷을 입고 무도장에 가서 놀았다.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가까워졌을 때쯤 엽연채는 이미 땀을 꽤 뺀 후였다. 이때 추길이 걸어와 고했다.
“마님, 둘째 아가씨와 녹지가 왔습니다.”
엽연채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는데 이곳에 왔다는 두 사람의 조합을 듣더니 검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냉소를 지었다.
“데려오너라.”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대청으로 모시지 않아도 되나요?”
“그럴 필요 없다. 이리로 데려오거라.”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반복했고 무슨 말을 하려던 추길은 결국 입을 다문 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지금 주묘화와 녹지는 어제 일 때문에 이곳에 온 게 분명했다. 분명히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텐데 어째서 이곳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걸까? 거절할 때는 하더라도 일단 듣는 시늉은 해야 해서?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상태로 추길은 밖으로 향했다.
잠시 후, 추길은 주묘화와 녹지를 데리고 걸어왔다. 이곳은 아주 널찍한 장소로 멀지 않은 곳에 열 개가량의 과녁이 세워져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바람을 쐴 수 있는 넓은 정자와 돌 탁자, 돌의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녹지가 사방을 둘러보니 휑뎅그렁한 공간에 서늘한 느낌이 조금 섞여 있었다.
주묘화와 녹지가 넓은 정자 앞쪽을 보니 엽연채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손에 활을 들고 있었고 머리도 전부 올려 묶었는데 아주 간단한 머리 형태였다. 그리고 뜻밖에도 활을 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은 엽연채 곁으로 걸어갔다. 주묘화가 어색해하며 그녀를 불렀다.
“작은새언니…….”
엽연채는 고개를 돌리더니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시간이 났나 보네요.”
주묘화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녹지는 낯빛이 하얗게 변하더니 순간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앉아요.”
엽연채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손에 든 활을 들어 올리자 청유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 활을 건네받았다.
엽연채가 먼저 한편의 돌 탁자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주묘화와 녹지는 어리둥절해하다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주묘화는 감히 자리에 앉지 못했고 고개를 숙인 채 옷에 달린 끈만 움켜쥐었다.
그러자 녹지가 짜증 난 눈빛으로 주묘화를 쏘아봤고, 주묘화는 조그만 얼굴이 하얗게 변하더니 그제야 운을 뗐다.
“작은새언니. 할머니가…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세요. 그러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뵈세요!”
말을 마친 주묘화는 고개를 떨군 채 감히 엽연채를 쳐다보지 못했다. 엽연채는 풉 하고 비웃음을 짓더니 그녀를 쓱 훑었다. 주묘화는 조그만 머리를 더 낮게 숙였고 그저 엽연채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그랬군요. 그런데 제가 요 며칠 달거리 중이라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를 뵙기가 곤란하네요.”
주묘화는 표정이 굳어졌고 녹지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화가 나 가슴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마님, 달거리 중이시라고요? 그런데 이곳에서 활을 쏘고 계셨어요?”
엽연채는 곱고 아름다운 눈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냉담한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하, 넌 녹지가 아니냐? 녹지 넌 이미 태자부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주씨 가문을 대신해 말을 전하러 온 것이냐?”
녹지는 표정이 굳어졌다.
“손님을 배웅해 드리거라.”
엽연채는 그들을 더 상대하기 귀찮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활을 집어 들었다. 옆에 있던 추길과 청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엽연채가 손님을 배웅하라고 했으니 그들은 얼른 발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두 분, 저희 마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시니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주묘화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순간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님, 노마님께서 병이 나셨습니다. 이, 이러시는 건 불효예요!”
녹지는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러시는 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청유가 달려오더니 짝 소리를 내며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네가 여기서 소란을 피울 주제나 돼?”
뺨을 맞은 녹지는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고 기겁한 주묘화는 ‘꺅’ 소리를 내더니 얼굴이 새하얘졌다.
녹지는 너무도 화가 나 고개를 들었는데 엽연채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딱히 차갑거나 조롱하는 눈빛이 아닌 무덤덤한 눈빛만 보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 눈빛에 녹지는 오히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 때문에 엽연채의 하인이 자신을 때린 데 분노했지만 감히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기죽은 모습으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수화문을 나온 주묘화와 녹지는 곧장 마차를 타고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일상원.
진씨는 탑상에 앉아 있었고 주묘서는 옆에 놓인 수돈에 앉아 그녀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 백 이낭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하좌에 자리했다.
어제 태자비 등이 떠난 후, 진씨는 태자부에 남아 주묘서 곁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오늘 아침이 밝자마자 모녀는 함께 주씨 가문으로 돌아왔다.
이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니 주묘서와 녹지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진씨와 주묘서가 긴장한 채 고개를 들어 보니 두 사람은 낯빛이 하얬고 더욱이 녹지의 오른쪽 얼굴에는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
주묘서의 조막만 한 얼굴이 허옇게 질리더니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새언니는?”
주묘화는 깜짝 놀라 작은 몸을 떨더니 고개를 숙였다. 백 이낭은 주묘서가 자기 딸을 몰아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에 칼이 꽂힌 것처럼 마음이 아팠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묘화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희가… 할머니께서 병이 나셨다고 말했는데… 작은새언니가 달거리 중이어서 당장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하셨어요.”
“달거리는 무슨! 핑계에 불과합니다. 집으로 오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녹지는 두 눈을 부릅뜨며 화가 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마마와 마님은 모르세요. 저희가 갔을 때 셋째 마님은 활을 쏘며 놀고 계셨어요. 어찌나 생기가 넘치던지 산에 올라가 호랑이라도 잡을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달거리 중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일부러 그런 게 분명해!”
주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문밖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도 주운환이 자신의 버팀목이며 주운환이 없으면 자신이 절대로 태자부에 발붙이고 살 수 없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주운환, 엽연채와의 관계를 회복해야만 했다.
그러나 체면을 내팽개치고 엽연채를 직접 찾아가 사과할 정도로 굽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엽연채가 이곳으로 돌아와 자신들을 보면 그때 주 백야에게 두루뭉술하게 일을 수습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넘어갈 작정이었는데, 엽연채가 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이건 불효예요! 할머니께서 병이 나셨는데 안 오는 건 불효라고요.”
주묘서는 화가 나 눈물이 날 지경이었고 죽을힘을 다해 엽연채에게 죄를 씌우려고 했다.
“좋다! 감히 이렇게 대놓고 불효막심하게 군다 이거지! 기운이 넘치면서도 몸이 아프다며 효도를 하지 않는데, 이 사실이 밖으로 전해진다면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내가 지켜볼 거다. 주운환이 탄핵을 받는지 아닌지 어디 한번 보자고!”
진씨 등도 분노로 가득 찬 눈빛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눈빛을 보이면서도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하좌의 백 이낭이 조롱기 가득한 눈빛을 띠며 냉담하게 말했다.
“큰아가씨, 아니 측비 마마.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마세요. 이 일이 전해진다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해를 입는 사람은 도리어 측비 마마일 겁니다.”
“됐으니 시끄럽게 굴지 말거라.”
정곡을 찔린 진씨가 이를 악물고 주묘서를 쳐다봤다.
어제 막 그런 일이 벌어진 데다 사람들은 모두 주묘서와 엽연채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거기다 주묘서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태자에게 뺨을 맞는 바람에 온 도성 사람들이 배꼽이 빠지게 비웃어댔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매씨가 병이 났는데 엽연채가 꾀병을 부리며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어찌 보겠는가. 사람들도 눈이 삐지 않았다. 적어도 태자부 사람들은 모두 주묘서가 친정으로 돌아간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친정으로 돌아오자마자 매씨가 병이 나고 그에 엽연채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진씨 모녀가 핑계를 대어 엽연채를 불러 놓고도 여전히 고자세를 취했다는 걸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주묘서가 진심으로 사과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할 텐데 그리되면 주묘서의 상황이 더욱 곤란해질 뿐이었다.
엽연채는 자신들이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할 거라고 확신해 감히 이렇게 대놓고 거절했을 것이다. 이를 분명히 깨닫게 된 주묘서는 조그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녹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으로서는… 직접 방문해 사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 마마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